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임필성
주연 : 송강호, 유지태
개봉 : 2005년 5월 19일
관람 : 2005년 5월 19일
[혈의 누]와 함께 제겐 올 여름 우리 영화의 기대작인 [남극일기]를 드디어 봤습니다. 개봉당일 집근처 극장인 목동 CGV에는 좌석이 없어서 공항 CGV까지 가는 수고를 하면서 기여코 보고 말았습니다. (시사회를 제외하곤 목동 CGV가 아닌 다른 극장에서 영화를 본 것은 제겐 거의 1년만의 대사건입니다.)
[남극일기]는 많은 부분에서 [혈의 누]와 닮은 영화입니다. 일단 우리 영화로는 보기 힘든 스릴러 장르의 영화라는 점과 그러한 스릴러 장르속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이 닮았습니다. [혈의 누]는 조선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통해 스릴러의 색다른 스토리 라인을 만들어냈으며, [남극일기]는 남극이라는 장소를 스릴러의 소재로 이용함으로써 흰색의 공포를 잡아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두 영화가 비슷한 것은 코믹 연기에 더 능통한 차승원과 송강호가 각기 새로운 연기로의 변신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두 영화의 공통점때문에 [혈의 누]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던 저는 자연스럽게 [남극일기]도 기대를 하게 되었고, [남극일기]의 개봉을 그토록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겁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남극일기]는 제겐 상당히 실망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밀려오는 그 허탈함은 [혈의 누]를 봤을때 느꼈던 새로운 시도에 대한 희열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요? [남극일기]의 흰 눈으로 뒤덮힌 남극은 분명 [혈의 누]의 조선말기라는 시대적 상황만큼이나 새로운 시도였고, 송강호의 연기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와는 달리 제게 섬뜩함을 안겨줬는데 말입니다.
일단 이 영화의 도전 정신은 분명 박수를 받을만 합니다. 남극의 설원(물론 촬영은 뉴질랜드에서 했지만...)을 카메라에 담는다면 보통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감동의 휴먼 드라마를 연상할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돈과 기술력이 넘쳐나는 헐리우드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남극의 설원을 잡아낸다는 것은 엄청난 제작비와 특수장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모험을 감행하려면 관객이 좋아할만한 장르의 선택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테니 말입니다. 캐나다 록키 산맥에서 촬영한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 영화라는 [빙우]가 송승헌, 이성재, 김하늘과 같은 스타급 배우들을 캐스팅하고는 설경의 장엄한 풍경보다는 남녀의 삼각관계에 집착했던 것도 아마 흥행적인 계산으로인한 어쩔수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남극일기]는 스릴러라는 장르를 택합니다. 분명 우리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장르는 코미디나 멜로입니다. 우리 영화에서 스릴러 장르의 영화는 워낙 기반이 약한데다가 미국에서 성공한 스릴러 영화들조차도 국내에선 맥을 못추는 이런 상황에서 [남극일기]가 스릴러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정말 엄청난 모험입니다. 제작기간이 5년, 제작비가 90억원이라는 블럭버스터 규모의 영화가 말입니다.
물론 썸머시즌의 특성상 공포 영화에 대한 관객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에 전통 스릴러보다는 공포 영화에 가까운 [남극일기]가 흥행에서 승산이 있다고 제작사에서 판단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는 공포 영화들이 대부분 원한에 사무친 귀신이 등장하는 저예산 공포 영화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장소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는 면에서 [남극일기]와 자주 비교되고 있는 [알 포인트]에서조차 영화의 마지막에 느닷없이 귀신이 등장합니다. 분명 그 귀신씬은 [알 포인트]에서 가장 어색한 장면이 되고 말았지만 공포 영화엔 귀신이 나와야한다는 우리 공포 영화의 바뀌지않는 선입견을 잘 대변해줍니다. 그런데 [남극일기]에는 귀신이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새로운 도전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인하여 점차 미쳐가는 탐험대를 그릴 뿐입니다. 그런 심리 스릴러가 얼마나 관객들에게 먹혀들어갈지 미지수인데 선뜻 거액의 제작비가 투여된 이 영화의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송강호의 연기 변신도 이번 만큼은 성공적이라 평가하고 싶네요. 송강호는 분명 연기력으로 따진다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정도로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입니다. 하지만 그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넘버 3], [조용한 가족], [반칙왕]과 같은 코미디 영화들이 중요한 몫을 했다는 점때문에 최소한 제겐 진지한 연기가 어색한 반쪽자리 배우였습니다. 물론 그의 최고의 영화로 손꼽히는 [공동경비구역 JSA], [살인의 추억]은 코미디 장르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 영화에서조차 송강호는 웃겼습니다. 그가 웃기지 않았던 [쉬리]는 송강호의 연기중 최악의 손꼽히고 있으며,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송강호의 진지한 연기가 웃기는 바람에 제겐 별로 인상적인 영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극일기]에서의 송강호의 연기 변신의 성공은 분명 이 영화가 일궈낸 가장 큰 수확일 것입니다.
송강호가 연기한 최도형 대장이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탐험대의 막내이며 고아로 자란 김민재(유지태)에겐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이며, 5명의 탐험대원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대장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비정한 아버지이며, 자신의 도전에 대한 집착으로인하여 대원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도 합니다. 최도형은 바로 이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을 동시에 지닌 그런 캐릭터입니다.
송강호는 바로 그런 최도형이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합니다. 특히 도달불능점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인하여 광기어린 눈빛으로 돌변할때는 과연 저 배우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송강호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런 완벽한 광기어린 연기를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보여줬다면 저는 [올드보이]이전에 박찬욱 감독을 발견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하지만 이 모든 이 영화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끝은 허탈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영화적인 재미의 부족입니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 지론입니다. 공포 영화는 무서워야하고, 코미디 영화는 웃겨야하며, 멜로 영화는 슬퍼야합니다. 작가주의 영화라면 그 주제가 관객에게 선명하게 전달되고 영화를 통해 관객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때 '그래 그 영화 재미있었어'라고 말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극일기]는 재미없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 영화의 장르는 스릴러입니다. 하지만 범인이 있고, 그 범인을 뒤쫓는 주인공이 있으며, 마지막 반전이 있어야 하는 보통의 스릴러 영화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죠. 그렇다면 이 영화는 공포 장르에 가깝습니다. 남극이라는 장소를 공포의 소재로 삼고, 그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팀험대원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스릴러보다는 공포 장르에 더욱 가까운 영화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영화는 무섭지가 않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알 포인트]가 영화를 보는내내 절 공포에 떨게 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남극일기]는 더더욱 실망스러운 공포 영화입니다.
공포 영화라고해서 귀신이 나와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극일기]처럼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설원의 공간이 충분히 공포스러울 수 있으며, 아무도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내고자하는 탐험대의 숭고한 도전 정신도 충분히 공포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시도를 해낸 영화의 도전 정신도 박수를 받을만하며, 코미디 연기의 한계를 뛰어넘어 섬뜩한 연기를 해낸 송강호의 연기력이 이 새로운 도전을 뒤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섭지가 않습니다. 남극이라는 장소는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별로 공포스럽지 못했으며, 최도형의 광기는 2시간동안 관객을 공포로 몰고가기엔 너무 부족했던 겁니다.
김민재가 도착한 도달불능점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남극일기]의 도전 정신은 우리 영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을지 모르지만 영화적 재미를 지니지 못한 영화의 끝은 허탈하기만 합니다. 관객의 재미를 얻어내지 못했다면 결국 그 도전의 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90억원이 들어간 상업영화를 만든 임필성 감독도 알아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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