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마크 스티븐 존슨
주연 : 벤 애플렉, 제니퍼 가너, 마이클 클라크 던컨, 콜린 파렐
개봉 : 2003년 3월 21일
지난 3월 1일에 본 [국화꽃 향기] 이후 무려 3주간이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못했던 저는 정말로 극장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게으른 저대신에 결혼 준비하느라 눈코 쉴새없이 바쁜 그녀에게 한가하게 영화보러가자는 이야기도 못하겠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던 어느날... 그녀가 제게 [데어데블]이라는 영화가 보고 싶다고 그러더군요. 저보다도 더 헐리우드의 화려한 블럭버스터를 좋아하는 그녀. 결국 화려한 특수효과가 눈에 띄는 [데어데블]에 feel이 꽂혀버린 겁니다. 그녀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저는 얼른 [데어데블]을 예매했습니다.
3월 22일 토요일 오후... 그녀와 함께 오랜만에 간 대한 극장은 정말 너무나도 그리운 고향에 온 것처럼 절 설레이게 만들더군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가 몸에 느껴지고, 방금 개봉된 따끈따끈한 영화들이 관객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곳. 제가 그토록 목말라하던 극장에 결국 그렇게 가게 된 겁니다.
그렇기에 그날 본 [데어데블]이라는 영화는 특수효과만 난무하고, 스토리는 없는 너무나도 뻔한 헐리우드의 블럭버스터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극장에 대한 목마름때문인지 제겐 산당히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쓰레기같은 영화'라는 일부 네티즌들의 극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저는 [데어데블]을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를 한다면 모든 영화가 전부 재미있으려나??? ^^;
[데어데블]은 마블 코믹스의 만화를 영화로 한 블럭버스터입니다. 모두들 아실테지만 마블 코믹스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스폰], [블레이드], [엑스맨], [스파이더맨] 등이 있었으며, 올해엔 [데어데블]을 비롯하여 [엑스맨 2]와 [헐크] 등 마블 코믹스의 만화들이 연달아 영화화됨으로써 마블 코믹스는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슈퍼 영웅인 [슈퍼맨]과 [배트맨]은 마블 코믹스의 라이벌인 DC 코믹스의 작품이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가 같은 곳인줄 알았었습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DC 코믹스는 [배트맨과 로빈]의 실패이후 슈퍼 영웅의 자리를 마블 코믹스에게 물려주고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DC 코믹스의 영웅인 [슈퍼맨]이 처음으로 영화화되었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국제 사회는 냉전의 시대였으며, 이 불안한 시대에 살던 미국인들은 악당을 무찔러줄 영웅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관객들의 욕구에 맞춰 등장한 영웅이 바로 '슈퍼맨'입니다. '슈퍼맨'은 외계에서 온 불멸의 슈퍼 영웅으로 인간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영웅에 목말라했던 관객들에게 일방적인 환호를 받았습니다. 결국 '슈퍼맨'은 냉전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80년대 후반까지 4편의 시리즈를 개봉시키며 장수했고, 대표적인 미국적 영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DC 코믹스의 단순한 영웅담은 팀 버튼에 의해서 1989년에 만들어진 [배트맨]에 이르러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배트맨'은 '슈퍼맨'과는 달리 약점을 너무나도 많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어렸을때 살해당한 부모님에 대한 불우한 기억을 간직한채 어두운 면을 내면에 숨기고, 낮에는 백만장자 사업가로... 밤에는 악을 처치하는 음울한 영웅으로 활동하는 그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에 감탄하였었습니다. ([배트맨]은 그해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애나 존스 - 최후의 성전]을 물리치고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오르는 이면을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에 비해서 시대 감각이 현저히 떨어지는 헐리우드의 제작자들은 '배트맨'이 '슈퍼맨'과 같은 무적의 영웅이길 원했으며, 결국 팀 버튼이 창조해낸 이 음울한 영웅은 [배트맨 2]와 더불어 사라지고, [배트맨 포에버]에서부터는 조엘 슈마허의 다분히 블럭버스터다운 단순한 영웅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배트맨'은 더이상 음울하지 않았으며, 배트걸과 로빈 등 식구를 대폭 늘리며, 가벼운 농담도 서슴치 않고 해대는 유머감각이 넘치는 영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DC 코믹스의 주인공들이 헐리우드의 영웅 자리를 마블 코믹스의 주인공들에게 넘겨준 것은 조엘 슈마허 감독의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으로 DC 코믹스의 영웅인 '배트맨'이 원래의 모습을 잃고, 헐리우드의 멍청한 영웅으로 변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로 화려하고 유쾌한 블럭버스터로 재탄생한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이 결국 팀 버튼의 음울한 영웅담인 [배트맨]과 [배트맨 2]의 흥행을 넘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암튼 '배트맨'의 몰락과 함께 등장한 것이 마블 코믹스의 영웅인 [스폰]입니다. 아니 어쩌면 '스폰'은 영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새로운 영웅인 '스폰'은 복수를 위해서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폰]은 빈약한 스토리와 그에 비해서 과잉된 특수효과로 인하여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며 '스토리는 없고, 특수효과만 있는 멍청한 영화'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영웅이 아닌 영웅의 이야기 [스폰]은 마블 코믹스의 가능성을 충분히 입증시킨 영화였습니다.
[스폰]과 같은 해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블레이드] 역시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아인 '블레이드'를 영웅으로 내세움으로써 '슈퍼맨'과 같은 완벽한 영웅과는 거리가 먼 영웅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블레이드] 역시 테크노적인 액션에 치중하는 바람에 '블레이드'의 이러한 이중적인 고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뱀파이어이면서 뱀파이어에 대한 증오 때문에 동족 살해를 일삼는 이 모순 투성이의 영웅은 마블 코믹스가 추구하는 영웅의 한 단면을 보여줬습니다.
마블 코믹스의 성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새천년에 들어선 2000년에서야 가능해 집니다. 그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엑스맨]입니다. 브라이언 싱어라는 걸쭉한 감독을 만난 [엑스맨]은 [스폰]보다 더욱 이상한 영웅담입니다. [스폰]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적인 나약한 영웅을 그리고 있다면, [엑스맨]은 인간의 두려움의 대상인 돌연변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이 돌연변이들은 자신이 영웅으로 우뚝 서야할 인간들에게서 멸시와 두려움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악당이 아닌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보통의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엑스맨]은 기본적으로 영웅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의 영웅 이야기입니다. 영웅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의 영웅담... 이 기묘한 영웅담은 올해 개봉될 [엑스맨 2]에서 본격적으로 인간과 영웅의 싸움이 진행될듯이 보이니 헐리우드의 변화된 영웅담을 지켜보기위해선 [엑스맨 2]가 좋은 역할을 할 듯이 보입니다.
2002년에 개봉되어 흥행한 [스파이더맨]의 경우는 [엑스맨]보다는 그 강도가 조금은 약하지만 그 역시도 나약한 인간이며, 동시에 거미에게 물려 후천적으로 초능력을 물려받은 돌연변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다른 마블 코믹스의 동료들에 비해서 착실하게 영웅 노릇을 해나갔지만, 영웅이 되기전엔 많은 유혹속에서 방황도 해야했으며, 영웅이 됨으로써 지어야 할 책임감의 무게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3편과 4편의...)과 같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냥 영웅 역할만 하던 DC 코믹스의 영웅들과는 기본적으로 달랐던 겁니다.
올해 개봉되는 [헐크]의 경우 아직 영화의 뚜껑을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마블 코믹스의 다른 영웅들과 그 위치가 비슷합니다. 자신의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자신과는 또다른 얼굴인 헐크로 변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번지르한 영웅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스폰]이 '파우스트'를 차용했다면 [헐크]는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차용한 인간의 전혀 다른 내면을 그린 조금은 철학적인 영웅담인 겁니다.
이렇듯 마블 코믹스의 영웅들은 무언가 헛점을 한가지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헛점 투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군요. 그들은 다른 헐리우드의 영웅처럼 멋있지도 않으며, 용감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헛점으로 인하여 불안한 내면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영웅 노릇을 하면서도 영웅에게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책임감과 그에따른 고통에 괴로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블 코믹스적인 영웅담은 [데어데블]에서도 이어집니다.
[데어데블]의 주인공 매트 머독(벤 애플렉)은 어렸을때 사고로 인하여 시력을 잃은 시각 장애인입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번지르한 영웅이어야 할 매트 머독에게 처음부터 시각 장애를 안겨 줌으로써 신체적인 열등감을 심어 줍니다. 이것은 태어날때부터 돌연변이였던 [엑스맨]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설정이며, 돌연변이 거미에게 물려 이상한 초능력을 물려받은 '스파이더맨'과도 비슷합니다. [엑스맨]의 돌연변이들이 다른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돌연변이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 반면 그 대신 그 신체를 이용한 뛰어난 능력을 부여받았고,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가 거미에게 물려 자신이 원치도 않은 능력을 얻음으로써 필연적으로 영웅이 되어야 했던 것처럼 [데어데블]의 매트 머독 역시 핵폐기물에 의해서 시력을 잃은 대신에 다른 감각들이 초인적으로 발달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그 탓에 원치도 않은 영웅 노릇을 하게 됩니다.
매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때에 악당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복수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러한 매트의 복수심은 악을 처단하는 것에 있어서 폭력이라는 악을 사용하는 모순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그가 연신 '난 나쁜 사람이 아냐'라고 되뇌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게끔 만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매트의 모습은 [스폰]의 알 시몬스와 [블레이드]의 '블레이드'의 복수심과 비슷합니다. 특히 '데어데블'의 의상이 악마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스폰]과 상당히 닮아 잇습니다. 그리고 팀 버튼이 창조해낸 [배트맨]의 어렸을 적의 기억과 그로 인한 복수심, 그리고 음울한 영웅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포에버]에 이르러서는 '배트맨'에게 이러한 복수심과 음울한 영웅의 모습은 간데없고 화려하고 섹시한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적인 영웅만이 남아버렸지만(마이클 키튼이 연기한 '배트맨'과 조지 크루니가 연기한 '배트맨'을 비교해 보세요.) 암튼 '배트맨' 역시도 처음엔 복수심에 불타는 이중적인 영웅이었습니다.
매트는 영웅 노릇으로 한하여 몸에 수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으며, 초인적으로 발달한 감각때문에 잠도 특수처리된 관같은 곳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알랑한 영웅 노릇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인 엘렉트라(제니퍼 가너)에게 어버지의 원수로 오인받고 그녀에게 공격을 당하는 억울함도 당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가 영웅이 됨으로써 지어야 할 무게에 힘겨워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피터는 자신이 사랑하는 주변인들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하자 사랑하는 여인인 메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떠나버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매트와 엘렉트라의 관계는 팀버튼의 [배트맨 2]의 '배트맨'과 캣우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이 글을 쓰다보니 팀 버튼의 [배트맨]이 너무나도 그리워지는군요.)
이렇듯 마블 코믹스의 다른 영웅과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데어데블]은 화려한 특수효과를 자랑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적인 그렇기에 모순 투성이인 영웅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스맨], [스파이더맨]과 같은 매니아들의 열광적인 환호 대신에 '쓰레기 같은 영화'라는 악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분명 [데어데블]은 마블 코믹스의 다른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으로 약점과 이중성이 너무나도 많이 가지고 있는 고뇌하는 영웅의 모습을 착실하게 지니고 있는데... 도대체 왜???
제가 보기엔 이 영화가 최근에 승승장구중인 마블 코믹스의 다른 영웅들과 비교하여 관객들의 환호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애석하게도 벤 애플렉이라는 배우의 존재 때문입니다. [아마겟돈], [진주만], [썸 오브 올피어스] 등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젊은 영웅상으로 떠오른 이 잘생긴 배우는 '데어데블'과 같은 인간적으로 헛점 투성이인 고뇌하는 영웅을 맡기엔 역부족이었던 겁니다.
[엑스맨], [스파이더맨]의 감독들은 헐리우드의 잘나가는 스타들을 배제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추구했었습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액스맨]의 주인공인 울브린 역에 휴 잭슨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배우를 캐스팅 한 것과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 감독이 주인공인 '스파이더맨'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크리스 오도넬 등 헐리우드에서 잘나가는 젊은 스타급 배우들의 캐스팅을 거절하고, 토비 맥과이어라는 유명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잘생기지도 않은 배우를 캐스팅 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초보 감독에 불과한 마크 스티븐 존슨은 스타 캐스팅에 대한 유혹을 결국 떨치지 못해고 벤 애플렉을 캐스팅하고 말았던 겁니다. 분명 박스오피스의 확실한 보증 수표인 벤 애플렉의 캐스팅으로 인하여 [데어데블]은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라는 성과를 달성했지만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으로 마블 코믹스의 모순적인 영웅에 매료되어있던 관객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초반 흥행만 반짝했을뿐 열성적인 매니아층을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은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누가 벤 애플렉의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뇌하는 영웅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는 요즘 제니퍼 로페즈와 그 우스꽝스럽고 사치스러운 사랑담으로 인하여 연일 해외 토픽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데어데블]의 매트 머독의 모습은 고뇌하는 영웅이 아닌 해외 토픽을 장식하는 바람둥이 영웅으로 비춰지고 말았던 겁니다. ([데어데블]에서 벤 에플렉에게 가장 어울렸던 연기는 화려한 액션도, 고뇌하는 영웅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식당에서 엘렉트라에게 반하고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게다가 벤 애플렉의 그 둔한 액션씬은 정말 이 영화의 특수효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정말로 벤 애플렉 대신에 좀더 신선하고, 연기력이 뛰어나며, 고뇌하는 나약한 영웅의 모습을 지닌 그런 배우를 캐스팅 했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엑스맨], [스파이더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네요.
벤 에플렉의 연기와 더불어 아쉬움이 남는 캐릭터는 엘렉트라를 연기한 제니퍼 가너의 연기입니다. 신예인 제니퍼 가너가 연기한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하여 무술 연마에 여념이 없는 강인한 캐릭터임과 동시에 매트의 사랑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리는 아름다움의 소유자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게 제니퍼 가너의 매력은 엘렉트라를 연기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였습니다. 팀 버튼이 [배트맨 2]에서 '배트맨'역에 결코 잘생기지 않은 마이클 키튼을 기용하여 헛점 투성이의 영웅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그와 반대로 캣우먼역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배테랑 여배우 미셀 파이퍼를 캐스팅함으로써 강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연기력을 이끌어 낸 것에 비하여 마크 스티븐 존슨 감독은 그와 정반대의 선택을 함으로써 스스로 초보 감독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습니다.
그러나 개성적인 악당 연기를 펼친 마이클 클라크 던컨과 콜린 파렐의 연기는 두 영웅의 어눌한 연기와 비교한다면 너무나도 찬란한 보석과도 같았습니다. 마이클 클라크 던컨이 연기한 킹핀은 마치 그를 위해 창조한 악당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그 커다란 덩치엣 품어져 나오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저음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 영화의 마지막엔 주인공인 데어데블이 아닌 킹핀이 승리하기를 기원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인 것은 킹핀이 마지막에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데어데블'이 킹핀을 살려줬을때 킹핀이 괜히 대들다가 스스로 목숨을 잃는 멍청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얼마나 바랬던지... 만약 이 영화의 속편이 나온다면 벤 에플렉의 그 짜증나는 모습을 또 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마이클 클라크 던컨의 카리스마넘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만은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킹핀이 고용한 킬러 불스아이를 연기한 콜린 파렐의 연기도 의외였습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리크루트] 등의 영화에서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앨리트 코스를 걸었던 그가 갑자기 머리를 밀어버리고 극악무도한 악당역을 해내다니... 그 용기가 가상했고, 어눌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그의 연기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영웅인 주인공들에게는 매력을 못 느끼고 악당인 두 배우들에게 매력을 느끼다니... 제가 이상한건지, 이 영화가 바보같은 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만약 이 영화가 팀 버튼이나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와 같은 능력있는 감독을 만났더라면 좀더 매력적이고 이중적인 영웅을 창조할수도 있었을 거라는 겁니다. 역시 영화는 감독의 능력에 달려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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