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오치아이 마사유키, 스즈키 마사유키, 오구라 히사오
주연 : 야다 아키코, 나카이 키이치, 이나모리 이즈미, 카시와바라 다카시
개봉 : 2003년 2월 21일
학창시절... 친구들끼리 모이면 불을 끄고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놀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 겁이 많은 편이라서(짐작하셨겠지만...) 그런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 한동안 그 이야기를 되새기며 공포에 떨곤 했었죠. 하지만 호기심은 많아서 절대로 무서운 이야기를 그냥 놓치지는 않고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곤 했었습니다.
한때 TV에서 유행했던 괴담 프로를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반쯤 가린 후 보기도 했고,(혼자서는 절대 못보았지만...) 대형 서점에 가서 괴담을 모아둔 책을 읽으며 친구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나름대로 준비하기도 했었습니다. (괴담책을 읽을땐 절대 30분을 초과하지 못했었습니다. 조금만 오래 읽으면 마치 제 주위의 모둔 것이 멈춰버리고, 무서운 세계에 저 혼자 남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겁은 많지만 동시에 호기심도 많아서 절대로 무서운 이야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제게 아주 딱 알맞은 영화가 곧 개봉됩니다. 그것은 [기묘한 이야기]라는 일본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일본에서 TV로 10년동안 방영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동명 프로그램의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3개(사실은 4개입니다.)의 에피소드를 간추려 영화화한 [기묘한 이야기]는 마치 학창시절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낮게 목소리를 깔며 서로 주고 받았던 이야기들을 보는 듯한 특이한 영화입니다.
무서운 이야기, 웃기는 이야기,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다른 감독과 다른 배우들이 맡음으로써 독립성을 확보하고, 폭우로 인하여 기차 대합실에 발이 묶인 사람들에게 선글라스를 쓴 한 기묘한 분위기의 신사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각각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엮고 있습니다. 이제 관객들은 이 신사의 이야기에 맞춰 공포에 떨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감동에 눈물을 흘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만 더'라고 외치며... 하지만 과연???
무서운 이야기 - 눈속의 하룻밤
제가 [기묘한 이야기]에서 가장 기대했던 이야기는 바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역시 으시시한 분위기속에 몇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로 무서운 이야기만큼 적절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속의 무서운 이야기인 '눈속의 하룻밤'은 제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눈속의 하룻밤'이 제 기대에 못미쳤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제가 이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제가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중의 하나라서 친구들끼리 모여 무서운 이야기를 나눌때면 항상 해주는 이야기가 바로 '눈속의 하룻밤'과 비슷한 이야기였던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이렇합니다.
'4명의 친구들이 담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어느 흉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막상 흉가로 들어간 친구들은 너무 무서웠고, 그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서 게임을 하기로 합니다. 각자 방의 모서리에서서 다른 모서리의 친구의 등을 치면 그 친구는 다음 모서리의 친구 등을 치고... 그렇게 한참 동안을 게임을 하던 그들은 그만 공포에 사로잡혀 죽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방에 4명의 친구들이 아닌 다른 한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묘미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마저도 4명의 친구들이 했던 게임이 4명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당연히 이 게임이 4명이서 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마지막에 이 게임은 5명이서만 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때는 오싹한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눈속의 하룻밤'은 비록 제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보다 뼈와 살을 붙여서 더욱 무섭게 변모했으며, 집단 환각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이용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공포의 골자는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똑같은 것이었기에 제게 그리 큰 공포를 안겨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눈속의 하룻밤'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른 친구들을 위해서 모르는 척하며 들어야만 하는 곤욕스러움과 비슷한 느낌을 제게 안겨주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 - 사무라이의 핸드폰
'사무라이의 핸드폰'은 먼 미래에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내기위해 과거 역사속의 인물에게 핸드폰을 보낸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황당하지만 기발한 설정은 '사무라이의 핸드폰'을 [기묘한 이야기]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에피소드로 탈바꿈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사무라이의 핸드폰'의 주인공은 오시이 장군(나카이 키이치). 그는 300여년전의 인물로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사무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시이라는 인물이 제게는 너무나도 낯설다는 겁니다.
이 영화속의 오시이는 소심하고 한심한 그런 인물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핸드폰이라는 미래에서 온 물건을 줍게되고 핸드폰 속의 미래인과 대화하다가 결국엔 자신도 모르게 역사적인 인물이 된다는 그런 설정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역사의 재해석이라는 신선함과 함께 미래의 행위로 인하여 과거가 결정되는 아이러니를 그려냅니다. 그렇기에 이 에피소드는 꽤 신선하고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속의 주인공이 오시이라는 낯설은 사무라이가 아니라 우리들도 잘 아는 그런 역사속의 인물이었다면 저말 기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물론 [기묘한 이야기]는 일본 영화이기에 그러한 제 바램은 욕심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오시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사무라이의 핸드폰'에 대한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서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가장 많이 노출되었기에 이 에피소드의 기발함과 신선함은 오히려 영화를 보는 그 순간에는 떨어지는 악효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은 저의 진정한 적인 듯 합니다. 하지만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것을... -.-
사랑 이야기 - 결혼가상체험
이제 남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영화의 광고지에서 자신만만하게 밝히는 '결혼가상체험' 뿐입니다. 이 에피소드엔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중에서 그나마 국내에서 얼굴이 알려진 [러브레터]의 미소년 카시와바라 다카시가 등장하여 좀더 친숙한 느낌을 줍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인 유이치(카시와바라 다카시)와 치하루(이나모리 이즈미)는 웨딩 컨설턴트 회사의 신상품인 결혼가상체험을 하게 됩니다. 서로의 DNA를 추출하여 그들의 출생과 성격등을 분석한 후,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가상으로 체험하게하는 이 프로그램은 유이치와 치하루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결국 두사람은 결혼가상체험을 받게됩니다. 하지만 가상체험속의 결혼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만큼 달콤하지는 않았으니...
'결혼가상체험'은 마치 SF적인 느낌과 사랑 이야기가 결합된 듯한 인상을 풍기는 깔끔한 드라마입니다. 멜로 드라마답게 이쁘고 잘생긴 주인공들을 내세워 그들의 사랑을 알콩달콩 그려나가는 이 에피소드는 꽤 정겨운 느낌을 전해 줍니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의 광고지가 주장한 '세상에서 가장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런지...
유이치와 치하루의 사랑 이야기는 분명 사랑스러웠지만 이들의 이야기가 과연 기묘한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인지 의심스럽군요. 솔직히 '결혼가상체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인 사랑을 소재로 한 것외에는 그리 주목받을 수 있는 에피소드는 아닙니다. 이 에피소드가 내세운 기묘한 이야기라는 것이 고작 결혼 가상 시뮬레이션인데, 눈보라치는 산속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의 공포를 그린 '눈속의 하룻밤'과 과거에 떨어진 핸드폰 이야기인 '사무라이의 핸드폰'과 비교한다면 결혼 가상 시뮬리에션은 오히려 평범하게만 보입니다.
이렇게 TV의 단막극에서 본 듯한 설정의 이 에피소드는 가장 일반적이며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기에 오히려 [기묘한 이야기]라는 이 영화의 타이틀과는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가장 어색한 에피소드가 되고 말았습니다.
보너스 이야기 - 체스
사실 [기묘한 이야기]는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이 된 옴니버스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국내 개봉이 되면서 3번째 에피소드인 '체스'가 삭제되고, 3개의 에피소드로 재구성이 되어서 개봉하게 된겁니다. '체스'가 삭제된 이유가 이 에피소드가 [기묘한 이야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국내 수입사의 말도 안되는 판단때문인지, 아니면 영화의 상영시간을 줄여 1회라도 더 상영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혐오스러운 상술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체스'의 삭제는 [기묘한 이야기]의 가장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국내 관객에게 빼앗아버리는 행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체스'는 슈퍼 컴퓨터에게 체스 게임을 져버린 체스 챔피온의 방황을 그린 에피소드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체스와 현실을 교묘하게 대치시켜놓고 방황에 빠진 체스 챔피온에게 승리와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 중에서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솔직히 이 에피소드는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억지 상황 설정으로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만 지워버린다면 '체스'는 [기묘한 이야기]라는 영화의 타이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에피소드입니다. 체스에서 지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이기자니 사랑하는 여인을 희생해야하는 챔피온의 갈등은 분명 이 에피소드가 말도 안되는 단지 '기묘한 이야기'일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 웃기는 이야기, 사랑 이야기를 차례대로 펼쳐보여 줌으로써 옴니버스 영화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이 영화는 그러나 제게는 [기묘한 이야기]라는 영화의 제목만큼 그리 기묘하지 못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는 알고 있었던 이야기이고, 웃기는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이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으며,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도 평범했기에 이 영화는 재미는 있었을지언정 깊은 밤, 친구들끼리 모여앉아 나누었던 그 기묘하고 등골 오싹한 이야기들을 재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영화보다 좀 더 '기묘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어디 그런 이야기없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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