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리들리 스콧
주연 : 올랜도 블룸, 에바 그린, 에드워드 노튼
개봉 : 2005년 5월 4일
관람 : 2005년 5월 6일
중세의 정점이자 붕괴의 시작인 십자군 원정을 영화화하기로 처음 결심한 사람은 폴 버호벤 감독이었습니다. [로보캅]과 [토탈리콜]이 흥행에 성공한후 아놀드 슈왈츠네거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등, 자신의 필생의 야심작인 십자군 원정에 대한 영화를 차곡차곡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폴 버호벤 감독의 십자군 프로젝트는 캐롤코사의 도산과 함께 백지화되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절치부심하여 [원초적 본능]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흥행 성공을 거두었고, [쇼걸]로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완벽한 실패작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스타쉽 트루퍼스], [할로우 맨]의 흥행 실패로 십자군 프로젝트를 영화할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만약 캐롤코사가 도산되지 않았다면... 만약 [쇼걸]과 [스타쉽 트루퍼스], [할로우 맨]이 흥행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아마 폴 버호벤과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십자군 원정에 대한 액션 대서사극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십자군 원정 프로젝트가 넘어간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미 [글래디에이터]로 대하서사극에 대한 탁월한 능력과 흥행성을 인정받았으며, [한니발], [블랙 호크 다운]등으로 꾸준히 헐리우드 제작자들에게 안정된 수익을 안겨준 감독이니까요.
[킹덤 오브 헤븐]을 보고 극장밖을 나온 새벽길에서 이 영화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폴 버호벤 감독의 얼굴이 보이는듯 했습니다. 과연 폴 버호벤 감독이 [킹덤 오브 헤븐]을 만들었다면 어떤 영화가 되었을까요? [로보캅], [토탈리콜]과 같은 한순간도 정신차릴 틈을 주지 않는 액션 활극이 되었을까요? [원초적 본능]과 [쇼걸]같은 중세 에로티즘 영화가 만들어졌을지도... 하지만 그보다도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아마도 [스타쉽 트루퍼스]같은 영화가 되었을거라는 겁니다. [스타쉽 트루퍼스]는 십자군 원정프로젝트에 대한 미련으로 만들어진 SF 십자군 원정같은 영화였으니 말입니다. 전쟁을 통한 소년의 성장, 참혹한 전투,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의 결말등, 그러고보니 리들리 스콧의 [킹덤 오브 헤븐]과 많은 면이 비슷해 보이는군요.
암튼 십자군 프로젝트는 리들리 스콧에게 넘어갔고, 그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여 장엄한 대하서사극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킹덤 오브 헤븐]을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영화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제작사는 분명 [글래디에이터]같은 영화적인 재미를 갖춘 영화를 원했을텐데 말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들어낸 [킹덤 오브 헤븐]은 오히려 [블랙 호크 다운]과 같은 영화입니다. 하느님의 성스러운 도시인 예수살림을 되찾는다는 명분아래 시작된 십자군 원정. 그러나 그러한 성스러운 명분은 전쟁광들로 인하여 이교도에 대한 학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주고, 단지 현실에 대한 도피처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발리안(올랜도 블룸)은 참혹한 전쟁속에서 점차 나약한 남자에서 강한 영웅으로 성장해 갑니다.
[글래디에이터]가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막시무시(러셀 크로우)의 영웅담으로 시작하여 복수극으로 끝나는 반면, [킹덤 오브 헤븐]은 발리안의 성장을 쫓다가 그가 영웅이 되는 그 시점에서 영화를 끝냅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관객이 환호할만한 영웅이 처음부터 부재했으며, 그렇기에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주인공의 카리스마에 의한 짜릿한 쾌감은 현저하게 부족합니다.
그 대신 이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잡아냅니다. 소말리아의 난민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블랙 호크 다운]의 전쟁이 결국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미군 부대원들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어졌듯이, [킹덤 오브 헤븐]의 전쟁 역시 어느덧 성스러운 명분은 전쟁의 참혹함에 묻히고 서로 죽고 죽이는 비열한 살상만이 남아버린 겁니다. 광할한 대지위에 마치 쓰레기더미처럼 쌓여진 시체들의 광경은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헐리우드 최고의 스타일스트답게 십자군 원정이라는 광할한 소재를 완벽하게 스크린 속으로 부활시킵니다. 어마어마한 대군들의 전투씬을 잡아내는 그 탁월한 화면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스크린의 크기속에 알맞게 재단된 전투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찔한 스펙타클과 짜릿한 재미를 안겨줍니다. 역시 리들리 스콧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킹덤 오브 헤븐]에 실망했습니다. 영화의 주제의식도 좋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리들리 스콧의 탁월한 영상미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발리안은 제게 너무나도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발리안은 분명 카리스마가 부족한 캐릭터입니다. 저는 그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알렉산더라는 세기의 영웅을 영화화했으면서도 오히려 나약한 인간 알렉산더를 그려낸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알렉산더]를 재미있게 봤던 저는 이런 대하서사극에 영웅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발리안은 영화 초반부터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였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그를 비관한 아내의 자살. 기독교의 교리에 따라 목이 잘린채 묻힌 아내의 시체와 이에 대한 분노로 사제를 살해하는 극형에 처할 범죄를 저지른 한 남자. 그가 바로 발리안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고프리(리암 니슨)에게 묻습니다. 예수살렘에 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냐고? 자살한 아내와 사제를 살해한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냐고? 결국 발리안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이유는 영웅심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가 고프리의 죽음과 함께 아버지의 영토를 물려받은 영주가 되자 갑자기 변합니다. 물론 이 영화가 발리안의 영웅으로써의 성장을 그린 영화이기에 발리안의 변화는 어느정도 예상된 일이지만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십자군 원정과 발리안의 성장이라는 두가지 소재를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발리안의 성장을 안이하게 처리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로인해 발리안이라는 캐릭터는 영화 초반의 인간적인 매력을 영화의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고 어정쩡한 영웅같은 이상한 캐릭터로 전락합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상심하던 남자가, 시빌라 공주(에바 그린)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고,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간의 화합을 꾀했던 예수살렘의 국왕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튼)의 제의는 신의에 어긋난다며 단호히 거절하더니, 그로인해 벌어진 예정된 전쟁의 참사속에서는 예수살렘의 주민들을 지킨다며 영웅노릇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모든 것을 버리고 평범한 대장장이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발리안은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를정도로 일괄적이지 못한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킹덤 오브 헤븐]은 스스로 영화적인 재미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립니다.
리들리 스콧은 분명 십자군 원정에 대한 멋진 영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인정합니다. 십자군 원정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어느 한쪽의 입장으로 치우치지 않은 공평한 시각에서 보려고 노력했으며, 결국 하느님의 성전을 지킨다던 그들의 성스러운 여정이 이끌어낸 파국을 블럭버스터다운 스펙타클한 영상으로 잡아냅니다. 과연 그들의 명분은 옳았을까요? 인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였던 예수의 성지를 되찾는다는 이유로 이교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전쟁이라는 것은 그 어떤 명분아래에서도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라도 캐릭터가 부실한 영화는 결코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관객들이 보는 것은 바로 주인공이고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영화의 주제도 느끼는 것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발리안은 빵점짜리 주인공입니다. 차라리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이거나, [알렉산더]의 알렉산더(콜린 파웰)처럼 나약한 내면을 가진 캐릭터이거나, 암튼 뭔가 일괄적인 그런 캐릭터의 성격이 부여되었어야 합니다. 이도저도 아니게 나약한 남자에서 갑자기 정의로운 기사로, 또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으로 돌변하는 발리안을 보며 영화의 멋진 주제도 결국 시들어져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나서 더더욱 폴 버호벤 감독이 그리워졌습니다. 물론 폴 버호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면 리들리 스콧 감독과 같은 주제의식은 영화속에서 표현되지 않았을수도 있습니다. 그는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우친 감독이니까요. 하지만 최소한 영화적인 재미는 만끽했을 것이며, 더더욱이 영화가 [스타쉽 트루퍼스]같은 영화였다면 주제의식도 어느정도 표현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아놀드 슈왈츠네거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죠. 지금은 너무 늙긴 했어도 암튼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액션 배우였음에는 분명하니까요.
암튼 영화에는 실망했지만 썸머시즌의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가 영화적인 재미보다는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영화라는 점이 놀랍군요. 올해 썸머시즌에도 쟁쟁한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들이 라인업을 꽉 채웠던데, 정말 기대가 됩니다. 작년처럼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액션 영화들로 채워지진 않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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