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찬욱
주연 : 송강호, 김옥빈, 신하균, 김해숙
개봉 : 2009년 4월 30일
관람 : 2009년 5월 7일
등급 : 18세 관람가
난 이미 [친절한 금자씨] 덕분에 내성이 생겼다.
드디어 [박쥐]를 봤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박쥐]는 정확히 4년 전 [친절한 금자씨]를 연상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관객을 당황하게 만드는 영화의 독특한 스타일과 상업성 짙은 장르영화를 비틀어 완성한 비상업적 스타일까지... 많은 분들이 [박쥐]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친절한 금자씨]를 봤을 땐 너무 당혹스러웠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제겐 내성이 생겼습니다. [친절한 금자씨]를 보며 당혹감을 느꼈던 저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며 박찬욱 스타일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올드보이]라는 잘 빠진 장르영화를 만들어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둔 감독이지만, 그의 내면엔 마이너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있는 감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챈 것입니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러합니다. 이영애라는 스타캐스팅과 [올드보이] 바로 다음 작품이라는 점에서 저는 상업영화로써의 [친절한 금자씨]를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는 제목과는 다르게 전혀 친절하지 못한 영화였고, [올드보이]와 같은 상업영화를 기대했던 저는 완벽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친절한 금자씨] 이후 그가 만든 영화는 놀랍게도 로맨스 영화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임수정과 정지훈(비)이 캐스팅된 이 영화에서 달콤한 로맨스를 기대하였을 테지만 저는 박찬욱 감독에게 한 번 속았지, 두 번은 속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상업영화의 탈을 쓴 완벽한 비상업적인 영화였습니다.
[박쥐]는 그러한 박찬욱 스타일의 정점입니다. 뱀파이어영화라는 할리우드의 상업적인 장르와 송강호, 김옥빈이라는 스타캐스팅은 또 다시 많은 분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속지 않았습니다. [박쥐]가 상업영화가 아님은 이미 [친절한 금자씨]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눈치 챘고, 이미 박찬욱 스타일에 내성이 생긴 저는 [박쥐]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쯧쯧쯧... 이 분은 박찬욱 바이러스에 아직 내성이 생기지 않았군요.
뱀파이어 영화라는 장르의 속성을 이용하다.
할리우드에서 뱀파이어 영화는 상업 장르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와 같은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 충실하려 노력한 영화도 있지만 대부분 원작과는 상관없이 흡혈귀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등장시킨 공포영화이거나 액션영화입니다.
할리우드영화가 국내 극장가를 점령한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영화팬에게도 뱀파이어영화는 꽤 익숙한 상업영화의 소재입니다. 하지만 뱀파이어영화가 서양의 전설과 고전소설을 기초로 한 장르영화인 만큼 우리나라영화에선 뱀파이어 영화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이 [박쥐]로 뱀파이어 영화에 도전한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도 아프리카로 자원봉사를 나간 신부가 우연한 계기로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게 되고 한국으로 돌아와 신부로써의 신앙심과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본능 사이에서 괴로워한다는 내용입니다. 충분히 뱀파이어 영화의 장르적인 재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으로써 [올드보이]와 같은 잘 빠진 장르영화로 완성된다면 영화의 화제성과 더불어 흥행 성공은 떼 논 당상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장르영화의 달콤한 흥행이라는 열매를 포기했습니다. 영화의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장르영화에 충실한 듯 보였던 그는,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점점 관객의 기대감을 배신합니다. 피의 본능과 사랑에 대한 열망을 참지 못하고 신부로써의 신앙심을 버린 상현(송강호)과 상현에 의해서 뱀파이어가 된 태주(김옥빈)의 살인행각은 점점 영화를 알 수 없는 길로 빠뜨립니다. 사실 그것이 박찬욱 감독의 매력이자 장점이기도 합니다.
우린 평범한 뱀파이어가 아니란 말이지.
팜므 파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제 글을 보다보면 팜므 파탈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주로 남자를 유혹하여 그를 비극에 빠뜨리는 악녀를 두고 저는 팜므 파탈 캐릭터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사실 팜므 파탈은 남성을 유혹해 죽음이나 고통 등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숙명의 여인'을 뜻하는 사회심리학 용어(네이버 백과사전)라고 하네요. 즉 팜므 파탈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을 타고난 여성이며 따라서 팜므 파탈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남성 역시 팜므 파탈의 손아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팜므 파탈이라는 단어가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면 [박쥐]의 태주를 보면 완벽하게 이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버려진 후 라여사(김해숙)의 집에서 자랍니다. 결국 성인이 된 후에는 라여사의 아들인 강우(신하균)의 아내가 되지만 언제나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뱀파이어이지만 신부라는 신분 때문에 피의 유혹을 이겨야하는 상현과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야밤에 맨발로 뛰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태주는 서로 운명적인 사랑을 느낍니다.
상현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피의 본능을 어렵게 견뎌내던 상현은 결국 태주에 대한 사랑의 본능은 이기지 못하고 태주를 위하는 마음에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인 강우를 죽임으로써 애써 억누르던 뱀파이어의 본능마저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태주는 단지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뿐이고, 상현은 단지 태주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태주와 상현의 만남은 거대한 비극이 되어 그들 주위의 모두를 죽음으로 내몹니다. 점차 자신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가는 상현과 태주를 보며 태주는 어쩌면 상현을 파멸로 이끄는 운명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한 팜므 파탈인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인간의 본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다.
이제 상현은 태주로 인하여 애써 참았던 뱀파이어의 본능을 깨우고 말았습니다. 함께 강우를 살해한 상현과 태주는 그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기 위해서 점점 괴물이 되어갑니다. 영화의 초반엔 간간히 웃기기도 했던 이 영화는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공포영화의 특성을 띕니다. 상현과 태주의 죄책감을 짓누르는 강우와 홀로 상현과 태주의 죄에 대한 섬뜩한 시선을 보네는 라여사의 눈빛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이 영화를 몰아갑니다.
영화의 중반까지 한국영화로는 보기 힘든 뱀파이어 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김옥빈의 과감한 누드, 그리고 간간히 터져 나오는 송강호식의 코미디를 맘껏 즐기던 관객들이 본격적으로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후반부에서 부터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뱀파이어라는 상업적인 장르를 통해서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추악해 질 수 있는지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에 대한 봉사와 인간에 대한 희생으로 점철된 상현의 인생이 후반부엔 살기위해 사람들 참혹하게 죽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모습은 좀처럼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여우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이 죄는 아니라는 태주의 태연스러운 논리는 우리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지? 라는 당돌한 질문으로 관객에게 던져집니다. 그러한 주체할 수 없는 본능을 이겨내기 위한 상현의 마지막 극단적인 선택이 그렇기에 마음에 와 닿습니다. 상현은 자신 안의 그 추악한 본능을 이길 수 없기에 오히려 모든 본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전 상업영화의 탈을 쓴 비상업영화로 관객을 우롱하는 박찬욱 감독에게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박찬욱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내성이 생겼기에 그의 예기치 못한 스타일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박쥐]를 보기 전에 [친절한 금자씨]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며 박찬욱 바이러스의 내성부터 기르길 권해드립니다.
상현과 태주의 죄책감을 짓누르는 강우의 재림! 웃기면서 섬뜩하다.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라여사의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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