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헨리 셀릭
더빙 : 다코타 패닝, 테리 해처
개봉 : 2009년 5월 21일
관람 : 2009년 5월 24일
등급 : 연소자 관람가
이젠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등등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눈치를 보기 마련입니다.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30대 후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혼자 극장에 가야하는 처지에 빠진 저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자 혼자 멜로 영화를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저 영화 야하다던데, 나 혼자 보러 가면 모두들 날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애니메이션을 어른 혼자 보러 가면 모두들 날 어떻게 생각할까? 등등.
일요일 아침... 늦잠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보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아서 맘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영화를 보러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보고 싶었던 영화인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은 거의 매진 상태였고, 2번째로 보고 싶었던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은 저희 동네 멀티플렉스 극장에선 자막이 아닌 더빙 버전으로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걱정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더빙 버전의 애니메이션이라면 극장 안엔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 득실거릴 텐데... 과연 나 혼자 영화를 보겠다고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모두들 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물론 그러한 쪽팔림보다는 영화가 보고 싶다는 욕망이 더욱 컸기에 저는 일요일 아침, 혼자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을 보러 갔고,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극장을 가득 채운 어린 아이들과 그런 어일 나이들 때문에 억지로 극장에 와서 쿨쿨 잠을 자는 무심한 부모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나서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던, 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남 눈치 보지 않고 봐야겠다고...
극장은 내게 신기한 세계로 안내하는 비밀의 문과도 같다.
주류 애니메이션과는 차별되는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후예들.
1993년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라는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던 헨리 셀릭 감독의 새로운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는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을 기대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은 할로윈 마을에 서는 해골 괴물 잭이 크리스마스 마을의 크리스마스 행사에 매료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애니메이션입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같은 화려함도 없고, 웃고 즐길 수 있는 부담 없는 스토리 라인도 부족하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그러한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유머는 아직까지 제게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감독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제작자였던 팀 버튼이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비슷한 분위기의 애니메이션인 [유령신부]를 2005년 만들었고, 헨리 셀릭이 드디어 [멍키본]의 실패를 딛고 7년 만에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을 만듬으로서 [크리스마스의 악몽]에 열광했던 절 흥분하게 만든 것입니다.
제 글에서 여러 번 밝혔지만 저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합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좋고, 픽사의 애니메이션도 좋으며, 드림웍스 애니메이션도 좋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도 좋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애니메이션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스토리만 좋다면 애니메이션은 모두 좋아합니다. 하지만 예전엔 모든 애니메이션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과 점점 비슷해지더니만 이젠 픽사의 애니메이션과 비슷해지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역시 제작비가 엄청나게 소비되는 블록버스터이기에 관객들이 좋아하는 형식으로 진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애니메이션의 획일화를 보는 제 입장에서는 아쉽기만 했습니다. 제가 [몬스터 VS 에이리언]에 실망했던 이유도 그것이죠. 하지만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은 다릅니다. 비록 어린 아이들이 보기엔 분위기가 너무 어둡기는 하지만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싶은 제게 [코렐라인 : 비밀의 문]은 느끼한 튀김 요리만 먹다가 오랜만에 얼큰한 매운탕을 먹는 느낌이랄까... 비유가 좀 웃기지만 암튼 그랬습니다.
어서 오너라. 난 다른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특별한 애니메이션이란다.
나쁜 부모와 좋은 부모의 차이.
영화의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너무나도 바빠서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나쁜 부모의 밑에서 어린 코렐라인(다코타 패닝)은 불평불만만 쌓여갑니다. 그러던 중 집안에 비밀의 문을 발견하고 그 문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과 만납니다. 새로운 세상의 엄마, 아빠는 코렐라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주는 상냥하고 재미있는 좋은 부모였으며 코렐라인은 현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환상의 세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행복하게만 느껴지던 환상의 세계에는 무서운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현실의 세계에서 나쁜 부모의 모습은 저와 구피의 모습과 겹쳐졌습니다. 주중엔 일을 해야 하기에 주말엔 녹초가 되기 일쑤인 구피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취미(영화보기, 영화 리뷰쓰기,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응원하기, 프로야구 판타지게임 즐기기)가 너무나도 많은 저를 부모로 둔 웅이는 언제나 '놀자'를 외치지만 웅이가 원하는 만큼 구피와 저는 웅이와 놀아주지 못합니다.
어쩌면 웅이도 코렐라인처럼 새로운 세계로 가서 자신에게 좀 더 시간을 할애하는 좋은 부모를 만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모든 것이 자신에게 좋기만 한 세상은 없습니다. 어른이 되면 사회에서의 쓰디쓴 경험 끝에 스스로 깨우치게 되는 그 진리를 코렐라인은 용기와 지혜, 그리고 모험심으로 헤쳐 나옵니다.
영화를 보면서 좀 더 웅이에게 시간을 할애해주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코렐라인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을 웅이에게 이야기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나쁜 아빠일 수밖에 없나봅니다.
코렐라인에게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나와 겹쳐진다.
애니메이션치고는 제대로 무섭다.
결국 이 영화의 키포인트는 좋은 부모가 살고 있는 환상의 세계에 감춰진 비밀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입니다. 어차피 이 영화가 어른을 위한 영화가 아닌 만큼 반전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감춰진 비밀을 둘러싼 반전이 아닌 그 비밀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렐라인 비밀의 문]은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환상의 세계가 악몽의 세계로 변하는 영화의 분위기는 다른 공포영화 못지않게 무서웠으며, 특히 엄마(테리 해처)의 변신은 영화를 관람하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를 정도였습니다. 엄마라는 존재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포근하고 안전한 존재였음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에서 공포스럽게 변신한 엄마의 모습은 어린 아이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었을 겁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현실의 엄마, 아빠를 구하기 위해 다시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코렐라인의 용기와 비밀을 하나, 둘씩 벗겨내는 지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답게 상당히 교훈적이긴 하지만 그러한 교훈이 전혀 낯간지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역시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의 힘일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웅이에게 '아빠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께.'라며 영화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줬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겁난 표정을 짓는 웅이는 '아빠, 그런 이야기는 관두고 우리 야구나 하자.'며 놀이터를 향해 제 손을 끌어당깁니다. 결국 코렐라인의 모험을 통해 얻은 교훈(자신과 놀아주지 못하는 나쁜 엄마, 아빠가 사실은 좋은 엄마, 아빠였더라.)을 웅이에게 해줌으로써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영화 보고 오느라 피곤한 제 사정을 웅이에게 어필하고 싶었지만 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고, 결국 놀이터로 끌려 나가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웅이와 야구를 하느라 기진맥진이 되어 버렸습니다. 역시 전 좋은 아빠는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웅이와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놀아줄 수 있는 그럭저럭 괜찮은 아빠는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쭈니와 구피는 이렇게 좋은 부모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최악의 부모는 아닐 것이라 스스로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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