영화이야기/2005년 영화이야기

[극장전] - 정겹게 어눌하다.

쭈니-1 2009. 12. 8. 18:09

 




감독 : 홍상수
주연 : 엄지원, 김상경, 이기우
개봉 : 2005년 5월 27일
관람 : 2005년 5월 9일

지금까지도 제가 제 자신에게 한가지 이해안되는 것이 있다면 작가주의 영화라면 질색을 하는 제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만은 좋아한다는 겁니다. 저는 소위 영화제용 영화들을 싫어하며, 관객의 재미는 뒤로 미루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해대는 작가주의 감독들의 고집을 싫어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는 아직도 김기덕 감독을 싫어합니다. 그가 세계 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으며 거장으로 성장하고 있는 지금 현재에도 저는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이 꺼려집니다. 그런 제가... 남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는 영화만을 편식하는 제가... 이상하게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만은 좋아하는 겁니다.
홍상수 감독은 제가 싫어하는 거의 모든 면을 가지고 있는 감독입니다. 그의 영화는 영화적인 재미따위는 없습니다. 그의 영화는 스토리 라인이라는 것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지독히 현실적입니다. 남성 캐릭터들은 짜증이 날 정도로 어눌하고 한심합니다. 여성 캐릭터들은 영화속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남성 캐릭터의 주변 인물로 머물기만 합니다. 도대체 영화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때가 대부분이고, 보고나도 영화가 쉽게 잊혀집니다. 그런데 그의 영화는 이상하게도 호감이 갑니다.
제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게 된것은 [강원도의 힘]에서부터입니다. 단지 영화의 제목이 특이해서 본 영화인데 영화를 본 후 뒷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멍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강원도의 힘]은 바로 내 이야기같았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단둘이서 설악산에 놀러갔던 젊은 시절 한심한 여행의 풍경이 [강원도의 힘]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을 보고 느꼈던 충격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내가 체험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느끼는 환상 여행이다라고 굳게 믿는 제게도 그러한 홍상수 감독의 현실속의 여행은 정말 특이한 체험이었습니다.


 



제겐 이토록 이상한 감독인 홍상수 감독의 신작이 돌아왔습니다. 최근작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통해 약간은 실망스러웠던 그의 영화가 이번엔 깐느 영화제 본선 진출이라는 대단한 명함을 지닌채 돌아온 겁니다.
그러나 [극장전]은 이전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영화입니다. 그의 영화는 여전히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남자 주인공인 동수(김상경)와 상원(이기우)은 한심하기만 합니다. 여자 주인공인 영실(엄지원)은 여전히 영화속에서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무심한 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솔직히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극장전]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아쉬움을 한번에 해소할 수 있을 정도로 홍상수 감독의 진수를 느낄만한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극장전]은 두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영화속 영화 이야기로 어눌한 19세 청년 상원이 첫사랑이었던 영실과 우연히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나온 동수가 자신이 보고나온 영화에 출연했던 여배우 영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가지 이야기는 서로 다른듯 하면서도 서로 어눌함이 닮아 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홍상수 감독은 첫사랑이라는 아련한 감정을 현실의 이야기속에 구겨 넣습니다. 첫사랑과의 재회 그리고 동반 자살이라는 지극히 영화적인 소재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나도모르게 웃음이 납니다. 동반 자살을 하기위해 수면제를 잔뜩사서 한알, 한알씩 나누던 이들의 모습을 보며 '킥킥'거렸던 웃음은 결국, 한번의 구토와 함께 멀쩡히 걸어나가는 영실의 모습과 가족들에게 핀잔만 잔뜩 듣고 이번엔 투신 자살을 하기위해 아파트 옥상으로 갔지만 아무도 뒤쫓아오지 않음을 알고 머쓱해하던 상원의 모습에서 박장대소로 이어집니다. 영화적인 상황이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과 겹쳐지며 터져나오는 어눌함은 이렇게 유쾌한 웃음이 되어 제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홍상수 감독의 진수는 두번째 이야기인 동수와 영실의 만남입니다. 암으로 투병중인 선배의 회고전을 찾아 영화를 본 그는 우연히 극장앞에서 영화의 여주인공인 영실을 만나고 그와 영화같은 하룻밤을 보냅니다.
이 두번째 이야기의 핵심은 동수라는 캐릭터의 어눌함입니다. 동수는 홍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속 남성 캐릭터들처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입니다. 이미 [생활의 발견]을 통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김상경은 그래서인지 홍상수 감독이 즐겨그려내는 한심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해냅니다. 동수라는 캐릭터를 보면 정말 '뭐 저런 인간이 있을까'싶을 정도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이(솔직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납니다. ^^;) 이렇게 한심하도록 어눌한 동수는 영실이라는 매력적인 여성과 만나며 영화같은 하룻밤을 보냅니다.
하지만 첫번째 이야기인 상원과 영실이 그랬듯이 동수와 영실의 하룻밤의 여정역시 영화적인 상황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동수와 상원의 캐릭터가 겹쳐집니다. 동수가 영실과의 술자리에서 영화속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라며 주장하는 것에서 홍상수 감독은 두 캐릭터를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그런 동수와 상원의 캐릭터의 겹침은 영화를 보고나온후 자연스럽게 현실속의 저와 겹쳐지기도 합니다. 물론 동수라는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한심하긴 영화를 보면서 점점 동수라는 캐릭터에 정감이 느껴집니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먼저 이룬 선배에 대한 질투심... 10년동안 감독 준비를 했지만 감독 데뷔가 이뤄질지 알수 없는 암울한 상황... 그런 상황에 부딪힌다면 저 역시도 동수처럼 저렇게 행동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현실적인 캐릭터가 바로 홍상수 감독의 힘이죠.


 



영화가 끝나고 홍상수 감독과 김상경, 엄지원, 이기우와의 대화 시간이 있었습니다. 감독과 출연 배우들의 짦막한 무대 인사는 본적이 있지만 이렇게 꽤 긴 시간동안 감독, 배우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때 대단한 사실을 한가지 발견했습니다. 영화속 영화의 주인공인 상원이 동수와 닮아있다면 그런 동수는 바로 홍상수 감독과 닮아있더라는 겁니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보여준 홍상수 감독의 그 어눌한 모습은 그의 영화속 캐릭터들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물론 영화속 캐릭터들처럼 한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
김상경은 경험이 많은 배우답게 관객들을 휘어잡으며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재미있게 이끌어주었고, 이기우는 신인답게 말을 최대한 아끼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극장전]의 가장 큰 발견인 엄지원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아마도 이 영화를 계기로 엄지원의 팬이 될것만 같은 느끼이 드네요.
영화를 보고나오며 영화라는 것이 결국 감독의 마음의 창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속 캐릭터들과 너무나도 닮은 홍상수 감독의 그 어눌함... 영화의 초반에 짜증이 날 정도로 한심했던 동수라는 캐릭터가 영화가 진행되며 정겹게 느껴졌는데 바로 그러한 모습을 홍상수 감독에게 느낄줄이야...
[극장전]을 본 후에도 여전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영화적인 재미면에 대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릴 수는 없지만 영화적인 상황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홍상수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에는 이번에도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그렇기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저는 여전히 기대합니다. 제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작가주의적 감독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