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양윤호
주연 : 양동근, 정두홍, 정태우, 히라야마 아야, 마사야 카토
개봉 : 2004년 8월 13일
관람 : 2004년 8월 13일
요즘 저는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구피는 웅이때문에 발이 묶인 관계로 예전처럼 미리 영화를 예매해놓고 여유롭게 영화보러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무작정 극장앞에서 구피와 만나 보고싶었던 영화중 시간대가 맞는 영화를 골라보는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보고 싶었던 영화는 못보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영화를 보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늑대의 유혹]과 [신부수업]이 그러했습니다. 사실 [늑대의 유혹]은 [킹아더]를 보기위해 극장에 갔다가 [킹아더]가 매진이라서 어쩔수없이 보게된 영화입니다. [신부수업]역시 비록 제가 좋아하는 하지원이 주연을 맡은 영화이지만 저는 이 영화에 제가 실망할 것을 미리 예상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수업]보다는 관객들의 평이 비교적 좋은 [누구나 비밀은 있다]를 보기로 결심했었죠. 하지만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개봉 2주차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스크린에서 다른 영화와 지그재그식으로 상영을 하는 바람에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마지막 상영타임을 놓쳐 어쩔수없이 [신부수업]을 보게된 겁니다.
[바람의 파이터]도 그랬습니다. 오랜 야근끝에 오랜만에 시간이 난 저는 웅이를 장모님께 맡긴 구피와(사실 이번주는 더위를 핑계삼아 거의 일주일내내 웅이를 장모님께 맡겼답니다. ^^;) 목동 CGV에서 만났습니다. 목동 CGV앞에 당도하는 그 순간까지 제가 보고 싶었던 영화는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인 [리딕]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극장에 당도하니 [리딕]을 보려면 무려 2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할수없이 [리딕]을 포기하고 다른 영화를 선택하려고하니 [시실리 2km]와 [바람의 파이터]가 눈에 띄더군요. 고민끝에 결국 저는 [바람의 파이터]를 [리딕]대신 볼 영화로 정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예전처럼 보고 싶은 영화 미리 예매해놓고 영화를 보던 여유로움이 그립습니다. 결국 [킹아더]와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비디오 출시이후로 영화 보기를 미루었는데 [리딕]도 그렇게 될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를 앞에 두고 못보는 기분... 정말 우울하네요.
아주 오래전이었습니다. [바람의 파이터]의 영화제작소식을 들었던 것은... 그때까지만해도 스포츠 일간지에 실렸던 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를 간간히 읽었으며, [넘버 3]에서 조필(송강호)의 그 유명한 대사속에 등장한 최배달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기에 영화 [바람의 파이터]를 저는 기대하였습니다.
과연 전세계를 돌며 일본 전역의 최고 고수들을 차례로 무너뜨렸다는 전설의 파이터 최배달을 연기할 배우는 누구일까? 영화에 대한 제 기대는 자연스럽게 주연배우 캐스팅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배달을 연기할 최적의 배우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달 후 저는 비가 최배달 역에 캐스팅되었다는 최악의 뉴스를 접했습니다. 아무리 인기 절정의 가수라고는 하지만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데 연기경력이라고는 전무한(그 당시엔) 비가 최배달을 연기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해프닝처럼 보였습니다. 그 이후 유민이 최배달의 연인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걸로 마지막이었습니다. 결국 [바람의 파이터] 영화제작소식은 잠잠해 졌습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2년이 흘렀고 결국 최종적으로 양동근이 최배달에 캐스팅되었으며 영화는 3년만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3년이라는 시간동안 [바람에 파이터]에 대한 제 기대는 시들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3년동안 제작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절 불안하게 했습니다. 제작이 연기된 영화치고 재미있었던 영화가 없다는 편견이 자꾸 [바람의 파이터]에 대한 기대도를 계속 낮추었던겁니다.
결국 불가항력적인 인연으로 인해 이 영화를 보게되었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는 그 순간까지도 이 영화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과연 재미있을까?'라는 가장 원초적인 제 스스로의 질문은 언제나 '재미없을것 같아'라는 비관적인 대답으로 돌아오곤 했죠. 영화 [바람의 파이터]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이 영화에 대한 결론은 유보하기로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고난후 지금까지 영화에 대한 제 느낌이 상당히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의 파이터]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던 3년전의 기대도와 비교한다면 이 영화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기전까지 낮아질대로 낮아진 제 기대도와 비교한다면 이 영화는 꽤 잘만든 영화입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기대를 얼마나 했는가에 따라서 상대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이 영화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한 편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영화가 제게 있어서 재미있었는지, 없었는지 결론이 안날 정도로 말입니다.
이 영화 전체에 대한 평가는 유보상태지만 이 영화의 요소요소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양동근이 창조해낸 최배달이라는 캐릭터는 기대이상입니다. 솔직히 양동근이 최배달에 최종적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저는 도저히 양동근이 연기하는 최배달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처음 선택인 비보다는 휠씬 나은 선택이었고, 양동근이 연기를 잘한다는 사실 역시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에게 전설적인 파이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저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양동근은 그만의 개성으로 최배달을 새롭게 창조해냈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전까지의 최배달은 영웅 그 자체였습니다. 일본의 도장을 돌며 최강의 고수들과 일전을 벌여 전부 승리를 거두었다는 그 전설적인 일화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영웅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양동근이 창조해낸 최배달은 영웅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그는 살아남기위해 치욕적인 모욕에도 굴복하는 약한 남자였으며, 사랑하는 요우코(히라야마 아야)를 위해 영웅행세를 하는 귀여운 남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죽인 료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료마의 가족들에게 사죄를 하기위해 오랜 시간을 바치는 인간미가 넘치는 남자입니다. 이 영화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에 나왔던 '맞는 것이 두렵고, 지는 것이 두렵다'는 최배달의 나레이션으로 최배달의 영웅화보다는 최배달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욱 신경을 썼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최배달의 인간적인 모습은 양동근이라는 배우와 겹치며 양동근의 최배달이 완성된 겁니다. 영웅이기 이전에 맞는 것이 두렵다는 인간 최배달. 만약 비가 연기했다면 최배달은 번지르한 꽃미남이 되었을 것이며,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가 맡았다면 카리스마넘치는 영웅 최배달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양동근은 영웅이 아닌 인간 최배달을 만들어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최배달의 면모를 그는 이끌어낸거죠.
이 영화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액션씬도 일단은 합격점입니다. 액션의 호흡이 길지 못하고 짧게 끊어진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최배달이 여러명의 파이터와 대결을 벌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짧은 호흡의 액션씬은 어쩔수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 하나하나의 액션을 치밀하게 잡아냈다면 이 영화는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질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양윤호 감독은 액션의 호흡을 짧게하는 대신 빠른 편집으로 감각적인 액션씬을 만들어냈습니다. 인상적인 음악과 적절하게 사용된 슬로우모션은 오랜만에 우리 영화의 액션을 접한 저에게 꽤 강한 만족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액션씬이 감각적이기만 했다면 어쩌면 이토록 만족감이 크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영화는 감각적인 액션과 함께 관객이 직접 영화속 대결의 현장속에 들어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리얼 액션의 현장으로 관객들을 안내합니다. 그러한 리얼 액션은 '맞는 것이 두렵고, 지는 것이 두렵다'는 최배달의 나레이션처럼 관객에게도 치열한 고수들의 대결을 바라보며 영화적 쾌감을 느끼는 간접적인 체험보다는 직접 대결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와 최배달의 아픔과 패배에 대한 공포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직접적인 체험을 안겨줍니다.
최배달이 산속으로 올라가 혹독한 수련을 하는 장면은 마치 내 자신이 그런 수련을 하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으며, 최배달이 일본 고수들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당할때마다 마치 제 자신이 칼에 맞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즘처럼 가볍고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들이 활개를 치는 극장가에서 이처럼 강한 남성적인 액션을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액션씬에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아무리 이 영화의 액션이 호흡이 짧다고는 하지만 마지막 가토(마사야 카토)와의 결투씬마저 그토록 짧은 호흡만으로 끝을 냈어야했는지 궁금하군요. 분명 가토와의 대결은 이 영화의 최고 하이라이트인데 관객들에게 잔뜩 기대를 하게끔 만들어놓고 가토와의 일대일 대결을 단 몇분만에 마무리지어 버리는 것은 분명 커다란 아쉬움이었습니다. 그때문에 이 영화는 클라이막스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가토와의 액션씬만 좀더 치밀하고 길게 만들었다면 이 영화의 액션씬은 합격점뿐만이 아니라 완벽한 만족으로 기억되었을텐데...
양동근이 창조해낸 최배달이라는 캐릭터와 영화의 액션씬이 합격점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영화 전체의 평가를 유보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양윤호 감독의 연출력 때문입니다.
양윤호 감독. 1996년 [유리]라는 파격적인 영화로 감독 데뷔한후 1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바람의 파이터]까지 6편의 영화를 감독했던 중견 감독입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뭔가 2%가 부족했었습니다. 양윤호 감독의 데뷔작이며 박신양의 영화 데뷔작이기도한 [유리]는 보지 못했지만, 김혜수와 김호진의 섹스 코미디 [미스터 콘돔], 차인표의 (그나마)최고의 영화로 평가받고 있는 [짱], 그리고 거대한 화재 블럭버스터였던 [리베리메]까지 그의 영화는 언제나 재미있었지만 완벽하다고 평가하기엔 언제나 2% 부족했었습니다. (전지현의 영화 데뷔작인 [화이트 발렌타인]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화이트 발렌타인]은 2%가 아닌 98%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바람의 파이터]역시 그러합니다. 분명 [바람의 파이터]에서 양윤호 감독의 시도는 좋았습니다. 최배달의 영웅적인 일면보다는 인간적인 일면을 잡으려한 그의 시도는 박수를 받을만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2% 부족한 그의 연출력이 문제가 되더군요.
가장 큰 문제는 최배달과 요우코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최배달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욱 부각시키며 너무 남성취향적인 영화의 분위기를 좀더 부드럽게 만드는데 기여한 최배달의 러브 스토리는 그러나 상당히 구태의연합니다. 마치 70년대 멜로 영화를 보는듯이 뻔하고 유치합니다. 양윤호 감독은 [화이트 발렌타인]에서도 그랬지만 러브스토리를 연출하는데에 서투릅니다. 그러한 서투름이 [바람의 파이터]에서도 이어져 이 영화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최배달을 잡아내는 영화의 연출력에도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양동근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 그나마 어색하지 않았지만 최배달의 내면적인 갈등을 잡아내는 장면들이 양동근의 연기력에만 전적으로 기댐으로써 영화가 끝나도 뭔가 부족한듯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양윤호 감독의 연출력이 뒷받침되었다면 양동근의 연기력과 맞물려 우리 관객에겐 아직 생소한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좀더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을텐데 그러지 못해 단지 잘만든 액션 영화 한편으로만 머물어 버린 것 같아 아쉽습니다.
[바람의 파이터]를 보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택시안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택시 기사 아저씨도 한몫 거들더군요. 아저씨도 [바람의 파이터]를 보았다며 최배달이라는 인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늘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곤 "이 영화 2편이 만들어지면 재미있을 겁니다."그러시더군요.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일본의 고수들을 모두 무너뜨린 최배달이 일본에선 더이상 적수가 없다면 전세계 고수들을 찾아나서 차례로 쓰려뜨린다는 군요. 만약 2편이 만들어진다면 이젠 영화의 무대는 더이상 일본이 아니라 전세계가 될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2편을 상상하며 흐뭇하게 미소지으시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우리 관객들이 이런 남성적인 액션 영화에 굶주려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불경기에 모든 역경을 헤치고 일본의 영웅으로 우뚝선 최배달의 이야기는 분명 희망이며 쾌감이었을 겁니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2편에선 양동근 대신 비가 최배달을 연기하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2편에서는 양윤호 감독이 2% 부족한 자신의 연출력을 완벽하게 채우고 정말 멋진 영화를 완성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아직 2편이 만들어질 것이 확정되지 않은 마당에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만, 만약 2편이 만들어진다면 그땐 우리 모두 인간 최배달에 열광하며 그의 신드룸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최배달은 분명 우리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인물이며, 양윤호 감독의 2% 부족한 연출력만 채워진다면 그러한 제 바램은 결코 바램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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