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지우
주연 : 김정은, 이태성, 김영재, 정유미
개봉 : 2005년 9월 29일
관람 : 2005년 9월 26일
등급 : 15세 이상
아주 오래전에 롯데리아 강남점에서 알바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롯데리아 강남점에는 두명의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중 한명은 절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절 그토록 싫어하던 매니저가 일하는 도중에 갑자기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더군요. 워낙에 깐깐하고 남성다움을 강조하던 그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그의 눈물은 제게 상당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누가 그를 저렇게 눈물 흘리게 한걸까?'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매니저의 눈물은 사랑니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가 실연의 상처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소설을 쓰며 상상했던 저는 그깟 치통 때문에 진짜 사나이인척 하는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에 실망과 통쾌함을 느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사랑니는 제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그전엔 진정한 사랑을 하면 사랑니가 나온다는 속설 탓에 '나도 어서 사랑니를 앓아보고 싶다'라고 희망했었지만, 그 매니저의 눈물을 본 후 '그렇게 아픈가?'하는 막연한 공포감이 절 사로잡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 [사랑니]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사랑니에 가지고 있는 막연한 동경과 두려움을 인영(김정은)의 첫사랑으로 함축하여 표현합니다. 사랑에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겪어야했던 첫사랑의 달콤한 그리움과 첫사랑이 깨진 후 처음으로 실연의 아픔이라는 것을 알아야했던 결코 잊지못할 괴로움. 그러고보니 첫사랑과 사랑니는 닮은 점이 꽤 많네요. ^^
서른살의 학원 강사 조인영은 어느날 열일곱살의 학원 수강생 이석(이태성)에게 13년전 첫사랑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인영의 첫사랑과 이름도 똑같고, 얼굴도 닮은 그 아이. 그녀는 이러면 안되는줄 알면서도 점차 이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 나갑니다.
일단 서른살 여성과 열일곱 소년의 사랑이라는 자극적인 영화의 소재가 절 불편하게 했습니다. [해피엔드]에서 전도연의 파격적인 변신과 함께 끈적끈적한 불륜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정지우 감독은 이번에도 앞뒤 설명없이 이석에게 빠져드는 인영의 모습을 처음부터 잡아냅니다. 비오는 날 이석을 집앞까지 데려다주고, 불켜진 창을 확인한 후, 기여코 이석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마는 인영의 저돌적인 모습에서 '제자한테 저렇게 먼저 꼬리쳐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그때부터 서른살 조인영과 열일곱 이석의 사랑을 잡아냄과 동시에 열일곱 조인영(정유미)과 열일곱 이석의 사랑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서로 상반된듯 보이던 이 두 사랑이 서로 닮았음을 은근슬쩍 보여주며 제게 서른살 인영의 사랑을 인정하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이 영화에 동감할 수 없었습니다. '쿨하게 살고 싶다'라던 인영의 술에 취한 넉두리도, 자신을 사랑하는 철부지 열일곱 소년 이석과 어느날 그녀에게 돌아온 인영의 첫사랑인 서른살 이석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준 친구 정우(김영재)앞에서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는 인영의 모습도,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만은 고지식한 제겐 너무나도 무책임한 행동처럼만 느껴졌습니다.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요? 단지 사회적 비난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인영의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요?
정지우 감독은 [해피엔드]에서도 무책임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습니다.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는 성공한 커리어우먼 보라(전도연)의 불륜을 통해서... 하지만 [해피엔드]는 [사랑니]와 많은 점에서 달랐습니다. 일단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파격적인 변신이 인상적이었으며, 무책임한 사랑에 대해서 응징을 하던 마지막 민기(최민식)의 복수도 섬뜩했습니다. 그러나 [사랑니]에 그러한 것들이 없습니다.
일단 김정은의 연기변신 부분에서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분명 그녀는 이전의 귀엽고 코믹한 캐릭터에서 벗어나 열일곱 소년을 사랑한 서른살의 커리어우먼을 연기함으로써 표면적인 면만 본다면 상당한 연기 변신을 한것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해피엔드]의 전도연처럼 파격적인 변신이라고 말하기는 여전히 부족해 보이네요.
물론 그 파격적인이라는 형용사 앞에는 전도연의 노출씬이 큰 몫을 차지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책임한 불륜의 사랑에 빠진 보라라는 캐릭터를 이전 자신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깨부수며 연기했습니다. 그렇기에 제게 전도연이 진정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난 영화는 [해피엔드]였습니다.
하지만 김정은이 연기한 인영은 겉보기만 달라졌을뿐 실질적으로는 김정은의 귀여운 이미지에서 달라진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녀는 열일곱 소년과 위험한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영화의 순간순간 귀여운 이미지를 계속 노출시킴으로써 관객에게 인영의 사랑을 인정받으려합니다. 저는 김정은에게 전도연처럼 파격적인 노출을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어찌되었건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니까요.) 하지만 최소한 열일곱 소년을 사랑한 서른살 여성의 심리적 갈등정도는 진지하게 표현할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귀여울 뿐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결말을 열어놓음으로써 절 이해불능의 상태로 몰고갑니다. 인영의 과거 첫사랑 이야기인줄 알았던 회상씬이 현재로 들어옴으로써 과거가 현재가 되어버리는 이 이상한 스토리 전개는 결국 열일곱의 첫사랑과 서른의 사랑이 서로 닮았음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인영의 무책임한 사랑을 첫사랑이라는 감정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골치아픈 사회적인 책임 부분은 살짝 비껴 나가려합니다.
게다가 현재로 찾아온 인영의 과거가 사실 열일곱 이석과 인영의 현재였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예를 들어 열일곱 인영이 이수(이석의 쌍둥이 형)에게 빌려줬던 책은 윤리 교과서였고, 서른의 인영이 이석에게 돌려받은 책은 세계지리 교과서입니다.)을 영화의 후반에 배치함으로써 저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그러한 이해불능의 상태는 영화가 끝나고 한참동안이나 절 짜증나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첫사랑을 기억합니다. 3년간 짝사랑만하다가 놓쳐버린 그녀. 몇년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유난히 컸던 순진한 고등학생이었던 내 기억속의 그녀와는 달리 우연히 만난 그녀는 짙은 화장에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은 섹시한 여성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느꼈던 씁쓸한 배신감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차라리 그녀를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내 첫사랑은 아직도 청순한 여고생이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오랫동안 절 괴롭혔죠.
서른의 이석을 만난 인영의 속마음도 어쩌면 저와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세월의 흔적 앞에 너무나도 달라진 첫사랑의 모습. 그냥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둘때가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 추억을 현실로 끌고나와 아직 미성년자인 소년에게서 얻으려하는 인영의 사랑은 아무리 첫사랑이라는 아련한 추억이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결코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책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