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대승
주연 : 차승원, 지성, 박용우
개봉 : 2005년 5월 4일
관람 : 2005년 5월 5일
지긋지긋하던 4월의 비수기가 지나가고 드디어 계절의 여왕임과 동시에 블럭버스터의 시작을 알리는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4월 한달동안 볼만한 영화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저는 5월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혈의 누]와 [킹덤 오브 헤븐]이라는 두편의 기대작과 만나 마음이 한껏 들떠 버렸답니다. 이 두 영화중 일단 애국심을 발휘해서 우리 영화인 [혈의 누]를 선택했습니다.
[혈의 누]는 제게 많은 기대를 안겨준 영화임과 동시에 약간의 불안감도 안겨준 영화입니다. 일단 기대요소는 김대승 감독입니다. 얼마전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이은주의 최고의 영화로도 꼽히는 [번지점프를 하다]로 감독에 데뷔한 김대승 감독은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보여줬던 아름다운 영상과 예측을 불허하는 스토리 전개로 제겐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신인 감독 1순위였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작을 이렇게 5년만에 만나게되니 어찌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영화의 불안요소는 출연 배우들입니다. 주인공을 맡은 차승원의 경우 저는 아직 그의 진지한 연기를 본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는 웃겼고 관객들은 그 웃음을 즐겼습니다. 그렇기에 코미디 영화가 아닌 역사 스릴러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혈의 누]에서의 차승원의 연기는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감독이 되어버린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도 송강호의 연기가 웃기는 바람에 좋은 점수를 주지 못했던 저는 [혈의 누]에서의 차승원이라는 존재는 분명 불안요소였습니다.
박용우와 지성 역시도 제겐 불안요소입니다. 박용우의 경우 영화속에서 한번도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적이 없기에 그의 존재는 언제나 영화에서 마이너스 요소였습니다. 그런 그가 [혈의 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줄것이라 솔직히 저는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답니다. 지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TV에서 활약을 했던 배우들이 스크린으로 옮길때 자주 하는 실수는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드라마에서 언제나 멋진 배역만을 맡았던 그들은 영화에서도 그런 멋진 모습을 유지하려하고 그런 욕심은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켰습니다. 드라마에선 언제나 멋진 모습을 보여줬던 지성은 그렇기에 불안했습니다. 그가 과연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를 인정하며 영화속에서 자신의 캐릭터에 최선을 다할수 있을런지... 왠지 영화를 보기전부터 불안해지더군요. 이렇듯 기대와 불안속에서 제 5월의 첫 영화는 막이 올랐답니다.
1. 차승원... 그는 결코 웃기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하며 저는 차승원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솔직히 저는 차승원의 얼굴만 봐도 웃길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가 연기를 할때마다 김대승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무지 웃길거라 지레 짐작한 거죠. 그런데 그는 웃기지 않았습니다. 양복을 벗어던지고 사극의 복장을 입고 있어도 모델 출신답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잘 어울렸습니다. 뺀질거리는 그래서 저절로 폭소를 자아내던 그의 목소리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조선말기의 수사관의 위엄있는 목소리가 되었고, 인간미가 물씬 풍겨나던 그 눈빛은 사건의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눈빛으로 돌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신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차승원이라는 배우와 어울렸다는 겁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혈의 누]가 흥행에 성공한다면 저는 70% 이상은 차승원의 공로라 확신합니다. 그의 스타 파워는 [귀신이 산다]와 같은 결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코미디 영화에서조차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만큼 관객들은 그를 믿었고, 그는 관객들의 믿음에 웃음으로 보답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연기 변신을 시도합니다. 물론 여전히 관객들은 웃기는 차승원을 더욱 좋아할테지만 분명 현시점이 차승원에게는 연기 변신을 해야만 하는 시점임에는 분명합니다. 차승원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차태현의 경우 이미지 변신을 거부한 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투 가이즈]와 같은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줬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차승원의 변신 시점은 아주 절묘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차태현이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의 실패후 이미지 변신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안이하게 [투 가이즈]라는 코미디 영화를 선택한 결과 그는 차기작인 [새드 무비]에서도 흥행에 실패한다면 스타라는 자리에서 생각보다 짧게 내려와야하는 위험한 위치에 서있는 겁니다.
[혈의 누]이전의 차승원이 그랬습니다. 정확히 차태현과 비슷했습니다.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선생 김봉두]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귀신이 산다]에서 이전의 영화들과는 달리 뜨끈미지근한 흥행결과를 보여줬습니다. 그것은 마치 차태현의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에서와도 같은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차태현과는 달리 자신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혈의 누]를 차기작으로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는 아직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투 가이즈]는 실패했고 [혈의 누]는 현재 좋은 평가를 받으며 개봉첫주 흥행에서 문근영을 앞세운 [댄서의 순정]을 앞질렀다는 겁니다.
그런 차승원의 연기 변신은 [혈의 누]의 영화적 재미를 완벽하게 끌어올립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배우가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 이미지로 연기할때의 그 신선함. [혈의 누]는 차승원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2시간동안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진심으로 차승원의 연기변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2. 박용우와 지성도 훌륭했다.
제가 이 [혈의 누]를 보기전에 가장 우려한 것이 차승원이 연기변신에 실패했을때의 어색한 영화의 분위기였다면, 박용우와 지성의 연기는 솔직히 포기상태였습니다. 다시말해 차승원의 변신에 대해서는 영화의 불안요소였지만 그와 동시에 기대요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변신이 실패한다면 [혈의 누]는 엉터리 역사 스릴러가 될테지만 그의 변신이 성공한다면 오히려 완벽한 역사 스릴러가 될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승원의 존재가 이렇게 [혈의 누]에겐 양날의 칼이었다면, 박용우와 지성의 존재는 '제발 중간만 해다오'라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용우와 지성은 그런 제 심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완벽하게 차승원의 뒤를 받쳐주며 영화의 재미를 살렸습니다.
먼저 박용우의 경우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게 박용우는 [올가미]의 그 존재조차도 희미한 짜증나는 배우였습니다. 스릴러 영화에서, 그것도 사건의 발단이 되는 중요한 캐릭터가 그토록 인상적이지 못한 연기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졌을때의 실망스러움은 7년이 지났건만 결코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올가미]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수많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그의 연기가 기억에 남는 영화는 단 한편도 없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무사]에서조차 그가 출연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니까요.
하지만 [혈의 누]에서의 박용우는 다릅니다. 그가 연기한 인권이라는 캐릭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서 제 뒷통수를 쳤습니다. 영화의 초반까지 그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존재가 희미하던 그가 영화의 후반부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제게 다가온 겁니다. 박용우라는 배우의 발견은 어쩌면 [혈의 누]에서 가장 멋진 수확일지도...
지성의 스크린 데뷔도 훌륭했습니다. 천민 화가라고는 하지만 멋들어지게 머리카락을 흘러내리고 폼을 잡는 모습만 보곤 괜히 멋진척 해대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우려가 영화의 마지막 반전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가 너무 지성이라는 배우를 우습게 본 탓에 그가 영화의 재미를 위해 스스로 망가질 수 있는 배우라는 사실을 간과해버린 겁니다. 그 결과 저는 영화의 마지막 반전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죠. 하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박용우와 지성을 이용해서 마지막 반전을 완성한 김대승 감독의 연출력도, 그런 김대승 감독의 기대에 부흥하여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 박용우와 지성의 연기력도, 저를 기분좋게 만들었습니다.
3. 역시 화두는 사랑이었고, 결과는 인연이었다.
이렇듯 [혈의 누]에서의 불안요소가 오히려 영화의 재미가 되어버리자 [혈의누]는 거칠것없이 제 기대감을 충족시켰습니다. 빠른 스토리 전개와 잔인한 영상의 충격은 역사 스릴러라는 장르에 잘 어울려 긴장의 끈을 놓치않고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관객들을 몰아댑니다.
솔직히 저는 [번지점프를 하다]이후 김대승 감독의 차기작이 멜로 영화이기를 바랬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능가하는 슬픈 멜로, 그것이 제가 김대승 감독에게 기대한 거죠. 하지만 김대승 감독은 마치 장윤현 감독과도 같은 선택을 합니다. [접속]이후 [텔미썸딩]이라는 스릴러를 완성했던 장윤현 감독처럼 김대승 감독도 멜로 영화로 데뷔한후 두번째 영화는 잔인한 스릴러로 채운 겁니다. 개인적으로 스릴러를 좋아하는 저로써는 그러한 선택을 환영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멜로와 스릴러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네요.
하지만 [혈의 누]가 역사 스릴러라고는 하지만 김대승 감독의 멜로적 감각은 여전합니다. [혈의 누]를 보기전에 저는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과 같은 역사 스릴러를 기대했지만 김대승 감독은 [혈의 누]를 오히려 [번지점프를 하다]의 조선말기버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사랑은 금지된 사랑이었습니다. 남자 제자와 남자 선생간의 사랑.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환생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동성애이며, 그것도 선생과 제자간의 돌팔매를 받을만한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혈의 누]는? [혈의 누]의 화두 역시 사랑입니다. 그것도 여전히 금지된 사랑입니다. 천민과 양반, 반역죄로 몰린 사람과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간의 사랑. 영화는 살인과 원한이라는 소재를 통해 끔찍한 영상을 관객에게 선보이면서도 그 이면에 금지된 사랑의 슬픔을 깔아놓은 겁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자리잡은 인연의 섬뜩함은 동성간의 제자와 선생으로 만나야했던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영화의 주인공들을 슬픔과 좌절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몹니다.
영화의 마지막 잔인한 인연의 내막을 깨닫고 무너지는 차승원의 모습은 그렇기에 가슴이 아프면서도 김대승 감독의 연출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가슴 벅차게 멋졌습니다. 이렇게 다른 장르로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이제는 제가 좋아하는 감독의 명단에 김대승이라는 이름은 아주 깊숙히 새겨넣어야 할것 같습니다.
[혈의 누]를 보고나니 5월에 개봉할 또다른 우리 영화인 [남극일기]도 빨리 보고 싶어지는 군요. 이번엔 송강호가 코믹 연기를 벗어던지고 섬뜩한 스릴러의 묘미를 만끽하게 해줄것인지... 유지태는 2% 부족한 카리스마 이번 영화에선 100% 채울 수 있을런지... [혈의 누]와 [남극일기]는 어쩌면 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하는 셈입니다. 암튼 이번 여름에도 우리 영화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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