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마틴 스콜세지
주연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맷 데이먼, 잭 니콜슨, 마틴 쉰
개봉 : 2006년 11월 23일
관람 : 2006년 11월 23일
등급 : 15세 이상
며칠 전 이사를 했습니다. 결혼 후 신정동에 둥지를 틀고 3년 6개월이라는 결코 짧지만은 않은 세월을 보내며 미운 정 고운 정 들었던 집을 떠나려니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신월동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으로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답니다.
이사를 하고 나니 할일이 너무 많더군요. 구피는 집 꾸미기에 여념이 없고, 저 역시 퇴근 후 틈틈이 구피를 도와주며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낼 수가 없었죠.
그렇게 어느덧 한 달이 지나버렸습니다. 다행히 극장가의 비수기라는 11월이어서인지 구피에게 맞을 각오를 하고 보러가자며 항쟁하고픈 영화가 없어서 그럭저럭 아쉬운 대로 한 달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드디어 겨울 방학 시즌이 다가오며 서서히 보고 싶은 영화들이 개봉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그 첫 스타트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입니다.
[디파티드]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콤비의 세 번째 영화입니다. 처음 이 두 사람이 [갱스 오브 뉴욕]으로 만났을 때 잘 안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어느덧 [에비에이터]를 거쳐 [디파티드]까지 세 편의 영화를 함께하며 찰떡궁합을 보여주고 있네요.
하지만 제가 이 영화를 기대한 이유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콤비의 세 번째 영화라는 것보다는 [무간도]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라는 것이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무간도]는 3부작에 걸쳐 제게 만족감을 안겨준 최초의 홍콩 영화이기도 합니다. 과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이 암울한 홍콩 느와르 영화를 어떻게 할리우드식으로 담아냈을지 저는 너무나도 궁금했던 겁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해서 새로운 시작에 가슴 설레는 제게 할리우드라는 새로운 옷을 입은 [무간도]의 변신은 너무나도 시기적절한 영화였던 셈이죠. '그래, 무간도 너는 어떤 새로운 모습을 내게 보여줄래?'라며 저는 마음속으로 외쳤답니다.
[무간도]는 확실히 할리우드로 건너가 새로운 영화가 되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거장답게 [디파티드]를 단순한 [무간도]의 리메이크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영화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렇기에 [디파티드]가 [무간도]와 같은 것은 서로 신분이 뒤바뀐 경찰과 갱의 엇갈린 운명이라는 전체적은 스토리 라인뿐입니다. 두 주인공의 성격도, 영화의 전개도, 조연 캐릭터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면마저도 이 영화는 모두 바뀌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저는 이렇게 새롭게 변신한 [디파티드]가 너무나도 많이 아쉬웠습니다. 분명 영화를 보기 전엔 '새로운 모습을 내게 보여줘'라고 외쳤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왜 이렇게 변한거야'라고 투덜거린 셈이죠. 제가 생각해도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어이가 없긴 하지만 그건 그만큼 [무간도]가 제겐 재미있었던 영화였으며, 새롭게 재탄생된 [디파티드]는 [무간도]보다는 재미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무엇이 제게 [디파티드]가 [무간도]보다 재미없게 느껴지게 만든 걸까요?
우선 첫 번째로 배우들의 무게감입니다. 물론 인지도로만 따진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맷 데이먼이 분명 양조위와 유덕화보다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묵직한 이미지의 유덕화와 양조위에 비해 맷 데이먼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너무 하이틴 이미지에 가까웠습니다.
마틴 스콜세지와 세 편의 영화를 작업하며 부쩍 연기력과 카리스마가 눈에 띄게 좋아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맷 데이먼이 연기한 콜린은 감정의 기복도, 카리스마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캐릭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간도]의 유건명(유덕화)은 경찰에 잠입한 갱스터이지만 그 이면의 날카로움과 차가움이 잘 베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조직에 의해 거짓으로 경찰이 되었지만 야심이 있었고, 그 야심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실행할 수 있는 차가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스의 여자를 사랑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보스에 대한 배신이 쉽게 납득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맷 데이먼은 어찌된 일인지 감정의 기복 없이 평범하게 콜린을 연기합니다. 그렇기에 프랭크를 배신하는 후반부는 좀 느닷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의 후반 마들랜의 임신이라는 변수가 작용하긴 했지만 영화 내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프랭크(잭 니콜슨)의 명령에 복종하던 그가 갑자기 그런 배신을 생각하다니... 맷 데이먼이 그리 연기를 못하는 배우는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선 그의 연기가 많이 아쉬웠습니다.
주연 배우의 무게감에서 [디파티드]가 [무간도]에 비해 너무 가벼워 보였다면, [디파티드]의 조연 캐릭터들은 [무간도]에 비해 제대로 배치되지 못한 느낌입니다.
[디파티드]가 [무간도]보다 나았던 캐릭터는 잭 니콜슨이 연기한 프랭크뿐입니다. [무간도]에서는 조연에 불과했던 갱 보스 한침(증지위)이라는 캐릭터를 [디파티드]에서는 거의 주연급으로 치켜세워 놓았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잭 니콜슨의 신들린 연기력도 한 몫을 단단히 해냈습니다.
하지만 [무간도]에서 한침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그와 팽팽하게 맞서던 경찰 국장 황지성(황추생)은 [디파티드]로 건너오며 마틴 쉰이라는 걸출한 배우로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지만 잭 니콜슨에게 가려진채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하고 허무한 최후를 맞이할 뿐입니다. [무간도]에는 없었던 디그넘(마크 윌버그)이라는 캐릭터가 새로 추가되어 마틴 쉰을 보좌하지만 역부족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도대체 디그넘은 왜그리도 뺀질거리던지...
하지만 역시 가장 아쉬웠던 조연 캐릭터는 마들랜(베라 파미가)이라는 캐릭터였습니다. [무간도]에서 진영인의 유일한 안식처 역할을 했던 이심아(진혜림)는 3편인 [종극무간]에서 가장 중요한 조연 캐릭터였습니다. [무간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인 진영인을 더욱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마지막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결정적인 역할도 수행합니다.
하지만 마들랜은 콜린과 빌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사이에서 방황하는 줏대 없는 흔해빠진 여성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마들랜에 대해서 기억에 남는 것은 빌리와의 베드씬에서 입고나온 T팬티뿐입니다. 아무리 남자들의 영화라고는 하지만 여성 캐릭터가 너무 남성 중심적으로 소비되어 버린 것만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디파티드]는 주연 배우들의 이름도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조연 배우들 역시도 정말 대단한 캐스팅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잭 니콜슨, 마틴 쉰, 마크 월버그, 베라 파미가 외에도 알렉 볼드윈, 레이 윈스턴, 안소니 앤더슨 등 낯익은 배우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단한 캐스팅은 오히려 제자리를 찾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디파티드]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마지막 엔딩이었습니다. [디파티드]의 엔딩은 나름 [무간도]를 이어받아 비극으로 마무리를 짓지만 그 비극의 끝자락은 너무나도 많은 차이를 남겼습니다.
[무간도]에서 진영인의 그 안타까운 죽음과 유건명의 몰락은 3부작이라는 거대한 러닝타임을 통해 아주 조금씩 관객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특히 3편에서 이루어지는 유건명의 몰락은 유덕화의 연기력과 맞물리며 제게 대단한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그런 결말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디파티드]는 너무 뻔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진영인의 죽음에서 유건명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2편의 영화를 통해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던 [무간도]에 비해 [디파티드]는 너무 서둘러 콜린을 최후로 몰고 간 느낌입니다. 하긴 3편의 영화를 1편으로 압축시키려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더군요.
[디파티드]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할리우드식 느와르 영화입니다. 이 영화 자체로는 사실 별다른 불만이 없습니다. 잭 니콜슨의 멋진 연기를 감상 할 수 있었으며, 엇갈린 운명으로 인하여 비극으로 치닫는 두 남자의 사활을 건 대결도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무간도]라는 원작을 생각하면 아쉽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군요. 리메이크가 원작을 넘어서기는 힘들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영화들이 증명을 해보였지만 그것이 마틴 스콜세지같은 거장에게도 해당하는 것일 줄이야...
술로 비유한다면 [무간도]가 오래 숙성된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술이라면, [디파티드]는 고급스러운 포장과 좋은 재료로 빚어진 값비싸지만 숙성된 맛은 덜한 술이었습니다. 새 술이 좋은 술임에는 분명하지만 옛 술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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