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롭 마샬
주연 :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
개봉 : 2003년 3월 28일
골든 골르브에서 8개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등 주요 3개 부문을 휩쓸고, 아카데미에서도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쟁쟁한 다른 영화들을 제치고 작품상등 6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시카고]... [시카고]는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제 관심을 붙잡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솔직히 골든 글로브나 아카데미 영화제는 미국에 의한 미국만을 위한 미국의 영화제입니다. 미국인들이 자기네들 영화를 가지고 작품성을 따지며 상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네들의 영화제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세계 영화제인 깐느 영화제나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보다 세계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세계 영화계에서 헐리우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영화제의 수상작들이 마치 평론가들을 위한 영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참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지루한데 반에 아카데미의 수상작들은 평론가들이 극찬한 영화들 보다는 스케일이 크고 감동적인 장면들로 치장된 재미있는 영화들이 대부분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저역시 국내 극장가에서 넘쳐나는 헐리우드 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영화팬의 한사람으로써 아카데미 영화제에 상당한 관심을 두며 매년 3월이 되면 어떤 영화가 노미네이트될 것인지, 어떤 영화가 상을 수상할 것인지를 유심히 지켜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년 아카데미의 선택은 제 기대와는 항상 엇갈렸습니다. 아카데미와 저의 엇갈림의 시작은 10년전인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그 당시 [양들의 침묵], [벅시], [J.F.K.], [사랑과 추억], [미녀와 야수]가 아카데미에서 겨루고 있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의 재미에 한참 빠져있던 저는 당연히 이 모든 영화를 전부 보았으며, 단 한편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다른 4편의 영화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보았었죠. 제가 단 한편 재미없게 보았던 영화가 바로 [양들의 침묵]입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바로 제가 재미없게 보았던 [양들의 침묵]에게 작품상은 물론이고 감독상, 남녀 주연상, 각본상 등 주요 부문을 전부 안겨 주었습니다. 한 영화가 감독, 남녀 주연, 각본상을 한꺼번에 휩쓴 것은 아카데미에서 사상 두번째의 기록이라더군요.
그 후에도 아카데미와 저의 엇갈림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인 1993년엔 제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특별히 싫어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용서받지 못한 자]가 아카데미를 휩쓸었으며, 1994년엔 제게있어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중에서 가장 지루했던 [쉰들러 리스트]가 아카데미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작년엔 제가 철저하게 반해버린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와 [물랑루즈]를 제치고, 제가 보기엔 범작에 머무른 [뷰티풀 마인드]가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시카고]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은 제게 있어서 좋은 소식이라기 보다는 나쁜 소식에 해당되었습니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저는 [시카고]에 상당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고, 그렇기에 내심 [시카고]가 아카데미에서 물먹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와의 지금까지의 엇갈리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제게 [시카고]의 재미를 보증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카고]에게 작품상을 수여했고, 저는 [시카고]를 보기위해 극장으로 향하는 동안 아카데미와의 엇갈림을 생각하며 불안해 해야 했습니다. ^^;
그러나 [시카고]를 보고나서의 제 첫 느낌은 '아카데미가 비로서 나의 기대에 부흥하기 시작했구나'라는 것입니다. 물론 올해의 아카데미 후보에는 제게 있어서 영원히 잊혀지지않을 불후의 명작인 [반지의 제왕 - 두개의 탑]도 있었지만 아카데미가 피터 잭슨 감독을 철저하게 외면하기로 결심한 이상 [반지의 제왕 - 두개의 탑]이 아카데미의 천대를 받는 것이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재감독으로 유명한 오손 웰슨도 아카데미의 철저한 천대를 받았으니 피터 잭슨에게 아카데미의 천대는 그리 마음 상할 일이 아닐 겁니다.
이렇게 [반지의 제왕 - 두개의 탑]을 제껴두고나니 단연 [시카고]가 눈에 띄더군요. 그리고 [시카고]는 지금까지 다른 아카데미 수상작들과는 달리 제게 흥겨움을 한껏 안겨 주었습니다.
먼저 [시카고]의 장점은 바로 뮤지컬이라는 영화의 장르에 있습니다. 노래로 시작해서 노래로 끝난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이 뮤지컬이라는 특이한 장르는 어쩌면 가장 헐리우드적인 영화 장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 영화에 몇몇 용기있는 감독들이 도전을 했지만 언제나 아쉬움만 안기고 쓸쓸하게 흥행에서 실패했었습니다. 특히 제가 인상깊게 보았던 우리나라의 뮤지컬 영화로는 이명세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제가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우리나라의 뮤지컬 영화랍니다.) 이 영화는 샐러리맨의 애환을 경쾌한 노래로 풀어나간 아주 독특한 뮤지컬 영화였지만 국내에선 거의 처음 시도되는 뮤지컬 영화에 대한 도전인 만큼 아쉬움을 많이 남긴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뮤지컬 영화의 창시국인 미국은 그 오랜 시간동안의 노하우를 통해서 뮤지컬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화적인 재미를 발휘합니다. 제가 어렸을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몇번이나 보며 '도레미송'을 따라 부르기도 했으며, 최근엔 [물랑루즈]의 그 강렬한 영상과 음악에 빠져 한동안 [물랑루즈] 사운드트랙을 귀에 달고 살기도 했습니다.(영화에 대해서 극단적인 문외한인 제 친구는 가장 인상깊은 영화가 헐리우드 뮤지컬인 [7인의 신부]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기억하는 한 뮤지컬 영화에 대해서는 단한번도 제게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았던 헐리우드는 이번에도 역시 제 귀와 눈을 즐겁게 하며 마치 시카고의 그 흥겨운 쇼의 무대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습니다.
이러한 이 영화의 흥겨운 뮤지컬 무대는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력과 매력을 자연스럽게 발산시킵니다. 캐서린 제타 존스는 임신을 한 그 뚱뚱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매력을 발휘했으며, 리차드 기어는 이제 한물 갔다는 세간의 비아냥이 헛소리라는 것을 온몸을 던져 증명하며 아직 자신에게 섹시한 매력이 남아있음을 흥겨운 탭댄스와 함께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가장 놀라운 매력을 발휘한 배우는 역시 르네 젤위거입니다. [제리 맥과이어어], [브릿짓 존스의 일기]를 통해 귀여운 이미지만으로 어필했던 르네 젤위거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감춰진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어떨땐 백치미가 넘치는 매력으로, 또 어떨땐 성공이라는 허왕된 꿈을 쫓는 귀여운 악녀로 시시각각 그 이미지를 변화시켰습니다. 작년에 [물랑루즈]의 니콜 키드먼이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놓친 것에 그토록 안타까워했는데, 올해엔 아이러니하게도 니콜 키드먼이 [디 아워스]로 작년에 놓친 아카데미를 거머쥐었으나 저는 여전히 불만입니다. 르네 젤위거가 아카데미를 타지 못했기에... ^^;
하지만 [시카고]가 단지 흥겨운 음악과 주연 배우들의 색다른 매력만으로 절 사로잡는 것에 그쳤다면 저는 '왜 [물랑루즈]는 안되고 [시카고]는 되는 것일까?'라는 강한 불만을 아카데미에 다시한번 토로했을 겁니다. 그러나 [시카고]는 그러기엔 너무 많은 새로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움은 바즈 루어만의 [물랑루즈]에서 부터 시작되는 젊은 감독들의 새로운 시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솔직히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너무나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노쇄한 장르에 불과했습니다. 한때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매년 대작 뮤지컬을 내놓던 헐리우드도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특수효과 덤덕인 대박 오락 영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결국 뮤지컬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뮤지컬 영화를 멋지게 살려낸 이가 바로 바즈 루어만 감독입니다. 강렬하고 특이한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던 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기용하여 고전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테크노 영상이 난무하고 새로운 액션극으로 탈바꿈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만든 뮤지컬 [물랑루즈]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느꼈던 그 착하고 순한 뮤지컬 영화의 특성을 단번에 뒤엎으며 뮤지컬의 무대를 화려하고 마약과 매춘이 난무하는 퇴폐적인 클럽으로 옮김으로써 젊은 관객들의 취향에 부합시켰습니다. [물랑루즈]의 이러한 시도는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왠지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골동품 영화일 것이라는 인식을 단번에 바뀌놓았으며, 뮤지컬 영화도 얼마든지 젊은 관객의 감성을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한 [물랑루즈]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시카고]로 이어집니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최장기 공연을 하며 80년간 꾸준히 관객의 사랑을 받아온 이 뮤지컬은 신예 감독인 롭 마샬에 의해서 영화화되면서 [물랑루즈]를 벤치마킹한 흔적을 여러군데 남겼습니다. 특히 벨마(캐서린 제타 존스)와 록시(르네 젤위거)가 펼치는 현란한 무대위의 춤은 니콜 키드먼이 연기했던 [물랑루즈]의 샤틴과 비교해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섹시하며 흥겹고 그렇기에 즐겁습니다.
게다가 [시카고]는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해서 [물랑루즈]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놀라운 재미를 선사합니다. 특히 모든 영화적인 상황을 각각의 캐릭터에 맞춰 노래로 풀어나가는 여러 장면들은 뮤지컬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명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빌리(리차드 기어)가 기자들에게 록시를 거짓으로 꾸며대며 동정심을 유발하는 장면을 좋아하는데 인형극으로 표현된 이 장면은 원작에서도 없었던 장면이라고하니 롭 마샬의 상상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알 수 있는 명장면중의 하나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이야기하려면 한도 끝도 없기에 이쯤에서 그만두지만 암튼 [시카고]를 보는 순간동안 시카고의 그 화려한 쇼의 무대에 초대되어 그 환란의 쇼를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은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제 저는 [물랑루즈]와 [시카고]의 연이은 성공으로 그 동안 오랜 잠에 빠져있던 헐리우드의 흥겨운 뮤지컬 영화가 다시한번 화려한 비상을 이룰 수 있기를 꿈꿉니다. 그리고 [시카고]는 그러한 가능성을 제게 보여준 것 만으로도 충분히 환호할만한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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