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창동
주연 : 전도연, 송강호
개봉 : 2007년 5월 23일
관람 : 2007년 5월 28일
등급 : 15세 이상
전도연의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축하하며...
제 60회 칸영화제에서 [밀양]의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세계 3대 영화제로 일컬어지는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에서 국내 배우가 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1987년 [씨받이]의 강수연이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 무려 20년만의 경사라고 하네요.
사실 [밀양]은 칸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내심 황금종려상도 기대했었는데 여우주연상 수상에 그쳐 아쉽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현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거의 점령하다시피 한 국내 극장가의 사정 속에서 이루어낸 쾌거이기에 더욱 값진 열매입니다.
저는 올 여름 한국영화의 라인업인 [밀양], [화려한 휴가], [황진이]를 보며 할리우드의 가벼운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되는 우리의 무거운 영화들이 오히려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그러기위해선 작품성에 대한 검증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 [밀양]은 칸영화제 수상으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대안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이룬 셈입니다. 이런 제 생각은 [밀양]을 보기위해 나온 극장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전도연의 수상 소식을 듣고 뒤늦게 [밀양]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선 저는 평일 낮 시간대이기에 당연히 극장 안은 텅 비어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예매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안일한 생각은 극장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스크린을 점령한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는 상영 시간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좌석이 남은 상태였지만 [밀양]은 거의 매진 일보 직전이었던 겁니다. 다행히 맨 뒤 장애인 좌석이 하나 남아 가까스로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밀양]에 대한 관심이 칸영화제 수상 소식에 의한 단기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밀양]을 계기로 가벼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진중한 한국영화의 흥행대결이라는 썸머시즌의 또 다른 공식이 완성되면 좋겠네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여자, 밀양에 오다.
신애(전도연)는 남편의 외도와 교통사고 사망이라는 힘든 현실 앞에서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도피합니다.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 밀양. 그녀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가녀리지만 부유한 미망인으로써의 자신의 모습을 거짓으로 꾸미며 살아갑니다.
[밀양]은 신애의 현실 도피 이야기부터 시작을 합니다.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고, 남편의 사고 보상금은 빚을 갚느라 거의 썼음에도 불구하고 밀양의 쓸 만한 땅에 투자를 하겠다며 나섭니다. 그렇게 그녀는 거짓된 모습으로 밀양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힘든 현실은 밀양에서도 그녀를 비껴가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거짓된 모습이 새로운 불행을 몰고 옵니다. 아들의 유괴. 범인은 거액의 돈을 요구하지만 그녀의 통장엔 돈이 없습니다. 제발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아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옵니다. 이제 그녀는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요?
그녀가 선택한 새로운 도피처는 바로 종교입니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맘껏 가슴속 깊은 곳에 억누르고 있던 울분을 토해내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던진 그녀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인하여 행복하다며 불행한 자신의 모습을 또다시 거짓으로 꾸미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녀는 정말로 행복할까요?
그녀의 거짓된 행복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아들의 유괴범을 용서하기위해 찾아간 교도소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에 대한 용서를 받고 평온을 되찾았다는 유괴범의 고백을 들은 신애는 외칩니다. 어떻게 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나요? 난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그 사람은 저렇게 평온할 수 있나요? 이제 그녀는 이 모든 불행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고 하나님에게 대항하기로 결심합니다.
현실적인 남자, 밀양에 산다.
신애가 끊임없이 현실을 도피하려했던 캐릭터라면 종찬(송강호)은 현실에 안주하고 살고 있는 평범한 캐릭터입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 혼자 사는 그는 신애에게 빠져듭니다. 밀양에 정착하려하는 신애를 도와주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지만 신애는 자꾸 그를 밀어내며 오히려 속물이라고 비난합니다.
맞습니다. 종찬은 속물입니다. 다방 레지의 치마 속이 궁금하고, 마을의 유지인 시의원에게 굽신거리고, 신애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믿지도 않는 교회에 나가는 그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현실 앞에서 도망치지는 않습니다.
종찬은 신애를 바라보기만 합니다. 투박한 사투리를 쓰고, 자동차 정비소에서 기름밥을 먹는 그이기에 세련된 서울의 도도한 미망인인 신애는 어쩌면 감히 사랑한다는 고백조차 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 앞에서 솔직한 그는 결코 포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모하게 달려들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녀의 곁에서 맴돌기만 합니다. 그것이 현실적인, 그리고 속물인 그가 선택한 사랑법입니다.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의 연기가 극찬을 받는 동안 송강호의 연기는 과소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의 극한 상황까지 몰아 부친 전도연의 온몸을 불사른 연기에 비해, 송강호의 연기는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너무나도 평범한 연기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송강호의 연기가, 그리고 종찬이라는 캐릭터가 결코 전도연과 신애라는 캐릭터에 뒤질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하지만 그래서 전도연의 신들린 연기와 신애라는 캐릭터의 극한 상황에 묻히지만 송강호가 연기한 종찬은 묵묵히 [밀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러한 종찬의 역할은 영화의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그녀,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에게 대항을 시작한 신애는 자신의 상태를 점점 최악으로 몰아갑니다. 힘든 현실 앞에서 도망치려고만 했던 그녀이기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그만 정신을 놓고 맙니다. 하지만 그녀 앞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종찬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속물이지만 이제 신애에겐 남아 있는 유일한 도피처일지도 모릅니다.
신애의 힘든 현실은 계속됩니다. 우연히 들어간 미용실엔 유괴범의 딸이 가위를 들고 나옵니다. 미용실을 뛰쳐나온 신애는 왜 하필 이 미용실이냐며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녀가 다른 곳으로 도망을 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녀를 지켜 볼 것이며, 힘든 현실은 언제까지나 그녀를 뒤쫓아 다닐 것임을 그녀도 이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유괴범의 딸이 있는 미용실을 뛰쳐나와 스스로 가위를 들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한 신애. 그녀는 결국 스스로 이 모든 힘든 현실을 헤쳐 나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더 이상 도망치지도, 남을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이 힘든 현실을 맞서 나가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엔 역시 종찬이 있습니다. 말없이 거울을 들어 신애가 머리카락을 잘 자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종찬. 그렇게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여자와 너무나도 현실적인 남자는 조용히 서로를 사랑하며 현실과 맞서 살아갈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밀양]을 종교영화의 측면에서 바라보시더군요. 하지만 전 이 영화가 종교라는 하나의 국한된 주제에 함축된 영화라기보다는 힘든 현실에 맞서는 일반인들의 모습을 포착한 포괄적인 영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자체가 열린 결말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장면으로 유추해 보건데 신애는 종교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찾아낼 것이며, 종찬 역시 언제까지나 조용히 그녀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힘든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겠죠. 그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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