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스티븐 스필버그
주연 : 톰 크루즈, 다코타 패닝
개봉 : 2005년 7월 7일
관람 : 2005년 7월 7일
올 여름... [배트맨 비긴스]와 더불어 제게 최고의 기대작이었던 [우주전쟁]이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톰 크루즈의 만남, 이미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그 매력적인 조합을 확인했던 저는 다코타 패닝의 합류로 스티븐 스필버그, 톰 크루즈, 다코타 패닝의 황금 삼각 조합의 완벽한 매력을 확인할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우주전쟁]의 개봉일... 회사일을 일찌감치 끝내고 바삐 극장으로 향한 저는 떨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극장 좌석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충격속에 빠져들어야 했습니다. [우주전쟁]은 전혀 제가 기대했던 방식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비슷한 영화를 기대했지만 [우주전쟁]은 그런 제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던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래서 더욱 좋았습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분명 매력적인 영화였지만 누명을 쓴 주인공의 활약상이라는 너무 전형적인 방식의 스토리 전개 때문에 매력적인 영화, 그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보다는 [A.I.]가 더 좋았습니다. 전혀 스필버그답지 않으면서도 그만의 따뜻한 감성이 느껴졌던 [A.I.]는 개인적으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중에서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마지막 20여분은 별로 맘에 들지 않았지만 [A.I.]를 보면서 느꼈던 전율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A.I.]이후 [마이너리티 리포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터미널]등을 보면서 결코 [A.I.]같은 영화는 스필버그에게서 다시는 나올수 없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예상은 [우주전쟁]을 보며 무너졌습니다. [우주전쟁]은 [마이너리티 리포트]보다는 [A.I.]에 가까운 영화였던 겁니다. [A.I.]를 보면서도 SF영화의 재미보다는 너무나도 리얼한 미래에 대한 풍경과 그 속에 담겨진 추악한 인간의 공포스러움을 잘 잡아냈던 스필버그 감독은 [우주전쟁]에서도 외계 생명체의 습격이라는 전형적인 SF액션 영화의 스토리 라인속에서 전혀 뜻밖에도 죽음에 몰린 인간에 대한 공포스러움을 잡아냅니다. 올 여름 3편의 공포 영화를 봤으면서도 공포의 짜릿함이 아쉬웠던 저는 SF액션 영화인 [우주전쟁]에서 바로 그 공포의 짜릿함을 맘껏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1. 외계 생명체에 대한 공포스러움.
[우주전쟁]의 시작은 예상대로 외계 생명체의 무시무시한 습격으로인한 공포에서 시작합니다.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한 곳에 여러번의 번개가 치고, 땅속에서 무시무사한 트라이 포트가 쏟아올라와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부쉬고,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이렇게 나열하고보니 그리 특별난 것이 없네요. 하지만 영상으로 표현된 [우주전쟁]의 외계 생명체의 습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여기에서 [인디펜던트 데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본 영화였지만 썸머시즌 블럭버스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영화였음에는 분명합니다. [인디펜던트 데이]의 외계 생명체의 습격 역시 무시무시했지만 그것은 공포스럽다기 보다는 스펙타클한 영상의 쾌감을 안겨주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인디펜던트 데이]를 보며 '우와 멋있다'라는 감탄사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영화속 외계 생명체의 습격 장면이 단지 오락 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주전쟁]은 다릅니다. 이 영화속 외계 생명체의 습격은 '우와 멋있다'라는 감탄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온 몸을 움찔거리며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그 무시무시한 살상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레이(톰 크루즈)가 트리이 포트가 뿜어내는 광선에 맞은 사람들의 재를 온 몸에 잔뜩 뒤집어쓰고 넋이 빠진 것처럼 집안 욕실에 멍하니 서있던 장면은 [인디펜던트 데이]식의 SF영화에 익숙했던 제가 받은 충격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시작부터 저는 레이에 감정이입이 자연스럽게 된 것입니다.
물론 레이가 순간 어린 아들과 딸을 지키기위해 초인적인 영웅이 되어 외계 생명체를 무찌르면 영화는 좀더 SF영화다운 쾌감을 관객에게 선사하겠지만 레이는 그러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그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랬을것처럼 레이는 그저 앞만보고 도망칩니다. 영웅심에 도취되어 외계 생명체에 맞서 싸우겠다는 아들을 달래가며 도망가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도망가도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망치는 것밖에 없기에 그는 도망칩니다. 만약 제가 그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랬을것처럼...
2. 죽음에 몰린 인간에 대한 공포스러움.
영화가 중반으로 흐를수록 [우주전쟁]은 단지 외계 생명체에 대한 공포스러움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치 [A.I.]가 그랬듯이 이 영화의 공포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집니다.
또다시 [A.I.]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군요. 제가 [A.I.]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단지 잘만들어진 SF영화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간과 똑같이 생긴 로봇들을 잔인하게 부수며 열광하는 두려움에 떠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보며 그 속에서 환호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지구 종말의 두려움 속에서 인간보다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로봇을 부수며 공포스러움을 극복하던 [A.I.]의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 바로 제 모습이기도 했던 겁니다.
[우주전쟁]의 인간에 대한 공포스러움도 [A.I.]와 일맥상통합니다. 고속도로를 피해 한적한 국도를 선택한 레이에게 그의 아들인 로비(저스트 챗윈)는 '왜 국도로 달리냐'고 묻습니다. 이에 레이는 대답합니다. '차를 빼앗길까봐'. 레이의 그 무시무시한 대답은 얼마후 실현됩니다. 도로를 꽉 채운 사람들은 레이에게 차에 태워달라며 달려듭니다. 결국 차를 부쉬고 총으로 레이를 위협해서 레이의 차를 빼앗고야마는 사람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저 현장에 있다면 나도 살기위해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으려 하지 않을까라는...
그 아비규환의 현장은 [우주전쟁]이 내걸은 이 영화의 공포스러움이 잘 표현된 장면입니다. 결국 차를 빼앗은 사람도 차를 빼앗으려는 또다른 사람의 총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공포에서 벗어나기위해 그런 공포스러운 존재가 스스로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강한 또다른 사람에게 희생되겠죠. 공포는 공포를 부르니까요.
이런 인간에 대한 공포는 오길비(팀 로빈스)라는 캐릭터의 등장으로 구체화됩니다. 레이와 레이첼(다코타 패닝)에게 몸을 숨길 곳을 제공하는 오길비는 남보다 침착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위급차 운전사입니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을 매일봤던 그는 공포를 이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바로 침착함입니다. 공포에 매몰되는 순간 결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오길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침착하던 오길비가 결국 인간의 피를 대지에 뿌려대는 외계 생명체의 행위를 보고 침착함을 잃어버리고 광분합니다. 오길비가 이성을 잃음으로써 레이는 외계 생명체보다 지금 당장 오길비가 자신과 레이첼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가 결국 오길비를 죽이는 그 순간 그저 겁많은 아버지였던 레이는 공포를 이기기위해 남을 해치는 썸뜩한 존재가 됩니다. 결국 그 역시 죽음에 몰린 공포스러운 인간에 불과했던 겁니다.
3. 나 자신과의 싸움에 대한 공포스러움.
레이와 레이첼은 살기위해 도망치고 또 도망칩니다. 하지만 아무리 도망을쳐도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외계 생명체의 무시무시한 위력은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무기들을 모두 쓸모없게 만듭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이젠 시간문제처럼 보입니다.
이쯤되면 레이를 엄습하는 공포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않는 것에 대한 자포자기입니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이 공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온 세계가 인간의 피로 뿌려진채 검붉게 물든 상황에서 레이는 서서히 무너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때 레이첼이 트라이 포트에 납치되고 맙니다. 그 순간 레이는 그 어떤 액션 영화속의 주인공보다 더욱 용감해집니다. 레이가 영웅적인 행동을 하는 유일한 장면이죠. 그것의 원동력은 바로 부성애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보다 더욱 소중한 어린 딸의 존재였던 겁니다.
레이첼를 구하고 트라이 포트에서 빠져나온 레이의 얼굴에서 확고한 희망의 표정을 발견하는 그 순간은 이 영화의 가장 짜릿한 쾌감입니다. 영화를 보는내내 외계 생명체의 무시무시한 공격과 공포에 질린 인간의 혐오스러움, 그리고 영웅 부재의 상황에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흑과도 같은 상황속에서 단지 공포에 떨며 영화를 보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저는 레이의 희망에찬 표정 하나만으로 비로서 여유를 되찾고 영화를 볼수 있게 된것입니다. 어린 아들이 있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제게 너무나도 감동스러운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인터넷 영화 게시판을 보니 [우주전쟁]에 대한 비판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물론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틀리지만 제가 느꼈던 그 사실적인 공포를 다른 분들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원작인 H.G. 웰스의 동명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소설이 1898년에 처음 출판되었다는 글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100년도 넘은 고전 SF소설을 읽으신 분들에 의하면 스필버그 감독은 최대한 [우주전쟁]을 원작에 가깝게 만들었다는 군요. 그래서인지 100년전에 쓰여졌기에 빈약할수밖에 없는 소설의 상상력을 현재에 맞게 각색하지 않은 스필버그의 무감각함을 질타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원작 소설의 열렬한 팬이라면 조금이라도 소설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도 스필버그 감독은 원작 소설의 열렬한 팬이었을 것이며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충실히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영화화한 것이겠죠. 저는 그러한 스필버그의 의도가 오히려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라면 원작을 마구 훼손해대는 다른 영화들보다 휠씬 올바른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인어공주]를 비극에서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헐리우드의 횡포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결단은 어쩌면 스필버그였기에 가능했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전쟁]의 가장 많은 비판중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라스트의 허무함을 들기도 하는데... 저는 오히려 [우주전쟁]에는 그런 라스트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갑자기 초인적인 미국 대통령이 등장하여 전투기를 몰며 외계 생명체를 처부쉈던 [인디펜던트 데이]의 라스트를 기대하신 분들은 안계시겠죠? 이 영화는 처음부터 인간의 나약함을 설명하며 외계 생명체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외계 생명체를 이기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 미생물이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외계 생명체도 눈에 보이는 존재인 인간에 대해서만 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않는 미약한 존재인 미생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겠죠. 하지만 실질적으로 지구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미생물들입니다. 결국 인간들도 미생물에 의해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나약한 존재이니까요. 단지 오랫동안 지구상에서 같이 공존하다보니 미생물에 대한 면역력이 생긴것 뿐인거죠. 외계 생명체들은 그것을 몰랐을 것이며 인간에 대한 공격에 촛점을 맞춘 침략을 준비한 것입니다. 100여년전에 이런 결말을 생각해내다니 H.G. 웰스의 천재성이 돋보인다고밖에 저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암튼 올 여름 저는 제게있어서 너무나도 완벽한 SF영화를 만난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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