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주연 : 크리스찬 베일, 마이클 케인, 리암 니슨, 케이티 홈즈
개봉 : 2005년 6월 24일
관람 : 2005년 6월 23일
시간을 거슬러 15년전으로 가보면 당시 저는 부모님을 졸라 비디오 플레이어를 샀습니다. 아마 그 비디오 플레이어가 지금의 절 이토록 영화에 푹 빠져들게한 주범일 겁니다. 암튼 비디오 플레이어를 산 저는 처음으로 보고 싶은 영화를 비디오샵에 가서 맘껏 고를 수 있게 되었으며, TV에서 해주는 영화들을 녹화해서 소유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녹화했던 영화중에서 가장 아꼈던 영화가 [대부1, 2]와 [배트맨]입니다. [대부]는 아직까지 제겐 최고의 영화로 기억되며(남들은 모두 실패작이라 평했던 [대부 3]마저도 제겐 너무나도 가슴 벅찬 영화였습니다.) [배트맨]은 제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였습니다.
그 이후 [배트맨]에 대한 제 애정은 자연스럽게 [배트맨 2]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배트맨 포에버]에 이르러 [배트맨]에 대한 애정은 실망으로 바뀌었고, 급기야 [배트맨 앤 로빈]를 보고나서는 실망은 분노가 되었습니다.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 앤 로빈]에 대한 안좋은 기억때문에 지금도 헐리우드 감독중에서 유일하게 싫어하는 감독이 조엘 슈마허입니다.
암튼 [배트맨]에 대한 애정은 그 이후 [엑스맨], [스파이더맨]과 같은 다른 코믹스 영웅들에게로 옮겨졌으며, 서서히 [배트맨]은 제게 추억속의 영웅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멘토]의 천재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바로 그러한 제 추억 속의 영웅 [배트맨]을 끄집어 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배트맨]의 가장 처음 이야기를 영화화했으며, [배트맨 포에버]의 발 킬머, [배트맨 앤 로빈]의 조지 클루니같은 번지르한 스타급 배우가 아닌 크리스찬 베일이라는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는 젊은 연기파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제 기대를 더욱 부풀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올 여름 그 베일이 벗겨졌습니다.
일단 첫 느낌부터 말한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과연 천재다운 기질을 발휘했습니다. 솔직히 조엘 슈마허는 [배트맨]을 다시 일어설 수 없을만큼 철저하게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그 원색의 유치한 화면과 우스꽝스러운 악당들, 그리고 제임스 본드처럼 핸섬하고 유머 감각을 지닌 바람둥이 영웅이 되어버린 브루스 웨인까지...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은 온갖 캐릭터들만이 난무하는 속빈 블럭버스터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토록 철저하게 망가진 [배트맨]을 어떻게 제 위치로 돌려놓을 것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배트맨 앤 로빈]의 다음 이야기가 아닌 [배트맨]의 가장 처음 이야기에 손을 댄 것은 너무나도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조엘 슈마허로 인하여 잊혀진 브루스 웨인의 인간적인 고뇌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겁니다. 브루스 웨인이 어린 시절 박쥐에 대한 공포증을 앓게 되는 이야기에서부터, 그의 두려움으로 인해 촉발된 부모님의 어이없는 죽음,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방황하는 젊은 시절의 브루스 웨인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차근차근 관객에게 이야기해주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한 그의 선택은 조엘 슈마허가 이룩해놓은 썸머시즌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로의 [배트맨]을 원했던 관객들에겐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이 팀 버튼의 [배트맨] 시절로 돌아가길 원했던 저로써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브루스 웨인의 인간적인 고뇌를 아예 그 원류부터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습니다. 그가 왜 배트맨인지, 어떻게 백만장자였던 그가 천하무적의 영웅이 되었는지,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배트맨의 비밀 기지인 동굴은 어떻게 지어졌는지, 멋진 배트카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 자신이 배트맨의 열렬한 팬임을 과시하며 너무나도 정성껏 배트맨의 모든 것을 하나둘씩 원상태로 돌려놓습니다. 그 꼼꼼함에 영화를 보는내내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러야 했습니다. "완벽해!"라고...
[배트맨 비긴스]는 제목처럼 [배트맨]의 처음 시작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은 잊고 팀 버튼의 [배트맨]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이 영화속 가장 의미있는 '추락하면 다시 올라갈 길을 찾으면 된다'라는 대사처럼 조엘 슈마허가 추락시킨 [배트맨]에게 다시 올라갈 길을 제시하며 완벽하게 본 궤도로 올려놓은 겁니다. 거기에 리암 니슨, 게리 올드만, 모건 프리먼, 마이클 케인으로 이어지는 명배우들의 연기의 향연은 그 어떤 영화에서 그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을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황홀했답니다.
여기에서 놀란 감독은 한걸음 더 나갑니다. [배트맨 비긴스]을 본 궤도로 올려놓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블럭버스터로써 지녀야할 영화적인 재미마저 이뤄놓으려 한겁니다. 솔직히 [메멘트]와 [인썸니아]와 같은 뛰어난 작품성은 지니고 있지만 영화적인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던 영화만을 만들었던 놀란 감독이기에 [배트맨 비긴스]에 블럭버스터로써의 재미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놀란 감독은 완벽하게 해냅니다.
영화의 초반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 지루했다면 악의 근원이 밝혀지는 영화의 후반부에는 스펙타클한 블럭버스터의 재미에 충실합니다. 고담시를 구원할 수 없는 타락한 도시로 규정하고 아예 멸망시켜 버리려는 악의 움직임은 거대한 스펙타클과 함께 단 한시도 화면에서 눈을 뗄수없는 화려한 액션의 쾌감을 전해줍니다.
특히 악의 근원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지금까지(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배트맨이 선의 편인 영웅이면서도 어두운 면을 감출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힘 자체가 악의 근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니 말입니다. 마치 [스파이더맨]을 연상케하는 브루스 웨인과 레이첼 도스(케이티 홈즈)의 관계 역시 어쩌다가 브루스 웨인이 돈많고 능력있으면서도 외로운 영웅이 되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레이첼 도스라는 캐릭터가 [배트맨 비긴스]를 위해 원작에도 없는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라 점도 놀란 감독이 철저하게 배트맨을 원상태로 돌려놓기위해 [배트맨 비긴스]의 캐릭터를 구축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블럭버스터의 재미를 보여주는 영화의 후반부에서조차 [배트맨]에 대한 근본적인 탐류를 멈추지 않는 놀란 감독의 완벽주의는 과연 그가 왜 천재라고 불리워지는지 그 의미를 확실히 깨닫게 해주더군요.
하지만 여기에서 [배트맨 비긴스]의 아쉬운 점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네요. [배트맨 비긴스]가 조엘 슈마허로 인하여 망가진 [배트맨]을 다시 본 궤도로 되돌려준 소중한 영화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너무나도 완벽했던 팀 버튼의 [배트맨]과 비교한다면 아직은 모자란 영화라는 것 역시 안타깝지만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다시 팀 버튼의 [배트맨]에게로 돌아가 보죠. 과연 그 무엇이 절 이 영화에 그토록 빠지게 했으며, 천재인 놀란 감독조차 팀 버튼의 [배트맨]을 앞지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번째 저는 [배트맨 비긴스]의 고담시에 실망했습니다. 팀 버튼의 고담시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도시였으며, 그렇기에 선과 악이 뒤덤벅이된 이상한 캐릭터들이 진검 승부를 벌여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정도 완벽한 코믹스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란 감독은 이러한 고담시를 현실적으로 구축합니다. [배트맨 비긴스]에서 처음 고담시가 그 모습을 드러냈을때 저는 처음으로 이 영화에 실망했습니다. 놀란 감독은 고담시를 신비로운 공간이 아닌 마치 뉴욕과 같은 거대한 자본의 대도시로 탈바꿈시킨 겁니다.물론 이런 현실적인 공간으로써의 고담시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초현실적인 고담시가 그리워지는 것은 제겐 어쩔수 없더군요.
두번째 악당 캐릭터 역시 실망스러웠습니다. 제가 팀 버튼의 [배트맨]에 열광했던 이유는 그로테스크한 악당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었습니다. 1편에서의 조커, 2편의 펭귄맨과 캣우먼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주인공인 배트맨보다 매력적이었던 이들 악당은 헐리우드 영화속에서 악당은 그저 악당일 뿐이었던 이전 영화들에 익숙한 제게 즐거운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조엘 슈마허 감독도 그러한 팀 버튼의 악당 캐릭터를 쫓아갈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 빈약한 연출력은 매력적인 악당 캐릭터마저도 쓰레기처럼 느껴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스]에는 그런 그로테스크한 악당은 없습니다. 영화 초반의 카리스마 넘치는 갱두목 팔코니가 조커같은 매력적인 악당이었다면... 교활한 심리학자 크레인은 차라리 리들러(3편의 악당을 언급하게 될줄이야...)같았다면... 뭔가 해낼줄 알았던 이 영화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했던 라스 알 굴(와타나베 켄)이 그렇게 비중이 작지만 않았다면... [배트맨 비긴스]의 악당 캐릭터들을 보며 자꾸만 팀 버튼의 [배트맨]이 그리워졌답니다.
뭐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암튼 확실한 것은 [배트맨 비긴스]가 조엘 슈마허 감독으로 인하여 추락한 [배트맨]에게 다시 올라갈 길을 제시한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저는 이 영화에 그 점을 높이 사고 싶으며,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에 최고의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몇년전만해도 [배트맨]을 다시 스크린 속에서 만나게 될줄 꿈에도 생각못했으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제게 커다란 선물을 준 셈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제작사가 더이상 [배트맨 포에버]에서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겁니다. [배트맨]의 제작사인 워너 브러더스는 [배트맨]이 그 해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을 누르고 최고 흥행작이 되자 [배트맨]의 무한한 흥행성을 감지했습니다. 하지만 팀 버튼 감독은 [배트맨]의 흥행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배트맨 2]는 헐리우드 역사상 가장 이상한 블럭버스터로 완성하며 워너 브라더스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워너 브라더스가 선택한 방법은 조엘 슈마허 감독을 영입해서 본격적으로 [배트맨]을 썸머시즌 블럭버스터로 탈바꿈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처참했죠. 엄청난 돈이 들어간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 앤 로빈]은 그리 만족스러운 흥행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던 겁니다.
언제나 관객들은 제작사보다 앞질렀습니다. 밝고 활기찬 블럭버스터가 되면 돈을 더 벌수 있을것이라는 워너 브라더스의 안일한 생각은 얼마나 그들이 관객에 비해 뒤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관객들에게 예전의 [배트맨]을 돌려주려는 생각이라도 했으니 기특할 뿐입니다.
하지만 과연 [배트맨]의 여섯번째 이야기에서도 워너 브라더스는 똑같은 실수를 번복하지는 않을런지 의심되네요. [배트맨]의 여섯번째 이야기는 벌써 기획에 들어갔는데 감독은 새로 교체되고(그건 예상했던 일입니다. 놀란 감독의 의무는 결국 배트맨의 부활이었던 거죠.), 크리스찬 베일이 여전히 출연할 것이며(그건 반가운 소식이죠. 그보다 더욱 완벽한 배트맨은 현재 시점에서 찾기 힘들 것입니다.), 배트맨의 로맨스가 강화될 것이랍니다(그 부분이 불안합니다. 로맨스라니...). 아직 기획 단계이기는 하지만 제발 놀란 감독이 겨우 부활시킨 [배트맨]을 다시 추락시키는 일이 없기만을 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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