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안톤 후쿠아
주연 : 브루스 윌리스, 모니카 벨루치
개봉 : 2003년 4월 4일
제 영화 이야기를 꾸준히 읽으신 분이라면 제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영화 장르가 전쟁 영화라는 사실쯤은 알고 계실 겁니다. 눈썰미가 좋으신 분이라면 전쟁 영화를 그토록 싫어하는 제가 국내에 개봉되는 전쟁 영화를 꾸준히 보고 있으며, 영화를 본 후엔 한결같이 '난 이래서 전쟁 영화가 싫다'라는 글만 되풀이해서 쓰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전쟁 영화를 끔찍히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국내에 개봉되는 전쟁 영화는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 봤으며(물론 극장에서 보지는 않습니다만...) 그러한 전쟁 영화들은 한결같이 저를 실망시켰었습니다. 그리곤 항상 결심을 하죠. 다시는 전쟁 영화를 안보겠다고... 그런데 또다시 전쟁 영화를 보고 말았습니다.
사실 [태양의 눈물]의 개봉 소식을 들었을때 저는 이 영화를 볼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태양의 눈물]이 전쟁 영화라는 사실에도 큰 몫을 차지했지만 무엇보다도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을 맡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게다가 제목이 '태양의 눈물'이라니... 그 사실만으로도 저는 이 영화가 헐리우드의 뻔한 영웅주의 전쟁 영화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헐리우드의 그 뻔뻔함을 보고있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영화 한편을 보는 것이 제겐 휠씬 유익하게 보였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모니카 벨루치라는 여배우의 존재였습니다. 외국의 여배우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모니카 벨루치... 지금까지 그녀는 유럽 배우인 까닭에 국내 극장에선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다릅니다. 이미 깐느 영화제에서 화제를 불러모았던 [돌이킬 수 없는]이 개봉되어 모니카 벨루치의 그 눈부신 나신이 공개되었으며(물론 그 눈부신 나신 이전에는 끔찍한 강간씬도 있었지만...) 썸머 시즌이 되면 모니카 벨루치와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의 만남인 [매트릭스 2]가 개봉됩니다. [태양의 눈물]은 유럽의 개성 짙은 작가 주의적인 영화에서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로 활동 반경을 넓힌 모니카 벨루치의 중간역인 셈입니다. 저는 전쟁 영화도 싫고, 브루스 윌리스가 나오는 전쟁 영화는 더욱 싫으며, '태양의 눈물'이라며 노골적으로 영웅주의와 감성주의를 살짝 건드리는 제목을 가진 전쟁 영화는 더더욱 싫습니다. 하지만 모니카 벨루치라는 여배우의 존재는 그 모든 것들을 감싸버릴 수 있을 정도로 좋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는 영화 볼 시간도 없어서 보고 싶은 영화들이 컴퓨터 속에서 쌓여가는 이 안타까운 순간에 졸리운 눈을 비비며 결국 [태양의 눈물]를 보고 말았습니다.
[태양의 눈물]을 보기전에 저는 이 영화만큼은 전쟁 영화에 대한 제 악감정을 그냥 잠시동안이라도 잊어버리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냥 이 영화를 전쟁 영화가 아닌 단순한 액션 영화로 보며, 모니카 벨루치가 과연 헐리우드의 규모 큰 영화와 어울릴지 지켜보자는 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다른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와는 달리 조금은 우호적인 자세로 처음부터 [태양의 눈물]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생각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무너졌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 영화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도 철저하게 영웅주의적인 전쟁 영화의 티를 팍팍 내더군요. 다행스럽게 바람에 나부끼는 성조기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세계의 평화는 미국만이 지킬 수 있다는 미국의 오만함이 영화에 가득히 묻어 났습니다. 영화를 보는내내 영화속의 영웅주의를 애써 외면하고 모니카 벨루치만 바라보려 여러번 시도를 했지만 그 시도는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헐리우드 전쟁 영화라는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이 영화의 장르는 모니카 벨루치라는 제겐 너무나도 아름다운 배우의 매력마저도 앗아가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너무나도 혐오스러워서 깐느 영화제 상영 당시 수많은 관객들이 중도에 퇴장하고 심지어는 졸도까지 했다는 그 악명높은 영화를 보았을 때조차 모니카 벨루치는 보석처럼 빛이 났었건만,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흑인 아이를 안고 숭고한 박애주의자적인 모습을 하며 백인 병사들에게 영웅이 될 것을 종용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예전 영화의 그 찬란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여느 영웅주의적인 영화에서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영웅의 부속물이라는 짜증스러운 모습만을 되풀이하며 보여줬습니다. 도대체 전쟁 영화가 뭐길래 나에게 모니카 벨루치의 매력마저 빼앗아 가는 것인지...
우선 이 영화를 보는내내 제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라크전이라는 현실의 전쟁이었습니다. 저는 시사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해'라며 벌인 이라크와의 전쟁은 제 생활에 아주 당연한 듯이 보이는 평화가 언제든지 미국이라는 나라에 의해서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왔습니다.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 세계의 여론이 이라크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 여론을 무시한채 이라크와의 전쟁을 벌였고, 결국은 무력으로 그 나라를 폐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라크라는 나라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그 나라에 대해서 별로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라크의 독재자인 후세인을 응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의 독립국을 그렇게 무참하게 밟아버리는 미국의 그 무력은 언제 우리나라도 미국의 비위를 거슬리면 이라크와 같은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이러한 걱정에 많은 분들이 '에이, 설마 그래도 미국은 우리의 우방국인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미국은 언제든지 힘없는 국가를 짓밟을만한 위험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우리나라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미국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번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며 결국 전쟁이라는 것이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승자와 패자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미국은 결코 선이 아니고 이라크 역시 악이 아닙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도 아닙니다.) 단지 미국은 승자이며, 이라크는 패자일 뿐입니다. 결국 전쟁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쓰여지게 될 것이며 패자는 억울해도 아무말도 못하고 묵묵히 악이 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에는 악을 처형하는 영웅 따위는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죽음에 직면한 가엾은 사람들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자들을 죽이는 것 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비정한 권력층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전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 영화들은 대부분 철저하게 선과 악을 구분지어 놓고 승자의 입장에서 전쟁의 당위성을 말하려 합니다. '그들이 그러그러한 짓을 저질렀기에 우리가 그들을 죽이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라고 끊임없이 자기 변명을 합니다. 관객들은 패자의 악한 모습과 승자의 선한 모습만을 보기에 그러한 영화의 자기 변명을 아주 쉽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러한 자기 변명은 결국 끔찍한 살인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지 않은 겁니다.
다시 [태양의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최근의 헐리우드 전쟁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뻔뻔스럽게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영화입니다.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의 당위성을 위해서 후세인 일가가 1980년대 저질렀다는 쿠르드족 대학살을 통한 인종 청소를 내세운 것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에서 나이지리아의 쿠데타군이 나이지리아내의 소수 민족에 대한 인종 학살을 저지른다는 설정은 아주 시기적절하게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호처럼 보입니다.
분명 이 영화에서 표현되고 있는 인종 청소는 정말로 끔찍합니다. 아무 죄없는 사람들을 향해 저지르는 쿠데타군의 그 끔찍한 행위는 관객에게 워터스(브루스 윌리스)가 보복을 해줄 것을 원하게끔 만듭니다. 결국 나이지리아내의 미국인 수송이라는 임무를 띠었던 워터스는 나이지리아에서 행해지는 인종청소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멋진 영웅으로 돌변합니다. 게다가 영리하기도 한 이 영화는 예전의 '람보'와 같은 슈퍼 영웅이 이젠 통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당히 미국 군인들을 전사시킴으로써 관객의 감성을 자극시키고, 워터스에게도 총상을 입힘으로써 관객들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분명 이 영화를 보며 미국인 관객들은 자신의 아들들이 낯선 땅의 전쟁터에서 정의를 지키기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음을 상기하며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렇게 선과 악이 확연히 구분되고, 악은 죽어 마땅한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일 뿐이겠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미국인 병사들을 죽음의 전쟁 속에 몰아넣은 것은 악의 축인 이라크가 아닌 그들의 손으로 투표하여 뽑은 자신들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라크가 쿠르드 족에 대한 학살을 벌인 악이라면 미국 역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고 아무 죄없는 선량한 대다수의 이라크인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철저하게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가슴 찡한 영웅담으로 관객들을 현혹시킵니다. 물론 영화가 현실과 같아야 하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합법적으로 대량 살상을 저지를 수 있는 전쟁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영화로 하는 만큼 영화의 표현은 다른 장르의 영화보다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는 신중하기는 커녕 오히려 다른 장르의 영화보다 더 현실을 왜곡시키고, 사실을 은폐시킵니다. 그것이 제가 결코 전쟁 영화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결국 모니카 벨루치를 보기 위해 보게 된 이 영화는 전쟁 영화에 대한 혐오감만 증폭시킨채 제 아까운 시간을 빼앗게 만든 원동력 역할을 한 모니카 벨루치만은 원망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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