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장 이모우
주연 : 주윤발, 공리, 주걸륜
개봉 : 2007년 1월 25일
관람 : 2007년 1월 25일
등급 : 18세 이상
항상 술만 마시는 것은 아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장 가깝게 지내게 되는 것은 가족도, 친구도 아닌 직장 동료들입니다. 예전엔 퇴근시간이 되면 곧장 집에 가기 바빴지만 요즘은 스트레스가 심해서인지 회사 동료들과의 술자리가 잦아지고 있네요.
그러다보니 가족에겐 점점 소홀해지고, 술 때문에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돈은 돈대로 써버리고, 암튼 피해가 막급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잔하고 가자는 동료들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면 근무시간 내내 경직되었던 마음이 풀림과 동시에 술이 막 땡기거든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자 메신저로 술마시러가자는 유혹의 손길이 절 붙잡습니다. 다음날이 월급날이었기에 돈도 없으면서 우린 오랜만에 노량진에서 신선한 회에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쏟아 부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회사를 출근하려는데 속도 쓰리고 머리도 아프고 정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더군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긴 풀어야 할 텐데, 꼭 이렇게 몸 버리는 술로만 풀어야만 하는 걸까?
회사 동료들에게 오늘은 술 마시지 말고 영화 보자고 졸랐습니다. 일 년에 영화를 극장에서 한번 볼까 말까한 이들이기에 처음엔 반응이 시큰둥했지만 어제 과하게 마신 술의 영향인지 오늘은 술 마시기 싫다며 결국 제 제안을 받아들였죠.
그렇게 해서 작년 여름 [괴물]에 이어 두 번째로 직장 동료들과 [황후화]를 보러갔습니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 김치 찌게에 소주 한잔을 걸치고(그래도 영화 보며 극장에서 몰래 캔 맥주 마시자는 동료들의 제안은 극장 예절이 아니라며 힘겹게 뿌리쳤습니다.)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P 대리님은 술 먹는 것보다 영화 보는 것이 더 힘들다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
무협 영화의 진화, 혹은 퇴보
무협 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장르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협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 또래 남자들의 우상인 이소룡의 영화를 단 한편도 보지 않을 정도로 날것 그대로의 액션을 보여준 6, 70년대의 무협 영화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배우중 한명인 성룡의 영화도 [취권]으로 대표되는 그의 코믹 무협 영화보다는 [용형호제], [폴리스 스토리]같은 현대물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던 제가 무협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보았던 [동방불패]부터였습니다. 임청하의 중성적인 매력과 이연걸의 액션이 조화를 이룬 [동방불패]는 [천녀유혼], [지존무상], [영웅본색], [첩혈쌍웅]과 함께 고등학교 시절 제게 소중한 추억이 되어준 영화였습니다.
그렇다면 [동방불패]가 그 이전까지의 무협 영화와 어떤 차별성이 있기에 제가 갑자기 관심도 없던 무협 영화에 푹 빠지게 된 걸까요? 바로 그것은 과장된 액션입니다. 이소룡의 무협 영화가 액션의 본 모습 그대로를 표현했다면 [동방불패]는 무협지에서 튀어 나온듯한 어찌 보면 SF에 가까운 황당한 액션을 보여준 겁니다.
[동방불패]로부터 이어진 SF무협 영화는 이후 [풍운], [중화영웅]을 거치며 점점 황당의 극치로 치닫다가 한동안 홍콩 느와르 영화가 그랬듯이 멸종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러다 다시 중흥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이안 감독의 전 세계적 히트작 [와호장룡] 덕분이었습니다.
[와호장룡]에 이르며 무협 영화는 예전의 황당무계한 SF무협 영화와는 조금은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과장되지만 그러한 과장된 액션이 황당무계하게 느껴지지 않는 절제미와 아름다운 영상미입니다. 그러한 [와호장룡]의 미덕은 장 이모우 감독이 [영웅]을 만들며 좀 더 구체화됩니다.
장 이모우, 그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
많은 분들이 장 이모우 감독의 초기작인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등의 영화를 그리워합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 TV에서 방영하던 이들 영화를 보며 그 화려한 영상미에 흠뻑 빠졌었습니다. 그들은 [영웅]을 기점으로 블록버스터 급 무협 영화에 매달리는 장 이모우 감독에게 '그의 연출력은 점점 퇴보하고 있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냅니다.
저 역시 사실 의외였습니다. 중국의 소시민, 그것도 억압받는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영화로 만들며 중국 정부와 거북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던 장 이모우 감독이 어느새 중국 정부의 든든한 후원 속에 제작비가 몇 백억이나 드는 어마어마한 블록버스터를 한편도 아닌 연속 세편을 만들어 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공상주의에서 점차 자본주의로 변해가고 있는 거대한 중국이 영화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간파해내고 그들만의 영화 상품을 생산해내기 위해 장 이모우이라는 세계적인 감독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영웅], [연인], [황후화]라는 거대한 블록버스터가 탄생시킨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유야 어찌되었건 전 장 이모우 감독의 이러한 변신이 마냥 싫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저도 [붉은 수수밭]과 같은 장 이모우 감독의 초기작들이 그립습니다. 하지만 [동방불패]이후 [동사서독], [와호장룡]등 단 몇 편의 무협 영화를 제외하고는 무협 영화의 재미를 느껴보지 못했던 저로써는 장 이모우라는 걸출한 세계적 감독이 만들어내는 이 화려한 무협의 향연이 너무나도 감미롭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무협 영화가 거대해지기만 하고 속 알맹이는 없는 퇴보의 길을 가고 있다고. 또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장 이모우 감독이 잘 못된 길로 들어서며 그 능력을 썩히고 있다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무협 영화가 날 것 그대로의 액션에서 SF가 가미된 과장된 액션으로 변화되는 것은 관객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으며(만약 날것 그대로의 무협 영화가 흥행이 더 잘된다면 굳이 비싼 제작비를 들여 SF 무협 영화를 만들 필요도 없었을 테니...), 장 이모우가 가고자 하는 영화의 길을 자기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진화이든, 퇴보이든 간에 말이죠.
그래도 할 말은 한다.
서두가 길었지만 전 [황후화]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영웅]은 장 이모우 감독의 변화가 제대로 인지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장 이모우답지 못하다고 느꼈기에 조금 낯설었었고, [연인]은 잦은 반전과 약간의 선을 넘어버린 과장된 액션 탓에 100%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황후화]는 다릅니다. 이 영화의 영상미는 장 이모우 감독의 초기작을 보는듯한 강렬함이 느껴지고, 그 속에 곁들여지는 과장되지 않은 액션은 장 이모우 감독이 이제 블록버스터 급 무협 영화에 완벽하게 적응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이 영화의 주제 의식입니다. 솔직히 장 이모우 감독의 초기작들에 한결같은 주제는 억압받는 중국의 여성들의 삶이었습니다. 공리가 연기한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을 보며 그 원색의 화면에 압도되면서도 그녀의 삶에 나도 모르게 눈물짓곤 했었습니다.
공리가 장 이모우 감독과 결별한 후, 장 이모우 감독의 영화가 솔직히 예전만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리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황후화]는 [영웅], [연인]과는 달리 황후의 비련의 삶을 밀도 있게 보여줍니다. 권력에만 눈이 먼 남편을 폐위시키고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기 위한 그녀의 무모한 반역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황후화]에서의 공리는 장 이모우 감독의 초기작에서의 하층 여인이 아닌 최고의 권력을 가진 황후이지만 그녀의 모습은 하층 여인의 그때보다 더욱 처참하고 가슴 아픕니다. 자신에게 하루하루 독을 먹이는 황제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위선적인 품위를 지키며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련의 여인. 마지막 그녀의 울부짖음이 영화가 끝나도 가슴속 깊이 울러 퍼집니다.
여기에 권력에 눈이 먼 황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지켰고,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모든 이를 죽였습니다. 그로써 그는 스스로 외톨이가 됩니다. 주윤발의 카리스마가 빛났기에 공리에게 치우칠 수 있었던 영화의 중심을 잡으며 영화의 완벽한 비극을 이끌어냅니다.
규모는 커졌고, 화려해졌지만 장 이모우 감독이 완전 변한 건 아닙니다. 점차 규모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영화 속에서 표현하고 있으니... 이렇게 거대한 영화 속에서도 할 말은 하는 그의 연출력을 저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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