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8년 영화이야기

[눈먼 자들의 도시] - 더 무섭고, 더 참혹해야 했다.

쭈니-1 2009. 12. 8. 22:57

 

 


감독 :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주연 : 줄리안 무어,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대니 글로버
개봉 : 2008년 11월 20일
관람 : 2008년 11월 27일
등급 : 18세 이상

내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앞이 안 보이는 것이다.

사춘기 시절, 저는 비극적인 사랑을 소망했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죽음도 갈라  놓을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혼자 상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제가 혹은 제가 사랑하는 연인이 불치의 병에 걸려 죽는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제가 불구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없이 떠나 보내야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해 본 철없는 상상이었지만 그런 상상을 하며 하늘이 내려준 비극적인 사랑에 눈물을 흘리던 그때에도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 되는 상상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비극적인 사랑을 갈망하던 사춘기 소년에게도 상상조차 하기 싫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밤에도 어두운 것이 무서워서 혼자 못 자는 제게 앞을 볼 수 없기에 평생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내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알 수 없고, 내 앞의 어떤 사람이 공격을 해오는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바로 그러한 공포의 상황이 [눈먼 자들의 도시]의 소재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이 영화가 상당히 무서운 영화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안보이게 되는 상황이라면 도시는 공포로 인하여 쑥대밭이 될 것이며, 그러한 공포는 인간의 추악한 면을 밖으로 꺼내는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단 한 사람만이 추악한 공포의 현장을 볼 수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은 홀로 앞을 볼 수 있음을 하늘에 감사해야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저주해야 하는 것일까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꽤 흥미로운 질문을 제게 던지는 영화였습니다.


 

앞을 볼 수 없다면 영화도 못 보잖아. 난 그래서 앞을 못 보는 것이 제일 무섭고 싫어.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을 믿었다.

제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기대한 이유는 특이한 소재 외에도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감독이 바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라는 점입니다.
브라질 출신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시티 오브 갓]을 통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시티 오브 갓]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바로 [콘스탄트 가드너]라는 영화였습니다.
레이첼 와이즈와 랄프 파인즈가 주연을 한 [콘스탄트 가드너]는 제겐 2006년에 본 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작이었습니다. 다국적 거대 제약회사의 음모를 막으려했던 인권운동가인 테사(레이첼 와이즈)의 죽음과 그 죽음을 파헤치는 외교관인 남편 저스틴(랄프 파인즈)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보여줬던 이 영화는 상당히 정치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스릴러의 외형을 지니고 있으며,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레이첼 와이즈의 열정적인 연기와 랄프 파인즈의 조용하면서도 강한 파장이 느껴지는 연기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콘스탄트 가드너]의 연출 이후 [눈먼 자들의 도시]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콘스탄트 가드너]와 비슷한 보입니다. 상당히 정치적이고, 상업 영화의 외형을 지니고 있으며, 눈먼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눈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수용소에 들어간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에 대한 제 믿음을 결코 배신한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점수를 매긴다면 [콘스탄트 가드너]보다 나은 점수를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콘스탄트 가드너]에서 느꼈던 그 오랜 여운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결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을 믿자.


인간은 어떻게 추악해 질 수 있는가?

[눈먼 자들의 도시]는 꽤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평범한 오후. 한 일본인 남자의 눈이 갑자기 안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와 접촉을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눈이 안보이기 시작했고, 눈이 안 보이는 질병은 순식간에 온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정부는 무서운 전염성을 보이고 있는 눈이 안 보이는 질병을 막아내기 위해서 감염자들을 격리 수용하지만 임시로 마련된 격리 수용소엔 감염자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할 아무런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바로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 임시 수용소를 영화의 1차적인 무대로 삼습니다. 감염자들과 접촉을 하면 자신도 눈이 안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그들을 환자가 아닌 죄수 취급을 받게 만들었고, 그들을 보호하고 관리해야할 군인들은 오히려 공포감으로 감염자들에게 총을 발포하는 만행까지 저지릅니다.
아무도 감염자들을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외부의 사람들은 그들을 무서워할 뿐입니다. 수용소의 감염자들이 스스로 질서를 지켜야 하지만 총을 가진 3병동의 감염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가 수용소의 왕을 자처하며 수용소 안의 질서는 급속도로 무너집니다. 먹을 것을 장악한 그는 다른 감염자들에게 금품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여자 감염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무질서의 상황에서 눈이 안 보이는 남편인 안과의사(마크 러팔로)를 쫓아 수용소에 들어온, 유일하게 수용소 내에서 눈이 보이는 의사아내(줄리안 무어)의 시선으로 이 영화는 진행됩니다. 처음 그녀는 자신이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숨긴 채 묵묵히 다른 이들을 도와주며 총을 가진 남자의 만행에도 애써 못 본 척 외면합니다. 인간이 가장 추악해질 대로 추악해진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던 그녀는 자신만이 그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마치 [콘스탄트 가드너]의 저스틴처럼 말입니다.


 

총은 힘을 상징한다. 질서가 무너진 그 곳에서 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침묵하던 그녀,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가?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꽤 오랫동안 의사아내를 침묵시킵니다. 비록 총을 가진 3병동의 남자가 권력을 독차지 했지만 의사아내는 총보다 강인한 눈을 가졌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용소의 비안간적인 행위들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드러난 이후였습니다. [콘스탄트 가드너]에서 저스틴이 변할 수 에 없었던 계기가 테사의 죽음이었던 것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필요 없다며 힘없이 말하는 남편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의사아내는 보이면서도 행동하지 않은 자신이 무기력한 남편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영화의 무대를 좁은 수용소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수용소와는 또 다른 눈먼 자들의 도시의 끔찍한 상황에서 의사아내는 더 이상 침묵하고 희생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강인한 지도자가 됩니다. 마켓에서 음식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과 처절한 몸싸움을 벌이는 그녀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녀는 변했고, 그녀는 강해졌습니다.
그녀의 변화는 참혹하기만 했던 이 영화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녀의 집에서 자신을 믿고 따라준 동료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후반부의 모습은 검은 안대를 한 노인(대니 글로버)이 내 생애 이보다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이 영화의 이전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가슴 따뜻한 장면이 연출됩니다. 아마도 인간미가 말살된 이 참혹한 상황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다면 그들의 도시는 살만한 곳이 될 것이라는 작가와 감독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그녀, 행동을 시작한다. 총보다 강한 힘은 바로 그녀의 눈이다.


무섭고, 참혹하다. 하지만 더 무섭고, 참혹해야 했다.

영화가 끝나고 구피는 정말 무서웠다고 말합니다.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점점 인간미를 상실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참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더 무섭고, 더 참혹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맨 앞에 언급했듯이 제가 가장 무서운 것은 앞이 안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바로 그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 전개되고, 앞이 안 보인다는 공포감은 그들을 공포에 의한 괴물로 만듭니다. 과연 그런 상황을 두 눈으로 봐야하는 의사아내는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무섭고 참혹했을까요?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참혹함이 극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가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의사아내의 시점으로 진행된다면 참혹함이 가감 없이 스크린 속에 펼쳐졌을 텐데...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무슨 영문인지 영화의 중간 중간 눈먼 자들의 시선을 배치함으로써 참혹한 장면을 앞이 안 보이는 장면으로 가려버립니다.
이 영화의 가장 참혹한 장면인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1병동의 여자들이 3병동의 남자들에게 집단 매춘 행위를 하는 장면만이라도 좀 더 사실적이고 처참하게 잡아냈다면 이 영화의 참혹함은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상영등급 때문인지 아니면 참혹함에 대한 과도한 영상을 자제하려한 감독의 의도 때문인지, 가장 참혹해야 했던 장면을 서둘러 막을 내립니다. 이로 인하여 행동을 결심한 의사 아내의 심정의 변화가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더 무섭고, 더 참혹해야만 했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저를 보며 구피는 놀랍니다. 평소에 제가 무서운 영화를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이 영화에 대한 제 태도가 의외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이 안 보인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제게 [눈먼 자들의 도시]는 공포보다는 잔잔함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영화에 원했던 것은 극도의 공포였습니다.


 

폐허가 된 도시도 무섭기 보다는 기묘했다.

이보다 더 무섭고 참혹해야 하다니... 너, 잔인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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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동안
전 이 책을 보고 영화를 보았지요......책을 볼때 그 지저분함과 추악함이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궁금했지요. 아무래도 영화라 많은 부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죠. 역시 쭈니님 말대로 책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추악함보다는 못한 희미함으로 표현되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잘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엇보다 원작에 충실했고....전체적인 무채색의 느낌이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보았습니다.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눈 뜬 사람이나 눈 먼사람이나.......  2008/11/30   
쭈니 전 원작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설정만으로도 이 영화가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죠.
저 역시 이 영화, 꽤 잘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구피는 제 여동생에게 이 영화를 한번 보라고 추천하더군요.
왠만하면 영화 추천 잘 안하는데...
암튼 최강동안님 말씀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2008/12/01   
쩌비
눈먼자들의 시점에서 처리하는게 저도 상당히 짜증나더라구요..
뭐 그래도 충분히 참혹했다고 생각은 하지만...쭈니님 잔인하시네요..^^;;;;
 2008/12/01   
쭈니 전 역시 잔인하군요. ^^;
그런데 왜 공포영화는 못보는 걸까요??? ^^
 2008/12/01   
쩌비
글쎄요 전 그냥 공포영화를 싫어해요..ㅋㅋ남는게 없더라고요 공포영화는...그냥 덜덜떨고 깜짝깜짝 놀라다 끝나는...쭈니님도 그러실까요?ㅋ  2008/12/07   
쭈니 저는 처음부터 공포영화를 싫어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전엔 여름이면 공포영화 한두편은 꼭 보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기도 했었죠.
특히 공포영화는 반전이 있는 편이 많아서 반전이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제겐 제법 끌리는 장르였죠.
하지만 요즘은 극장에서 깜짝깜짝 놀라는 것보다는 유쾌하게 웃는 것이 점점 좋아져서... 저도 점점 공포영화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 공포영화는 못보겠더라고요. ^^
 2008/12/08   
쩌비
음...전 스릴러쪽을 좋아하는데 공포물은 유독 정이 안가네요..ㅎㅎㅎㅎㅎ  2008/12/09   
쭈니 ㅋㅋㅋ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
 2008/12/09   
ssook
원작의 충격이 워낙 강렬했던지라, 보기가 망설여지던 영화였어요..
역시나..... 그냥 큰 줄기만 죽 훑고 만 느낌이랄까..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그들에게서 큰 당혹감이랄지, 혼란이랄지 그런것들이 그닥 느껴지지가 않더라구요.. 그냥 맨숭맨숭한 영화였어요
 2008/12/09   
쭈니 원작을 읽으신 분들의 반응은 대개 그렇더군요.
저처럼 원작을 안읽었는데도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참... ssook님은 [눈뜬 자들의 도시]는 읽어 보셨는지...
[눈먼 자들의 도시]이후 몇년뒤가 배경이라던데...
급 궁금해졌습니다. ^^
 2008/12/09   
dd
영화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여자들의 한심함이 나오죠 장님들도 제압 못하는 여자 ...  2009/02/05   
쭈니 뭐 이 영화엔 남자들의 한심함도 나옵니다.
고작 눈하나 안보인다고 모든 불의를 참고 견디는 남자들 말입니다.
결국엔 인간 모두의 한신함에 대한 영화가 아닐런지...
 2009/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