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보 웰치
주연 : 마이크 마이어스, 다코타 패닝, 스펜서 브레슬린, 켈리 프레스톤, 알렉 볼드윈
개봉 : 2003년 12월 31일
관람 : 2003년 12월 31일
어느새 2003년이 끝나버렸습니다. 2002년을 끝내면서도 '어느새'라는 소릴 했던 것이 엊그제같은데 또다시 1년을 흘러보내고 '어느새'라며 아쉬워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2003년은 제겐 정말 뜻깊은 한해였습니다. 아내를 맞이하고, 아이의 아빠가 되고... 아마 제 인생을 통털어 가장 중요한 일들이 벌어졌던 한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암튼 2003년을 마감하는 의미에서 2003년의 마지막날 영화를 봤습니다. 2001년부터 마치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마지막날 영화보기는 2001년엔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2002년엔 [품행제로]가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었죠. 2001년엔 한해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장엄한 대작을 봤던 것에 비하면 2002년엔 한없이 가벼운 코미디를 선택했던 겁니다. 그리고 2003년... 올해를 마무리하는 영화를 고르는 동안 한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장엄한 대작 [실미도]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한없이 가벼운 코미디 [더 캣]을 선택할 것인가?
[실미도]는 모두들 아시겠지만 세계 흥행사를 바꾸고 있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에 맞서 선전하고 있는 우리 영화의 대작입니다. 이미 개봉 첫주 우리 영화 흥행 기록은 모두 갈아 치워 버렸고, 블럭버스터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의 흥행 기록을 바짝 뒤쫓으며, 세계 그 어떤 나라에서도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상대로 이루지 못한 쾌거를 이루고 있는 중입니다. 그에 반에 [더 캣]은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가 없는 겨울 극장가에서 유일한 가족 영화로 각광을 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화려한 색체와 마이크 마이어스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는 이미 헐리우드 박스오피스 2주 연속 1위라는 쾌거를 이룩했으며, 겨울 방학을 맞이한 우리 나라에서도 가족 단위의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1순위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 상반된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던 저는 최근 제게 벌어진 머리아픈 사건들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생각에 결국 가벼운 코미디인 [더 캣]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 영화의 샐리(다코타 패닝)와 콘래드(스펜서 브레슬린)처럼 모자쓴 마법의 고양이와 함께 복잡한 이 세상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생각에 말입니다.
[더 캣]은 일단 매력적인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매력의 첫번째 원천은 보 웰치라는 감독에게서 나옵니다.
보 웰치... 이 영화가 감독 데뷔작인 이 초보 감독은 그러나 미술감독으로는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베테랑중의 베테랑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헐리우드에서 가장 독특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감독인 팀 버튼과의 작업에서 그 능력을 발휘했었습니다. [유령수업], [가위손], [배트맨 2]가 바로 팀 버튼과 보 웰치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그 외에도 블럭버스터 감독 중에서 가장 스타일을 중요시하는 감독인 베리 소넨필드의 [맨 인 블랙 1,2],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도 그의 능력은 여과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가 미술 감독을 맡은 일련의 영화들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동화같고 환타스틱하면서도 음울하고 음침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의 그러한 능력은 그의 대표작인 [배트맨 2]의 고담시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영웅과 악당이 공존하는 곳, 동화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음침함이 지배하는 고담시를 창조함으로써 보 웰치는 미국에서 가장 능력있는 미술 감독의 위치에 올라선 겁니다.
그런 보 웰치의 감독 데뷔작인 [더 캣]은 보 웰치의 이력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파스텔 칼라의 예쁜 집들이 들어선 앤빌이라는 마을은 보 웰치가 미술 감독을 맡은 영화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화같으면서도 어른들의 청결 강박증에 걸린 듯한 답답한 가지런한 질서가 공존하는 곳... 그렇기에 모자쓴 고양이의 소동극이 가장 어울리는 공간을 보 웰치 감독은 창조해 냈으며, 이러한 이 영화의 비주얼이야말로 [더 캣]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그림 동화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환상적인 화면과 그러한 환상적인 공간을 망가뜨림으로써 재미를 유도하는 모자 쓴 고양이의 활약은 이 영화가 만들어낸 가장 큰 재미중의 하나인 겁니다.
[더 캣]의 두번째 매력은 이 영화의 배우들에게서 나옵니다.
마치 [마스크]의 짐 캐리를 연상시키는 마이크 마이어스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는 관객들에게 정신을 차릴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며 영화의 재미를 이끌어 냅니다. 물론 그의 연기에서 간혹 [오스틴 파워]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분명한것은 짐 캐리가 자꾸 코미디 연기에서 진지한 연기로의 외도를 시도하는 요즘 이러한 원맨쇼 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마이크 마이어스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로빈 윌리암스의 이름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마이크 마이어스에게 가족 영화의 히어로를 넘겨줄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마이크 마이어스가 원맨쇼 연기를 하는 동안 두 아역 배우인 다코타 패닝과 스펜서 브레슬린의 연기도 영화의 재미에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이미 [아이 엠 샘]에서 천재 배우의 칭호를 얻고 있는 다코타 패닝은 [더 캣]에서 새침떼기 어린 소녀 샐리역을 맡아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키드]에서 브르스 윌리스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던 스펜서 브레들리 역시 말썽쟁이 콘래드역을 맡아 도저히 아역 배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해냅니다.
그 외에도 이 영화에서 철저히 망가진 연기를 펼친 예전의 꽃미남 알렉 볼드윈을 감상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입니다. 특히 볼룩한 똥배를 내놓고 트림을 해대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가 과연 [붉은 10월]에서 숀 코네리의 카리스마에 맞서 영화의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했던 배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보 웰치가 창조해낸 화려한 화면과 배우들의 적재적소의 연기로 관객들에게 매력을 한아름 안겨줍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가진 매력만큼 이 영화는 재미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매력은 있는데 재미는 없다니...
[더 캣]이 재미없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스토리가 단순하고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류의 소동극에서 특별한 스토리를 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를 이끌어나갈 이야깃거리는 있었어야 했습니다.
이 영화는 모자쓴 고양이 더 캣이 샐리와 콘래드라는 말썽꾸러기 아이앞에 갑자기 나타나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소동을 일으키고 아이들이 잘못을 뉘우치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속에 보 웰치의 환상적인 화면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마이크 마이어스의 원맨쇼와 배우들의 매력넘치는 연기로 영화를 진행시킵니다. 하지만 보 웰치 감독은 이 와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이 보입니다. 그것은 관객을 사로잡을 스토리인 겁니다.
마이크 마이어스의 원맨쇼가 진행되는 순간 저는 계속 뭔가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화면이 펼쳐지는 동안에도 저는 뭔가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러닝타임이 고작 85분(사실 실재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은 85분도 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이라는 사실은 영화가 끝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허전함을 안깁니다.
물론 이 영화는 가족 영화입니다. 한마디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거죠. 이 영화의 원작 역시 아이들의 교과서용으로 쓰여진 동화이기에 이 영화에게 어른 관객을 사로잡을 영화적인 재미를 바랬던 것은 애초에 무리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작비가 9천만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 블럭버스터인 이상 이 영화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을 들어설 어른 관객까지 염두에 두었어야 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고작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마이크 마이어스의 그 수다스러운 원맨쇼뿐이라는 것은 보 웰치 감독이 너무 비주얼과 아이 관객의 눈높이에만 신경을 쓴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것이 이 영화가 매력적이지만 재미는 없는 이유입니다. 충분히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 매력을 영화적인 재미로 바꾸지 못한 보 웰치의 미숙한 연출력이 아쉬울 뿐입니다. 하긴 감독으로써의 보 웰치는 아직 초보에 불과하니 조금 더 그를 믿고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언젠가 보 웰치가 영화적 매력을 영화적 재미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깨닫게 되는 그날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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