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유위강, 맥조휘
주연 : 양조위, 유덕화, 증지위, 황추생
개봉 : 2003년 2월 21일
제 또래의 남자라면 중.고등학교 시절 소위 홍콩 느와르 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영화에 푹빠졌었던 기억이 거의 대부분 있었을겁니다. 저도 한때는 주윤발의 바바리 코트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옷인줄 알고 있었으며, 괜히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다녔었습니다. 제목도 엇비슷하고 내용도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홍콩 영화를 시간이 날때마다 몇편씩 봤으며, 친구들과 만나면 '주윤발이 무슨 영화에서 어땠다더라'식의 이야기를 하곤 했었습니다. 괜히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영웅본색]의 주제가가 담긴 장국영의 레코드판을 사서 매일 들었고, 그 이상한 발음의 노래를 한글로 옮겨 적어서 어색하게 따라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 대한 추억담을 모두 이야기하자면 아마도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그만큼 홍콩 느와르 영화는 제 사춘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화 장르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정말로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목록에서 홍콩 느와르 영화는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전 제가 어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유치한 홍콩 느와르 영화가 재미없게 느껴져다고 내 스스로 생각을 했지만,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홍콩 느와르 영화는 나의 영화 목록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완벽하게 국내 극장가에서마저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이제 홍콩 영화는 국내 극장에서 찾아보기 점점 힘들어 졌으며, 간혹 헐리우드로 진출한 홍콩 감독들이나 배우들이 출연한 헐리우드 영화만이 옛 홍콩 영화의 화려했던 시절을 말해줄 뿐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이러한 상태까지 이르렀는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러한 홍콩 영화의 몰락은 아주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 그토록 열광했던 그 시절에도 10편의 홍콩 영화를 보면 2편 정도만이 재미있었을 정도였으니, 일반 관객들이 홍콩 영화에 식상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홍콩 영화의 몰락과 함께 저와 사춘기를 함께 했던 홍콩 느와르 영화도 제게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 그동안 잊혀졌던 홍콩 느와르 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영화 한편이 개봉합니다. [풍운], [중화영웅]등 대규모 SF 무협 영화로 홍콩 영화 부활의 신호탄을 알렸던 유위강 감독이 이젠 [무간도]라는 영화로 완벽하게 폐기처분된 듯이 보였던 그 낡고 낡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부활시킨 겁니다.
[무간도]는 제 사춘기 시절 그토록 열광했던 홍콩 느와르를 회상한다면 상당히 반가운 영화입니다. 일단 주윤발과 더불어 홍콩 느와르의 대표적인 배우였던 유덕화의 출연이 반갑고, 시종일관 우울한 분위기로 영화를 끌고가다가 마지막에 비극으로 끝을 맺는 영화의 비장미도 반갑습니다. 단지 홍콩 느와르 영화라면 마치 사자성어처럼 네글자의 제목이 어울리건만, 이 영화의 제목은 단 세글자라는 사실이 조금 눈에 거슬리는 군요. ^^;
홍콩 느와르 영화의 첫번째 특징은 대부분의 주인공이 경찰이거나 암흑가의 건달이라는 겁니다. 홍콩 느와르의 두번째 특징은 대부분의 영화들이 사랑보다는 남자들의 의리가 더욱 중요시된다는 겁니다. 홍콩 느와르의 마지막 특징은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는 겁니다.
일단 [무간도]는 그러한 홍콩 느와르 영화의 특징을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의 특징을 고스란히 답습함으로써 진정 잊혀졌던 홍콩 느와르 영화의 적자임을 밝힙니다. [무간도]는 주인공을 경찰인 유건명(유덕화)과 암흑가의 건달인 진영인(양조위)으로 삼음으로써 홍콩 느와르 영화의 첫번째 특징을 잘 살렸으며, 다른 영화에는 빠지지 않는 사랑이라는 소재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사나이들간의 대결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두번째 특징도 잘 살렸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무간도]의 홍콩 버전은 해피엔딩이라던데... 우리나라에 개봉된 [무간도]는 아주 철저한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무간도]의 한국 버전은 홍콩 느와르의 세번째 특징도 잘 살린 셈입니다.
'이게 얼마만에 보는 홍콩 느와르 영화라는 말인가!' 솔직히 [무간도]는 오랜만에 만나는 홍콩 느와르 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제겐 상당히 반가운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 영화의 부활이라는 개인적인 반가움에 그치지않고 영화적인 재미마저 제게 안겨주었습니다. 솔직히 홍콩 느와르 영화가 몰락한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홍콩 느와르 영화들이 재미없었기 때문입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들은 별다른 이야기 방식이 없는채 매번 똑같은 줄거리와 끝맺음으로 일관했고, 그러한 홍콩 느와르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홍콩 느와르 영화들에게 식상함을 느끼고 외면한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간도]는???
일단 [무간도]는 홍콩 느와르의 일반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으면서도 관객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안겨 줍니다. 그것도 예전의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새로움을 통해서...
예전의 홍콩 느와르 영화들은 남자들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복수극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은 복수를 하기위해 절대 총알이 떨어지지 않는 마술총을 끊임없이 쏘아댔고, 주인공의 마술총 앞에 수십명(혹은 수백명에 이르기 까지)의 악당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었습니다. 그러한 주인공의 목숨을 건 의리는 관객들에게(특히 아직 어린 남자 관객들에게) 주인공이 멋있어 보이게는 만들었지만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간도]는 홍콩 느와르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예전의 홍콩 느와르 영화들이 가지고 있었던 비현실성을 탈피하였습니다.
[무간도]의 스토리는 허무맹랑한 복수극이 아닙니다. 경찰이면서도 암흑가의 건달 생활을 해야하는 진영인과 암흑가의 건달이면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경찰 생활을 해야하는 유건명은 의리때문에 목숨을 거는 행위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단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칠 뿐입니다. 그렇기에 유건명은 홍콩 느와르 주인공의 대표적인 미덕인 의리를 져버리고 보스인 한침(증지위)를 배신하며 그를 죽이고, 진영인은 유건명이 자신에겐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던 경찰 간부인 황지성(황추생)을 살해하는데 동조한 첩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협상을 함으로써 경찰의 신분을 되찾으려 합니다. 그들에겐 자신의 목숨을 내건 의리따위는 없습니다. 단지 살아남으려는 아주 인간적인 비열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조금은 현실적인 캐릭터를 구축한 이 영화는 예전의 홍콩 느와르처럼 쏴도 쏴도 계속 총알이 나오는 그런 말도 안되는 마술총마저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아예 총격씬 장면을 최소화 해버립니다. 총격씬 장면이 거의 없는 홍콩 느와르... 왠지 중요한 뭔가 빠진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무간도]는 완전히 새로운 홍콩 느와르 영화를 개척해낸 겁니다.
사실적인 캐릭터와 스토리 전개... 사실 홍콩 느와르의 오랜 팬이라면 이 사실만으로도 어쩌면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의리와 총격씬이 빠진 홍콩 느와르 영화는 엄격하게 말한다면 가장 핵심 부품을 빠뜨린 엉성한 기계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기본적인 특징에서는 홍콩 느와르의 특징을 잘 따르면서도 가장 중요한 홍콩 느와르의 두가지 항목을 스스로 버려버린 이 영화는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재미를 확보합니다.
[무간도]가 새롭게 확보한 영화적인 재미는 바로 스릴입니다.
예전의 홍콩 느와르 영화들에게서는 스릴이라는 것을 맛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영화들은 가슴 찡한 의리와 속시원한 총격씬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간도]는 바로 그러한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스릴를 얻어 낸겁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서로 첩자를 찾아내려는 아슬아슬한 두뇌전은 영화를 보는내내 제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경찰 간부인 황지성의 그 날카로운 눈매와 암흑가 보스인 한침의 카리스마는 언제 유건명과 진영인의 정체가 밝혀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스릴을 제공한 겁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 오랜 경력을 쌓은 유덕화의 연기와 왠지 허무한 듯한 눈빛을 간직한채 경찰이면서도 음지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진영인역을 맡은 양조위의 연기는 바로 이러한 이 영화속의 스릴를 더욱 뒷받침해줍니다.
의리와 총격씬을 버리고 새롭게 획득한 스릴... 다른 홍콩 느와르 영화의 팬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스릴이라는 요소는 충분히 의리와 총격씬을 버릴 정도로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이 영화를 보며 손에 땀을 쥐고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영화를 지켜보았던 제게는...
그렇기에 일단 [무간도]의 홍콩 느와르 부활은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의 오랜 팬이었지만 스스로 홍콩 느와르 영화에 식상하여 잊어버린 제게 이러한 재미를 안겨주는 것을 보면... 식상할대로 식상해진채 관객에게 완벽하게 버려진 홍콩 느와르의 부활... 유위강 감독은 그야말로 홍콩 영화의 미래가 결정지어질지도 모르는 대단한 일을 저지른 셈입니다. 게다가 [무간도]는 홍콩 느와르의 부활이라는 홍콩 느와르의 팬의 입장에서의 개인적인 사소한 만족감에 그치지 않고, 자국에서 흥행에마저 성공을 하였으니, 유위강 감독의 모험은 거의 90%의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이제 [무간도]가 100%의 완벽한 성공을 거두려면 [무간도]의 성공에 기대어 또다시 엇비슷한 아류작들이 난립하여 홍콩 느와르의 몰락을 다시한번 재현하지 않는 겁니다.
저는 진정으로 제 어릴적의 소중한 추억이었던 홍콩 느와르 영화가 부활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예전처럼 주윤발의 바바리 코트를 회상하며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다닐 수는 없겠지만, 홍콩 느와르 특유의 그 비장함을 맛보며 사춘기 시절의 추억을 다시한번 되새김질 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제게있어서 [무간도]보다 더 중요한 영화는 [무간도] 이후의 홍콩 느와르 영화인 셈입니다. 그 영화로 인하여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되찾게 될것인지... 아니면 [무간도]로 인하여 잠시 설레였던 홍콩 느와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접고 다시 홍콩 느와르를 기억 저편으로 쳐박아 두게 될지 정해질테니까요.
아! 물론 국내에서 [무간도] 이후의 홍콩 느와르 영화를 꾸준히 극장에서 볼려면 [무간도]의 국내 흥행이 필수적이겠지만, 전 믿고 있답니다. 최소한 홍콩 느와르의 오랜 팬들에게 [무간도]는 반가운 영화일 것이며, 그렇기에 [무간도]는 국내 흥행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나만의 생각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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