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J.J. 에이브럼스
주연 : 크리스 파인, 잭커리 퀸토, 에릭 바나
개봉 : 2009년 5월 7일
관람 : 2009년 5월 7일
등급 : 12세 이상
사랑이 미움으로 바뀔 때...
결혼 생활을 하다보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권태기가 옵니다. 그러한 권태기를 얼마나 슬기롭게 넘기느냐에 따라서 결혼 생활을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가 판가름 날 것입니다.
저와 구피 사이에서도 그런 권태기는 여지없이 찾아옵니다. 물론 시작은 항상 제가 먼저 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항상 술이었고요. 술에 취한 제 모습에 구피는 실망하고, 그런 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구피에게 저 역시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러한 다툼은 오래가지도 않은 채 항상 짧게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큰 문제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곪은 것을 애써 외면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한번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에 대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 그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면 다시는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테지만 구피나, 저나, 그냥 짧게, 그리고 흐지부지 그러한 문제들을 묻어두었던 것이 오히려 문제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번 문제 역시 발단은 술이었습니다. 만취가 된 저를 향해 구피는 화를 냈고, 그 화는 엉뚱하게 이틀 후 친구모임으로 불똥이 튀겼습니다. 처음엔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것이 미안했던 저 역시도 구피가 예상외의 과민반응을 보이자 저를 이해 못하는 구피에게 화가 났고, 그렇게 화가 난 마음은 점점 커져서 심지어는 그녀에 대한 실망과 미움으로 변했습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사랑을 잃을 때와 비견될 만큼 아픕니다. 머릿속은 그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고, 속이 너무 답답하며 미쳐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회사에 조퇴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디에 가서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스트레스라도 풀자 라는 생각에 들린 곳은 극장입니다. 역시 제가 너무 힘들 때 제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영화 밖에 없더군요. 영화라도 있어서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영화 밖에 없어서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요?
복잡한 생각은 모두 버리고 우리와 함께 우주모험을 떠납시다.
B급 SF영화에서 거대한 블록버스터로 재탄생하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제가 선택한 영화는 [스타트렉 : 더 비기닝]입니다. 사실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이 전 세계적으로 떠들썩하게 개봉하기 전인 몇 개월 전만해도 [스타트렉] 시리즈는 우리나라에선 낯선 B급 SF영화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스타트렉] 시리즈는 1966년 TV 시리즈로 시작으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한 인기를 누린 미국의 대표적인 SF시리즈입니다. TV시리즈의 성공으로 1979년 처음으로 극장용 장편영화가 만들어졌으며, 그 후 2~3년마다 꾸준히 시리즈를 이어나간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적이 있는 2002년 [네메시스]에서는 10번째 시리즈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타트렉] 시리즈가 결코 [스타워즈]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스타워즈]에 비해 적은 제작비와 낮은 흥행성적 때문입니다.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10번째 영화인 [네메시스]가 기록한 6천만 달러에 불과하며, 최고 흥행작은 8번째 영화인 [퍼스트 컨택]이 기록한 9천2백만 달러가 전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라마운트 영화사는 성공한 TV시리즈 [앨리어스]와 [로스트]를 연출하였으며 톰 크루즈 주연의 블록버스터 [미션 임파서블 3]를 감독한 J.J. 에이브럼스 감독을 영입하여 1억5천만 달러라는 거대한 제작비를 들여 [스타트렉] 시리즈를 재구성했습니다. 파라마운트는 [스타트렉] 시리즈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 [스타워즈] 시리즈의 뒤를 잇는 SF블록버스터가 되길 간절히 희망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성공적인 TV시리즈를 바탕으로 B급 SF영화의 길을 선택했던 [스타트렉] 시리즈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미국의 여름시즌을 겨냥한 거대한 블록버스터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파라마운트의 과감한 투자와 [스타트렉] 시리즈의 환골탈태는 성공을 거두었을까요?
난 꼭 성공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되고 말거니까 방해하지 마.
트레키가 아니더라도...
미국에선 [스타트렉]의 열렬한 팬들을 일컬어 트레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트레키는 [스타트렉] 시리즈의 극장 흥행수입에서 나타나듯이 그 숫자가 절대적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열렬한 매니아만으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없다면 [스타트렉] 시리즈는 기존의 매니아를 배신하더라도 새로운 관객을 개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의 출발한 바로 그러한 대중성을 향한 선언입니다.
이 영화를 감독한 J.J. 에이브럼스는 기존의 [스타트렉] 시리즈의 팬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파라마운트는 그러한 점을 높이 사서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을 것이며 에이브럼스 감독은 제작사의 기대에 맞게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을 기존의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완벽한 블록버스터로 만들었습니다. 기존의 [스타트렉] 시리즈를 단 한 편도 안 봤어도 영화 자체를 이해하고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완전히 새로운 영화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를 위해서 에이브럼스 감독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주인공인 제임스 커크(크리스 파인)의 영웅화 작업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대원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영웅이었고, 그는 영웅이 되기 전까지 매력적인 반항아였습니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풋내기 반항아에 불과했던 커크가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장으로써 전설적인 영웅이 되어가는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뛰어난 능력과 통찰력을 가진 불칸족의 스캇(잭커리 퀸토)을 비롯한 엔터프라이즈호의 개성 넘치는 탑승원들은 커크의 영웅화에 의한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불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블록버스터엔 필연적으로 지구를 지킬 운명적인 영웅이 필요하고 에이브럼스 감독은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의 환골탈태를 위해 지극히 정상적인 작업을 착수한 것일 뿐이니까요. 그 덕분에 이 영화는 조금 평범해 졌지만 그 보다 많이 재미있어 졌습니다.
내가 바로 새로운 영웅 제임스 커크다. 어때? 나, 섹시하지?
영웅, 라이벌, 악당, 시간여행, 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
자! 정리하겠습니다.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스타트렉] 시리즈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더라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SF 블록버스터입니다. 이 영화엔 제임스 커크라는 영웅이 있고, 스캇이라는 영웅의 라이벌이 있으며, 자신의 별이 파괴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는 네로(에릭 바나)라는 악당이 있습니다. 여기에 블랙홀을 통한 시간여행으로 스토리 구조가 상당히 흥미진진해졌으며, [스타워즈]를 능가하는 우주 전투씬이 영화 내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잘 빠진 SF블록버스터를 원하신다면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화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저 역시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이 영화를 선택했고, 대원들과 아내,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커크의 아버지의 희생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으며, 풋내기 반항아 커크에 의한 약간의 웃음과 화려한 특수효과에 의한 희열을 느끼며 영화의 감상을 마쳤습니다.
이 영화를 본 후 복잡한 마음 때문에 보기 꺼려졌던 [박쥐]를 볼 용기가 생겼으며, 미움으로 변했던 구피에 대한 감정마저도 결국 풀렸습니다. 그녀는 저를 향한 미움이 아직 풀리지 않았을테지만 그러한 그녀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제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구피와 저의 6년 6개월간의 사랑과 6년간의 결혼 생활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모든 것이 [스타트렉 : 더 비기닝] 덕분입니다.
내가 바로 [트로이], [헐크]의 영웅 에릭 바나라는 사실이 그대들은 믿어지는가?
엔터프라이즈호의 여정은 앞으로 탄탄대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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