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찬욱
주연 :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
개봉 : 2003년 11월 21일
관람 : 2003년 11월 27일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과연 자신이 정말로 잘 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몇명이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직업으로 삼으며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아닌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을 할때 느껴지는 성취감보다는 짜증만이 날로 심해지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집어치울려고 결심할때마다 망설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제 제 직업이 저 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 모두의 생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시작하려면 좀더 젊었을때 시작했어야 했음을... 이렇게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음에야 깨닫게 되다니 정말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에 대한 스트레스보다 더욱 저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입니다. 고등학교때인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배웠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며 느낄 수 밖에 없는 스트레스를 꾹꾹 참으며 살아야만 한다는 의미인줄은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습니다. 사회 생활을 하려면 저와 성격이 맞지않는 그런 사람과도 겉으로는 웃으며 잘 지내야만 하는 것을...
오늘도 저는 일에 대해게 스트레스를 받고, 사람으로인하여 스트레스가 극도로 높아지며 그렇게 화를 꾹꾹 참고 있습니다. 생각속으로는 일을 멋지게 때려치우고 제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을 죽도록 때려주는 상상을 하지만 현실은 그저 모든 것을 꾹꾹 참는 소심한 가장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샐러리맨의 삶은 고달픈가 봅니다. 이런 고달픔을 잠시라도 잊고자 구피와 함께 [올드보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가끔 영화속의 주인공들은 현실의 저보다 더욱 끔찍한 삶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올드보이]의 두 주인공 오대수(최민식)와 이우진(유지태)도 그러하죠. 그러한 불행한 영화속의 주인공들을 보며 그래도 내 삶은 행복하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러고보면 저도 참 낙천적인 샐러리맨인가 봅니다. ^^;
1.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모자란 2%를 채우다.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로 유명한 감독입니다. 하지만 [공동경비구역 JSA]의 엄청난 성공이후 그가 선택한 영화는 바로 하드 보일드라는 생소한 장르의 영화인 [복수는 나의 것]였습니다.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가 열연을 펼친 [복수는 나의 것]은 분명 우리 영화에선 드문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를 구축한 걸작이기는 하지만 왠지 제겐 2% 부족해 보였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 제게 약간 부족했던 것은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로 이어지는 이 영화의 황금 배우진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연기력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송강호가 가장 아쉬웠었습니다. 그가 [복수는 나의 것]에 출연하기 전의 영화들은 [넘버 3], [조용한 가족], [반칙왕] 등 거의 대부분 코미디 영화입니다. 물론 [쉬리]라는 액션 블럭버스터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쉬리]에서의 송강호는 그의 연기 인생에서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주목 받지 못했었죠. 이렇게 코미디에 주로 출연하며 이미지를 쌓았던 그가 갑자기 딸의 죽음앞에서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는 동진역을 맡은 겁니다. 물론 송강호의 연기력이라면 동진이라는 캐릭터를 무난히 연기할만 했지만 문제는 송강호의 연기력이 아닌 송강호라는 배우의 이미지였습니다.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에서 주연 배우의 이미지가 코믹하다는 것은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일 수 밖에 없었죠. 그것이 결국 우리 영화에 하드 보일드라는 생소한 장르를 구축한 걸작 [복수는 나의 것]의 최대 아쉬움이었습니다.
신하균과 배두나도 아쉽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신하균의 그 순진하고 착한 이미지는 영화의 초반엔 류와 완벽하게 어울리더니 누나의 죽음이후 류의 캐릭터 성격이 급변하면서 트러블이 생깁니다. 배두나가 맡은 영미라는 캐릭터도 왠지 하드 보일드라는 영화의 장르와 어울리지 못했으며 그만큼 배두나의 연기력은 충분히 영화속에 반영되지 못한 아쉬운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대와는 달리 [복수는 나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최대 화제였던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라는 화려한 출연 배우들로 인하여 오히려 제게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박찬욱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과 연장선상에 있는 [올드보이]를 연출합니다.
[올드보이] 역시 분명 하드 보일드에 속할 영화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복수라는 테마를 통해서 하드 보일드를 완성한 이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해 표현 수위는 오히려 낮아진 느낌이지만 표현 수위가 낮아졌다고 해서 이 영화의 하드 보일드적인 완성도마저도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약간 모자랐던 부분들을 100% 채워주며 박찬욱적인 하드 보일드 영화의 진정한 완성을 이루어 냅니다.
2. 모든 것은 최민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복수는 나의 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연기파 배우인 송강호로 인하여 오히려 실망스러웠다면, [올드보이]는 최민식을 선택함으로써 [복수는 나의 것]의 아쉬웠던 부분을 채워주는 쾌거를 이룩합니다.
[쉬리]에서 한석규, 송강호와 함께 출연했던 최민식은 영화속 악역에 불과했던 박무영을 완벽하게 연기함으로써 주인공이었던 한석규보다, 한참 연기파 배우로 뜨고 있던 송강호보다 더욱 강렬하게 관객에게 각인되었습니다. 결국 코미디 배우로써의 이미지가 굳어진 송강호보다는 [넘버 3], [조용한 가족], [해피엔드], [파이란], [취화선]등 코미디 영화뿐만 아니라 멜로, 역사극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기를 선보였던 최민식이 하드 보일드라는 낯선 장르의 주인공으로는 적합했던 겁니다.
그러한 최민식의 진가는 영화의 오프닝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술에 취하여 사소한 다툼으로 파출소에 오게된 보통 남자 오대수를 연기하는 최민식의 모습은 그야말로 원맨쇼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초반부터 영화의 분위기를 휘어잡습니다. 최민식의 진가는 그 이후에도 더욱 빛을 발합니다. 15년동안 이유도 알지 못하고 낯선 곳에 감금되었던 오대수의 모습을 연기하는 장면에선 최민식의 그 카멜레온같은 표정과 연기만으로도 관객들은 단 몇십분의 장면으로 1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15년간의 감금이 풀려나 복수를 결심하고부터는 최민식의 다양한 연기 경력이 도움이 됩니다. 복수를 결심할 때엔 [쉬리]의 박무영과 같은 카리스마가 느껴지더니, 미도와 안타까운 사랑을 나눌때는 [파이란]의 이강재가 느껴졌으며, 마지막에 이우진과의 비밀을 알고 오열을 할때는 [해피엔드]의 서민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최민식의 다양한 연기 경력은 [올드보이]에 이르러서 완벽하게 관객의 공감을 자아냈으며 관객들은 최민식의 연기에 감정이 이입되어 어떨땐 복수심에 불타는 박무영이 되고, 어떨땐 달콤한 사랑에 안주하고 싶은 이강재가 되며, 어떨땐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을 떠안은 서민기가 됩니다.
물론 유지태의 예상밖의 호연과 강혜정이라는 새로운 여배우의 발견도 이 영화의 커다란 성과이기는 하지만 만약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없었다면 그래서 송강호가 오대수를 맡았다면 아마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잘 만들어졌지만 왠지 2%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다고해서 송강호의 연기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과 같이 송강호의 연기는 아직 코미디가 어느정도 가미된 영화에서 더 빛을 발한다는 사실은 어쩔수없는 사실일 겁니다.)
3. 박찬욱의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올드보이]에 이르기까지 박찬욱 감독은 복수의 무미건조함을 추구합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를 하면 할수록 비극적인 파경의 늪속으로 점차 빠져들어갔던 주인공들처럼... [올드보이]의 주인공들 역시 복수를 이루어내면 낼수록 오히려 견딜수없는 비밀의 무게에 짓눌립니다.
하지만 복수의 허무함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 어쩔수없는 인연의 실타래속에서 얽히고 설힌 주인공들의 무미건조한 복수담을 묵묵히 지켜본다면 [올드보이]는 적극적으로 관객들에게 게임을 제시합니다.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15년동안이나 가두어 놓았을까?'에서부터 시작된 영화와 관객과의 게임은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5일간의 시간만을 허락함으로써 제한된 시간의 게임이라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취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게임은 '왜 이우진이 오대수를 15년동안 가두었을까?'가 아닙니다. 박찬욱 감독은 관객에게 잘못된 질문을 던짐으로써 관객을 혼동시키고 결국 승리를 쟁취합니다. (저도 깜박 속을뻔 했습니다.) 하지만 오대수가 이우진에게 던져야할 제대로된 질문만 찾아낸다면 이 영화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 그리 불가능한 것도 아니죠. 이렇듯 관객들은 박찬욱 감독이 던져놓은 게임에 몰두하며 영화속에 몰입하게 됩니다.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이 영화는 결국 평단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기대할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복수는 나의 것]의 실패(?)를 통해 박찬욱 감독이 획득한 경험에 의한 겁니다.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이 어떤 영화일런지는 모르지만 박찬욱 감독은 하드 보일드라는 낯선 장르에서조차 관객과 소통하는 법을 [올드보이]를 통해 완벽하게 터득한 듯이 보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흥행 신화는 이제부터 시작인 셈입니다.
4. 스포일러만은 되지 말자.
솔직히 이렇게 반전을 모티브로 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때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어떻게 마지막 반전을 밝히지 않고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인가 입니다. 결국 반전에 대한 영화의 경우 영화의 재미가 대부분 마지막 반전에 포인트를 맞추기 때문에 그 반전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땐 제목에 아예 '스포일러 포함'이라고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최소한 스포일러만은 되지 말자는 생각에 최대한 스포일러를 자제하며 글을 쓰게 됩니다. (제가 스포일러로 인하여 본 피해를 생각한다면... -.-)
솔직히 [올드보이]는 제 관점에서보면 반전을 위한 영화는 아닙니다. 물론 마지막 반전이 영화의 재미를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지만 [식스센스],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마지막 반전에 영화의 모든 재미를 거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관객이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충분히 충격적인 이 영화의 반전은 아직도 제 입을 근질근질거리게 만드는 군요. 하지만 전 오늘도 '스포일러만은 되지 말자'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제 입을 단속하고 있답니다. 특히 이렇게 잘만들어진 영화의 경우 다른 관객들도 영화의 재미를 제대로 즐기게 하기 위해 스포일러를 더욱 자제해야죠. ^^
IP Address : 218.39.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