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정욱
주연 : 장진영, 박해일, 송선미, 김유석
개봉 : 2003년 2월 28일
영화를 본 90%의 관객들에게 극찬을 받으며 최고의 멜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아냈던 [클래식]... 그러나 제게 [클래식]은 특색없이 평범한 그저그런 멜로 영화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전 [클래식]에 대한 관객들의 열광이 손예진, 조승우, 조인성이라는 청춘 스타 배우들에 의한 한순간의 이상 열기일 뿐일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클래식]에 대한 열광은 시간이 지나도록 수그러들줄 몰랐고, 결국 그들의 열광에 동참하지 못하는 제가 왠지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인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한때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남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였는데... 어쩌다가 그 풍부한 감수성이 말라버렸단 말인가? 저는 제 자신을 책망하기에 이르렀죠.
하지만 그건 섣부른 생각이었습니다. 제 감수성은 결코 죽지 않았던 겁니다. [국화꽃 향기]라는 영화를 보며, 저는 너무나도 오랫만에 눈물을 흘린 겁니다. 눈시울을 살짝 적시는 눈물이 아닌 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뜨거운 눈물을...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느끼며 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영화를 보며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것이 도대체 언제쯤이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요즘의 멜로 영화에 시큰둥했던 저였는데... [국화꽃 향기]를 보면서는 남자 체면도 잊고 눈물을 흘린 겁니다. 그것도 나의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
아마 저는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나봅니다. 모두들 열광하는 [클래식]을 보면서는 하품만 했었는데... 멜로 공식이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국화꽃 향기]에는 이렇게 눈물을 흘리다니... 하지만 뭐 상관없습니다. 그런것이 바로 개성이니까요. ^^
[국화꽃 향기]는 아무리 이리저리 따지고 봐도 새로울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영화입니다. 이런 식의 예쁜 그림 엽서같은 최루성 멜로 영화는 [편지], [약속], [하루], [선물]등 그 명맥을 이어가며 꾸준히 관객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국화꽃 향기]는 바로 그 명맥을 이어나가는 멜로 영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전 오히려 [국화꽃 향기]의 그런 점이 맘에 듭니다. 솔직히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영화장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최루성 멜로 영화들은 최근 몇년동안 코미디 영화와 한국형 블럭버스터의 기세에 눌러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같은 최루성 멜로이면서도 [클래식]에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은 이유는 [클래식]은 정통 최루성 멜로라기보다는 영화전반에 요즘 영화의 주류 장르인 로맨틱 코미디의 분위기를 짙게 깔아놓고 관객들을 훈훈한 웃음속으로 안내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별안간 '사실은 난 멜로 영화야'라고 털어놓으며 관객들을 울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런 이 영화의 분위기에 맞춰 웃고 울었겠지만 전 영화 초반의 코미디적인 분위기때문에 이 영화의 마지막이 너무나도 어색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일단 [국화꽃 향기]는 그딴 편법은 쓰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들을 울리려고 아주 맘을 먹은 듯 영화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쁘기는 하지만 슬픈 분위기를 유지하고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그 슬픈 분위기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관객에게 울것을 종용합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정말로 정직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여러 장르의 영화들을 섞으며 영화의 재미를 만들어가는 반면 이 영화는 아주 정직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최루성 멜로를 고집한 겁니다. 이런 정직함은 최소한 제게 통했으며, 전 이 영화가 의도했던바대로 눈물을 맘껏 흘려준 겁니다. 이 영화처럼 아주 정직하게 말이죠.
[국화꽃 향기]의 이러한 슬픔은 전적으로 원작 소설의 덕분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국화꽃 향기]의 원작 소설가인 김하인이 상당히 잔인한 성격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지않고서야 어떻게 이토록 한 여인을 처절한 불행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며, 그 여인을 사랑한 남자에게 그토록 가슴아픈 기다림을 남겨줄 수 있는 것인지...
이 영화속의 희재(장진영)는 말그대로 세상의 모든 불행을 가슴에 안은 여자입니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잃어버리는 순간이라더군요. (제 기억으로는 그 드라마 제목은 '전설의 고향'이었답니다. 내용은 한을 품고 죽은 남매가 그 원수를 갚기위해 원수의 아들과 딸로 환생합니다. 결국 그 집은 계속 번창하여 아들은 장원급제를 하고, 딸은 권력가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행복의 절정의 순간 아들은 장원급제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말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고, 그와 동시에 딸도 봉변을 당해서 죽고 맙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너무나도 처절한 불행을 맞이한 이 두 부부는 그만 실성을 하고, 한을 품고 죽은 남매는 그 원수를 톡톡히 갚고 저승으로 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불행이 계속해서 찾아온다면 그 불행에 면역이 되어서 불행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너무나 행복하여 그 행복감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불행은 너무나도 큰 아픔을 남기는 법입니다.
희재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녀의 첫번째 불행은 사랑하는 사람인 성호(김유석)와 결혼을 앞두고 여행을 가다가 벌어집니다. 가장 행복한 그 순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하여 희재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부모님들을 잃고 자신만이 겨우 살아님습니다. 그런 그녀가 그 아픈 불행의 덫에서 인하(박해일)로 인하여 겨우 빠져나오고 다시 예전의 웃음을 찾을때쯤에 두번째 불행이 찾아옵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인하와의 아기가 생기고 너무나도 행복한 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찾아오는 위암이라는 불행... 결국 희재는 여자로써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할수있는 결혼과 임신의 순간... 연달아 두번의 불행을 맞이한 겁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운명인지...
인하의 아픔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희재보다도 더 클지도 모릅니다. 그의 아픔은 기다림과 남겨진 자의 슬픔이니까요.
희재가 첫번째 불행을 맞이했을때 인하는 자신이 그녀를 잡지 못했기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운명을 선사한 것이라고 자책합니다. 그러한 죄책감은 모든 사랑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희재보다도 어쩌면 더욱 잔인한 아픔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기다립니다.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지 확신도 없으면서 단지 그렇게 그녀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의 불행은 희재의 두번째 불행과 더불어 더욱 커집니다. 오랜 기다림끝에 이룬 사랑과 그 사랑의 결실을 이제 막 얻으려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에게도 불행이 찾아 옵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고 다시 혼자 남겨져 죄책감에 빠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하의 불행은 모든 것을 남겨둔채 영원히 떠나버린 희재의 고통보다도 더 큰것입니다. 희재는 이제 더이상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떠났지만 인하는 그 불행을 떠안은채 평생을 그렇게 남겨졌기 때문입니다.
희재와 인하의 그 서글픈 불행... [소름]에서 가장 추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연기를 내뿜었던 장진영의 그 물오른 듯한 멜로 연기와 2003년에 가장 주목받는 남자 배우인 박해일(조만간 그의 모습을 [질투는 나의 힘]과 [살인의 추억]에서 연달아 만날 수 있다는 군요.)의 신인답지 않은 그 깔끔한 연기는 영화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너무나도 잔인한 운명을 떠안은 연인들의 서글픈 사랑 이야기를 정말로 가슴아프게 그려냈습니다.
정말 이렇게 작정을 하고 관객을 울리려 했으니... 어찌 안울수가 있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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