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웨인 왕
주연 : 제니퍼 로페즈, 랄프 파인즈
개봉 : 2003년 3월 21일
드디어 결혼이 한달남짓 남았습니다. 예식장을 잡고, 살 집을 구하고, 예물도 맞추고... 이제 급하게 해야할 것들은 전부 끝났다고 한시름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동남아에 갑자기 괴질이 유행한다는 뉴스 속보를 듣고, 필리핀의 세부로 가려던 신혼 여행 계획이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위험하지 않다고 여행사에서는 말하지만 그래도 왠지 석연치않아 신혼 여행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잡아야할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제 2의 인생이라는 결혼 생활의 활기찬 시작인 신혼 여행지에서 괴질이라는 불치의 병을 떠안고 올 수는 없고, 그렇다고 동남아를 벗어나 괴질에서부터 안전한 호주나 유럽으로 신혼 여행을 가자니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싸게 제주도에 다녀오자니 너무 섭섭하고...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있답니다.
문제는 신혼 여행뿐만이 아닙니다. 그녀가 제게 하달한 임무는 정말 의미있는 주례사를 해주실 주례 선생님을 모셔오라는 것입니다. 주례 선생님은 그냥 예식장에서 주선해주시는 분에게 대강 맡길 생각이었는데 눈을 부릅뜨며 그렇게는 안된다는 그녀의 호통탓에 저는 할 수 없이 졸업한 후 거의 담을 쌓고 지내다시피 했던 학교로 교수님을 찾아 가야만 했습니다. 솔직히 대학 시절에 교수님들과 그리 친하지 못했던 저로써는 어떤 교수님에게 주례를 부탁드려야할지도 막막했고, 과연 교수님이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제 주례 부탁을 승낙해 주실지도 의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주례를 부탁드릴만한 교수님을 물색한 후 학교에 찾아갔던 저는 교수님중에서도 나이가 제일 지긋하신 교수님께 주례를 부탁드렸습니다. 평소에 한자를 중히 여기시던 그 교수님은 제 부탁을 듣자마자 신부의 이름을 한자로 써보라는 둥,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성함을 한자로 써보라는 둥, 제게 즉석으로 한자 시험 문제를 내셨습니다. 하지만 한자에 한없이 약한 저는 교수님의 문제를 하나도 하지 못했으며, 결국 주례를 부탁드리러 간 자리에서 거의 30분동안이나 교수님께 혼쭐이 났습니다. 다행히 주례를 맡아 주시기로 겨우 승낙을 받긴 했지만 결혼 전에 다시 나의 그녀와 함께 한자 시험을 치루어야 할 듯... -.-;
정말 결혼이라는 것 그리 쉽지 않더군요. 뭐가 그리도 신경쓰며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은지... 정말 결혼을 몇번씩 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네요. 흠~ 암튼 신혼 여행을 가기위해선 괴질에 대한 뉴스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주례를 받기 위해선 지금부터 한자 공부를 열심히해서 다음번 한자 시험에는 만점을 받아야만 합니다. 에궁~ ^^;
[러브 인 맨하탄]은 겉모양새만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신데렐라 이야기의 또다른 변주입니다. 신분이 낮은 여인이 마법의 힘으로 신분이 높은 남자의 사랑을 획득하여 신분 상승을 이룬다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수많은 영화들이 조금씩 상황만 바꾸어 영화화하더라도 언제나 관객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얻어왔습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겐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조금씩 가지고 있는 듯.
저 역시 어렸을때 신데렐라 이야기를 꽤 재미있게 보았지만 그 동화를 볼때마다 의문이 가는 것은 '과연 신데렐라는 왕자님을 사랑했을까?'입니다. 왕자는 마법의 힘으로 멋지게 차려입은 신데렐라에게 첫눈에 빠져서 그녀를 찾아헤매지만, 신데렐라는 단지 상류층의 파티에 나가고 싶어 마법의 힘으로 몸치장을 하고 파티에 참석한 것일뿐 왕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신데렐라에겐 왕자의 구혼앞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왕자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계모와 언니들 밑에서 구박이나 받으며 식모 생활을 해야 할테고, 왕자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화려한 궁전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수십명이 되는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편안하게 살아갈테니... 결국 제 관점에서 본다면 신데렐라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닌 신데렐라라는 착한 여성의 신분 상승이라는 대박을 터트리는 이야기였습니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들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귀여운 여인]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거리의 창녀와 백만장자의 사랑을 그린 [귀여운 여인]은 너무나도 완벽한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입니다. 매력적인 백만장자 에드워드(리차드 기어)는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의 사랑을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꿔야만 했습니다. 기업 M&A 전문가인 그는 기업을 사서 그 기업을 쪼개 다시 파는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기업의 경영인으로 다시 태어난 겁니다. 단지 비비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그 사실만으로 왕자인 에드워드는 신데렐라인 비비안을 너무나도 끔찍히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비안이 에드워드를 사랑했는지는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에드워드가 잘생기고, 돈도 많고, 게다가 자신에게 홀딱 반해버렸기에 비비안은 에드워드를 받아들인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암튼 이렇듯 신데렐라 이야기를 모태로 한 영화들은 반쪽 사랑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관객의 눈에는 너무나도 완벽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보여졌을테지만 영화를 한꺼플 벗겨보면 그들의 사랑이 진실된 것인지 의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 사랑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물론 영화를 보며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보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
그런데 [러브 인 맨하탄]은 신데렐라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쪽짜리 사랑이 아닌 완전한 사랑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러브 인 맨하탄]의 마리사(제니퍼 로페즈)는 분명 영락없이 신데렐라입니다. 우선 그녀의 직업이 호텔 손님의 시중을 들며 호텔을 반짝반짝 빛이 나게 닦아야 하는 maid 즉 하녀라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신데렐라가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방 청소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호텔의 하녀인 마리사는 신데렐라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그녀는 신데렐라가 그랬던 것처럼 하루종일 그 넓은 호텔을 청소해야 하며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왕자님은??? 물론 젊고 멋있는 유력한 상원의원 후보 크리스토퍼(랄프 파인즈)가 이 영화의 왕자입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정치인이라는 것은 웨인 왕 감독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 영화를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대통령을 민주주의 사회의 왕으로 본다면, 대통령 후보로 얼마든지 나설 수 있는 젊은 정치인은 왕자로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토퍼는 [귀여운 여인]의 에드워드처럼 돈많고 잘생긴 무늬만 왕자가 아닌 진정으로 현대판 왕자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못된 계모와 철없는 신데렐라의 언니들도 다른 영화들에 비해 비교적 충실하게 그려냅니다. 호텔의 종업원인 마리사가 신데렐라라면, 호텔에 묶고 있는 돈많고 허영심에 가득찬 캐롤라인은 여지없이 신데렐라의 철없는 언니들입니다. 캐롤라인은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그랬듯이 마리사에게 완전히 빠져있는 왕자를 잡기위해 음모를 꾸미며, 그녀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게다가 마리사의 신분 상승에 대한 꿈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며 그녀에게 '꿈을 깨라'고 찬물을 끼엊는 마리사의 어머니는 신데렐라의 계모와 비교할만 합니다. 결국 마리사의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한 신분 상승의 꿈은 그런 어머니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하여 내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겁니다.
이렇듯 신데렐라 이야기와 비슷한 모든 캐릭터를 완비한 이 영화는 겉모양새만 본다면 본명 신데렐라 이야기의 정석을 걷는 듯 하지만 가만히 이 영화를 음미해보면 신데렐라 이야기속의 사랑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영화를 이끌어 나갑니다.
먼저 이 영화에서 신데렐라 이야기와는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마리사라는 캐릭터의 성격입니다. 그녀는 호텔의 하녀이면서도 끊임없이 호텔 지배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당찬 여성입니다. 물론 영화의 초반엔 어머니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하여 용기를 내지 못하고 결국 동료가 대신 매니저 신청서를 내게끔 만드는 소심함을 보여주지만 영화의 후반부를 보면 크리스토퍼에 기대어 신분 상승을 이루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토록 원하던 호텔 매니저에 오르는 당찬 면모를 보여줍니다.
신데렐라의 경우 그녀는 계모와 언니들의 부당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일을 하며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동화의 그 어디에도 신데렐라가 이 부당한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귀여운 여인]의 비비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단지 창녀의 의무만을 다할뿐 자신의 직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녀를 사랑한 에드워드에 의해서 창녀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리사는 스스로 호텔의 하녀라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희망합니다. 게다가 크리스토퍼와의 만남을 가진 이후에도 그에게 기대려 하지 않으며, 혼자의 힘으로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어내려 노력합니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이전의 소극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한단계 뛰어올라 자신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새로운 현대판 신데렐라의 유형을 만들어 냅니다.
이쯤에서 이 영화의 원제가 [Maid in Manhattan]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맨하탄의 하녀'쯤으로 번역이 될 수 있는 이 영화는 국내에 개봉되면서 [Love in Manhattan] 즉 '맨하탄의 사랑'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전의 신데렐라 이야기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로써 이 영화를 봐라본다면 분명 '맨하탄의 하녀'보다는 '맨하탄의 사랑'이 휠씬 로맨틱해 보입니다. 하지만 소극적인 이전의 신데렐라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마리사라는 당찬 신데렐라와 만난다면 역시 원제인 '맨하탄의 하녀'가 이 영화와 더욱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사는 크리스토퍼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일하는 호텔에서 자신의 힘으로 매니저가 됩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사랑은 이루어 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왕비가 아닌 하녀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직업앞에 당당한 하녀... 결국 이렇게 마리사가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기에 이 영화는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반쪽짜리 사랑이 아닌 서로 완벽한 사랑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왕자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신분 상승을 이루어 낸 신데렐라 이야기... 그렇기에 [러브 인 맨하탄]은 신데렐라 이야기를 영화한 것들중에서 가장 많이 신데렐라 이야기와 근접해 있으면서도 신데렐라 이야기와 가장 많이 떨어져 있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