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가스파 노에
주연 : 모니카 벨루치, 뱅상 카셀
개봉 : 2003년 4월 4일
1. [돌이킬 수 없는]과 처음 만나다.
불과 몇달전 시간이 남아돌아서 닥치는대로 영화를 다운받으며 하루종일 영화만 봤었습니다. 그땐 애니메이션도 좋았고, 아주 오래된 영화들도 괜찮았습니다. 그냥 영화면 무조건 좋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도 그때 만났습니다.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주인공은 누구이고 감독은 누구인지, 그때는 그러한 것들이 제 영화 감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었습니다.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지루한 제 일상에서 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영화뿐이라고 믿었기에 저는 영화에 점점 집착했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왠지 도발적인 제목의 이 영화를 다운받은 저는 언제나처럼 곧바로 영화를 플레이를 시켰습니다. 하지만 영화 시작 10분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저는 이 영화를 보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영상이 충격적이거나 내용이 엽기적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시종일관 빙글빙글 돌려대는 카메라의 그 현란함이 어지러웠고, 낮게 깔리는 배경 음악이 기분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도 몇번씩 볼 영화가 없을때마다 이 영화를 보려고 시도했었지만 매번 실패했습니다. 그땐 영화속에서 행복을 찾고 싶었기에 굳이 어지러움증을 참으며 이 영화를 볼 아무런 이유가 제겐 없었습니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은 제 컴퓨터의 한쪽 공간을 차지한채 오랫동안 제 기억속에서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2. 모니카 벨루치의 주연작임을 알게 되다.
제게 해외 여배우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어김없이 '모니카 벨루치'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물론 그녀는 다른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처럼 일반 관객들에게 그리 쉽게 알려진 배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최근에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브루스 윌리스와 [태양의 눈물]을 찍는 등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 여름 블럭버스터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화제작인 [매트릭스 2]에도 출연한다니 조만간 헐리우드의 인기 배우로 우뚝 선 그녀를 만날 수 있겠군요.
[라빠르망]에서 보여줬던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완벽한 외모... [도베르만]에서 보여줬던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며 연기력을 향상시킬 줄 아는 그 당당한 용기... 그리고 [말레나]에서 절 한없이 안타깝게 만들었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그 가녀린 여인의 모습까지... 모니카 벨루치는 출연하는 영화마다 저를 현혹시키며 자신의 이름을 헐리우드의 그 유명한 배우들의 이름보다도 더 위에 제 마음속에 새겨놓았습니다.
이렇게 모니카 벨루치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제게있어서 어느날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근 출연작이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이 영화에 그녀가 출연했다고???' 당연히 저는 그 사실을 알게되자마자 다시한번 컴퓨터 앞에 앉아 오랫동안 하드의 한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돌이킬 수 없는]을 다시한번 끄집어 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영화를 볼 생각은 안하고 모니카 벨루치를 찾아 헤맸습니다.
영화의 초반쯤에 지하 도로에서 한 여인이 처참하게 강간당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그 강간당하는 여인이 모니카 벨루치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채 '이 영화, 계속 메스껍게 나가는 구나'라는 생각만 하고 다시 영화보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때 저는 [늑대의 후예들]에서 거의 단역에 가까웠던 모니카 벨루치의 역할을 생각하며 [돌이킬 수 없는]에서도 모니카 벨루치는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었을 것이라고 내 맘대로 단정을 지었습니다.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내 스스로 그러한 어처구니 없는 단정을 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3. [돌이킬 수 없는]의 개봉 소식을 듣다.
요즘은 예전과 다르게 개봉작 위주로 영화 감상을 하며 너무나도 촉박한 제 시간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의 개봉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잊혀졌던 [돌이킬 수 없는]에 대한 호기심이 되살아 나고야 말았습니다.
이 영화의 개봉 소식과 함께 여러 영화 사이트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자세한 영화 정보를 제공하였고, 그제서야 [돌이킬 수 없는]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저는 이 영화가 획득한 깐느 영화제에서의 화제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폭력의 부당함을 설명하기위해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가스파 노에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관객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충격을 받기를 나는 원하다'라는 다분히 공격적인 인터뷰를 했으며, 실제 부부이기도 한 모니카 벨루치가 지하도로에서 당하는 강간 장면이 실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다분히 상업적인 멘트들도 서슴치않고 등장했습니다. 그 중에서 제 이목을 가장 끈 것은 실제 부부인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가 영화의 후반부에 아름다운 나체를 자랑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가 좋아하는 여배우의 나체를 본다는 것은 제게 상당한 흥분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은 이 영화의 화제성과 작품성, 그리고 선정성에 대한 호기심까지 덧붙여져 저는 다시한번 [돌이킬 수 없는]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다져먹고...
4. 결국 [돌이킬 수 없는]을 보고 말다.
깐느 영화제 상영당시 2500여명의 관객들중 10%에 해당하는 250여명의 관객들이 중도에 퇴장하였고, 그중 일부는 구토, 졸도 증세를 보였다는 이 영화는 일단 영화의 초반부를 보면 그러한 관객들의 행위가 오버는 아닌 듯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초반은 마치 '이래도 계속 영화를 보고 앉아있을래?'라고 일부러 공격적으로 관객들을 몰아부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카메라는 쉴새없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어두컴컴한 화면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음파의 음악은 쉴새없이 정상적인 영화 감상을 괴롭히고, 소화기로 사람의 얼굴을 부셔버리는 장면에 이르르면 도대체 이 영화가 왜 이렇게까지 관객을 괴롭히는 것인지 알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영화는 점차 시간의 역순으로 영화를 되돌리며 사건의 진상을 설명합니다. 그 곳엔 무참하게 강간당하고 짓밟힌 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이성을 잃어버린 한 가련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한때 너무나도 행복했던 이 두 부부의 일상을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의 나체로 표현합니다.
결국 이 영화를 연출한 가스파 노에 감독의 의도는 확실해 보입니다.(가스파 노에 감독의 그 공격적인 인터뷰 기사를 읽지 않더라도...) 영화 초반을 의도적으로 메스껍게 표현함으로써 영화 후반에 표현될 이 행복한 부부의 일상과 배치시킨 후에 폭력이 가져다준 폐해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임이 분명합니다.
영화는 점차 전반부의 그 지옥같은 씬들에서 벗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복한 일상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 부부의 불행한 미래를 알고 있기에 그들의 행복을 너무나도 안타깝게 바라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가스파 노에 감독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영화적인 성취를 얻은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5. 만약 내가 이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관객들이 폭력을 받아들이거나 그 반대로 무조건 외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성폭행과 살인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난 후 그런 폭력적인 장면은 당신의 뇌리에서 지워버려도 좋다. 다만 그 순간의 공포만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스파 노에가 한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연출 의도입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의 초반 역겨운 장면들을 통해서 폭력의 부당함을 표현하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 영화의 이러한 표현력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초반을 장식하는 역겨움이 폭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카메라의 역동적인 흔들림과 구토를 유발한다는 저주파 음영의 음악을 사용으로 인한 기술적인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스파 노에 감독이 폭력의 부당함을 관객에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면 그는 그러한 기술적인 테크닉으로 역겨움을 유발시키지 말고 순수하게 폭력만으로 역겨움을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 역시도 제가 보기엔 그리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네요.
만약 제가 이 영화를 만든다면???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상상이란 것은 아차피 자유로운 것이니... ^^;
저라면 이 영화를 시간의 역순으로 찍지 않을 겁니다. 역겨운 장면으로 시작하여 점차 행복한 장면으로 전환되는 이 영화에는 한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반의 역겨운 장면들이 너무나도 강렬하여 후반의 행복한 장면들까지도 역겨움에 파묻힌다는 겁니다. 마르쿠스(뱅상 카셀)와 그의 친구가 벌이는 지하철에서의 언쟁이 그렇습니다. 이 장면은 분명 몇시간후면 불행한 시간에 빠져야만 하는 마르쿠스 부부의 유쾌한 일상을 표현하는 장면이었을텐데... 영화 초반의 역겨운 장면들을 보고난후에 이어지는 장면인지라 이 쉴새없이 쏟아지는 그들의 수다는 유쾌하기보다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것은 아마 영화 초반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그러한 초반의 여파는 너무나도 행복하게 느껴져야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후분부에 관객들이 느껴야할 행복은 (그럼으로써 영화 전반부와 극렬하게 대치되어야 할 행복은) 이미 전반부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 역할을 다할 정도로 충분히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영화의 시간의 역순이 아닌 시간순으로 재배치를 한다면... 그래서 관객들에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행복감을 안겨준후에 점차 후반부에 가서 불행속으로 빠뜨린다면... 그런다면 전반부의 행복감에 도취된 관객들은 후반부에 가서 더욱 충격스러운 불행에 빠뜨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빠지는 불행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일테니 말입니다. 만약 저라면 그랬을 겁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내 뜻대로 만들어지지 않을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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