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여균동
주연 : 이정재, 김옥빈, 김석훈, 이원종
개봉 : 2008년 12월 3일
관람 : 2008년 12월 3일
등급 : 15세 이상
현실도피용 스트레스해소 영화가 필요하다.
드디어 2008년도 달랑 달력 한 장만 남겨놓았습니다. 2007년이 가고 2008년이 왔다고 설렜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후다닥 지나가 버리다니... 젊었을 때는 연말이 되면 괜히 마음이 들떴습니다. 여기저기 술자리 약속도 잡혀 있었고, 거리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첫 눈이 언제 올까 기다리기도 하고... 하지만 이젠 그런 들뜬 마음보다는 휑하니 춥기만 하네요.
요즘 경제 사정이 어려운 것은 워낙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니 다들 아실 겁니다. 하지만 직장인으로써 느끼는 경기침체의 여파는 막연하게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것 그 이상입니다. 당장 저희 회사 매출이 급감했고, 거래처의 줄도산으로 매출채권 회수가 어려운 지경이며, 환율이 너무 올라(저희 회사는 수입업체입니다.) 수익률도 현저히 떨어 졌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벌써부터 정리해고 괴담이 흉흉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정리해고의 칼날에서 저 역시 안전하지는 않지만 만약 여차저차해서 살아남더라도 내 가족과도 같았던 회사동료 및 부하직원들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죠.
물론 아직 확정된 것은 없지만 현재 회사 사정으로 보건데 정리해고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제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엄청납니다. 제가 굳이 [순정만화]가 아닌 [1724 기방난동사건]을 보기로 결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연말을 이유 없이 들뜬 기분으로 맞이했던 20대라면 당연히 [순정만화]가 보고 싶었겠지만, 제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영화는 현실도피용 스트레스해소 영화입니다. [1724 기방난동사건]은 현실도피용 스트레스해소 영화로 안성맞춤으로 보였습니다.
짜증나는 현실은 잠시 잊고 나와 함께 웃고 즐기는 것이 어때?
나의 스트레스해소를 위해 여균동이 왔다.
제가 [1724 기방난동사건]을 현실도피용 스트레스해소 영화라고 단정 지은 까닭은 전적으로 여균동 감독 때문입니다. 여균동 감독은 1994년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통해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수상하였으며, 1995년에는 [세상 밖으로]를 통해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미 배우와 감독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배우 겸 감독인 셈입니다.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독특했고 유쾌했습니다. 당시 논란이 되었던 포르노그래피를 선언한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여균동이 맡은 배역은 소심한 은행직원이었습니다. 당시 스포트라이트는 '엉덩이가 예쁜 여자' 정선경에게 맞춰져 있었지만 전혀 배우 같지 않은 외모를 지닌 여균동의 연기 역시 제겐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김태균 감독의 [박봉곤 가출사건]에서 박봉곤(심혜진)의 폭력남편을 연기했으며, 크로스 불륜을 담은 코미디 [주노명 베이커리]에서는 주인공인 주노명(최민수)의 아내인 한정희(황신혜)와 외도를 하는 박무석을 연기하기도 했습니다.(박무석의 아내이자 주노명과 외도를 하는 이해숙은 이미연이 연기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초호화 캐스팅이었네요.) 이들 영화는 결코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코미디 영화들이며, 여균동이 연기한 캐릭터 역시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여균동의 평범하지 않음은 그의 연출작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세상 밖으로]에서 자신의 독특함을 워밍업 했던 여균동 감독은 [맨?]으로 자신의 끼를 맘껏 발산합니다. 환상 속 포르노의 세계에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냈던 이 영화는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심하게 앞서간 영화로 제게 기억됩니다.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다세포 소녀]보다 100배는 이상한 영화라고 생각하시면 맞으실 겁니다.
이상 여균동 감독의 이력에서 드러났듯이 그는 독특한 코미디영화에서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배우이자 감독입니다. 그러하기에 [1724 기방난동사건]은 결코 평범한 코미디영화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맨?]처럼 너무 시대를 앞서 가지만 않다면 지금의 스트레스에 오히려 독특한 여균동 감독의 유머가 힘든 현실을 도피하는데 유용할 것이라 생각한 셈입니다.
천둥의 주먹 한 방으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웃으며 기절해있던 저 남자가 여균동이다.
1724년 그 날, 그 곳에서 여균동은 성숙해졌다.
[1724 기방난동사건]은 제목 그대로 1724년 경종집권말기가 배경입니다. 시대적 배경이 이러하니 당연히 영화의 장르는 사극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일반 사극과 비슷한 점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이 영화는 역사를 다루지도 않을 뿐더러, 사극이라는 장르를 오히려 부정하면서 진행됩니다. '왜 하필 1724년이었을까? 그냥 현재를 배경으로 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이것이 이 영화를 보며 들었던 첫 번째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냐고요? 아닙니다.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여균동 감독은 애초에 관객들에게 해답을 제시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1724년이 배경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그냥 즐겨.'라며 그만의 독특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여균동 감독이 이끄는 대로 웃고 즐기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비운다면 [1724 기방난동사건]은 만화적인 상상력이 가득한 독특한 재미를 관객에게 선사할 것입니다.
처음 오프닝 장면에서 미국 코믹스의 칼라풀한 방식으로 영화를 시작하더니만 갑자기 과장된 슬로우 비디오로 천둥(이정재)의 싸움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난데없이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를 읊조리는 만득(김석훈)과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본 듯한 의상을 입고 나오는 만득과 설지(김옥빈)의 모습에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막무가내 웃음만 선사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후반부엔 사나이들의 주먹세계에 대한 느와르식 비장미와 함께 천둥과 만득의 마지막 결투에선 슬로우비디오로 표현되던 이전의 싸움장면과는 차별되는 스피드한 화면전개로 액션영화로써의 재미도 느끼게 합니다.
[세상 밖으로], [맨?]등을 연출했던 90년대 여균동 감독은 풋내기 감독이었지만 기존 감독들이 해내지 못한 독특함을 젊은 혈기로 스크린에 투영시켰습니다. 그 결과 때론 환호와 때론 야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724 기방난동사건]에서 여균동 감독은 자신이 한층 성숙했음을 보여줍니다. 독특함뿐만 아니라 영화의 재미를 위한 상업적 장치들을 관객에게 선사함으로써 젊은 혈기로 독특함만을 추구하던 10년 전과는 달라졌음을 보여준 셈입니다.
암, 젊은 혈기로 달려든다고 해서 영화가 재미있어 지는 것은 아니지.
어울리지 않은 듯 어울리는 배우 열전.
[1724 기방난동사건]의 재미는 여균동 감독의 연출력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어울리는 주연배우 3인방의 역할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천둥을 연기한 이정재의 경우는 진지하고 무거운 이미지를 벗고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남자로써의 멋이 느껴지는 천둥을 잘 연기했습니다. 사실 이정재가 코믹 연기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박대박]과 [오! 브라더스]를 통해서 전통 코믹 연기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박대박]은 관객들에게 외면을 당했고, [오! 브라더스]에서는 이정재 대신 이범수가 주목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정재는 TV드라마 [모래시계]의 말없는 보디가드 재희의 이미지를 아직 완벽하게 벗어내지 못한 셈입니다.
[1724 기방난입사건]을 통해 이정재가 재희의 굴레를 완벽하게 벗어날 것이라는 장담은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위해선 관객들이 이 영화를 많이 관람을 해줘야 하며, 이정재의 코믹 연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제겐 꽤 성공적입니다. 이정재와 가벼운 코믹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을 듯 하면서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한 것은 김옥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김옥빈은 [여고괴담 4 : 목소리]로 데뷔 후 [다세포 소녀]에 출연한 것이 영화 이력의 전부일 정도로 신인 배우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신세대 이미지는 그녀의 이력과는 별도로 배우 김옥빈의 이미지를 가둬놓은 감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처음 김옥빈이 [1724 기방난입사건]에 캐스팅되었다고 했을 때 영화가 개봉전임에도 불구하고 미스 캐스팅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김옥빈은 젊은 나이에 그 이미지를 과감하게 깨뜨린 것입니다. [다세포 소녀]의 출연도 놀라웠지만 신세대 이미지를 간직한 어린 여배우가 사극에서 망가지는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습니다. 그녀의 차기작으로 박찬욱 감독의 [박쥐]라고 합니다. 신인답지 않은 예사롭지 않은 선택을 그녀는 연달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행보가 더욱 기대됩니다.
그녀에게 한복이 이토록 잘 어울릴 줄이야...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었지만 하이에나일 수밖에 없었던 그 남자.
하지만 [1724 기방난입사건]에서 진정 어울리지 않은 듯 어울리는 배우는 단연코 김석훈입니다. 그의 연기는 아직도 만득이라는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것인지, 아니면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합니다.
만득은 이 영화의 악역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주먹세계의 의리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부패한 정부 관리에 빌붙는 그는 전형적인 악당입니다. 그런 악당을 반듯한 이미지의 김석훈이 맡았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김석훈이 무식한 조폭을 연기한 [마강호텔]이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여균동 감독도 꽤 위험스러운 선택을 한 셈입니다.(그러고 보니 김석훈이 출연한 영화중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아예 없군요.)
만득은 악당 캐릭터로써는 별로 개성이 없어 보이지만 비주얼 면에서는 꽤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그러하기에 만득을 연기한 김석훈의 연기가 애매한 것입니다. 결코 김석훈이 연기를 못한 것 같지는 않지만 캐릭터 자체가 독특하다보니 김석훈의 이미지와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김석훈이 만득에 안 어울렸다고 하기도 힘듭니다. 어쩌면 그러한 애매함을 여균동 감독이 노렸을지도...
[1724 기방난동사건]은 분명 최소한 제겐 자기가 할 일을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영화를 보며 정신없이 웃지는 못했지만 여균동 감독이 만들어낸 만화적인 사극 공간에서 낄낄거리며 즐기다보니 어느새 영화가 끝날 때쯤엔 스트레스가 말끔히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시 회사에 나가면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이겠지만 우리마라의 경제사정이 내년이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버틴다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겠죠. 그것이 평범함 직딩이 현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요. 암튼 여균동 감독님 덕분에 스트레스 잘 풀고 갑니다.
어울려, 안 어울려? 모르겠다고? 나도 모르겠어.
아무리 힘든 태클이 들어와도 버티자. 그것이 직딩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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