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에드 해리스
개봉 : 2003년 2월 21일
또 옛날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옛날 이야기하는 것에 재미들렸습니다. ^^;)
제가 한참 사춘기 시절에 접어들어 낭만적인 시와 비극적인 연애소설에 푹 빠져서 하루하루를 보냈던 그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중 하나가 바로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였습니다. 특히 저는 '목마와 숙녀'중에서도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는 귀절을 가장 좋아했었습니다. 이 귀절에 담겨진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채 그냥 이 귀절이 너무나도 멋있어 보였던 겁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제 무지한 관심은 아주 당연하게도 버지니아 울프라는 미지의 인물에게로 옮겨 졌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그가 어떠한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박인환 시인이 한잔의 술을 마시고 그의 인생을 이야기하자고 했을만큼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냥 막막하게 상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나의 책상에서 '세월'이라는 아주 지루해보이는 한권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엔 분명히 '지은이 버지니아 울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최근에 [디 아워스]가 개봉되고나서 안 사실이지만 '세월'의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가 아닌 마이클 커닝햄이더군요. 과연 출판사에서 책을 팔아먹기위해 '세월'을 버지니아 울프가 쓴 것처럼 위장하는 사기행각을 펼친 것인지, 아니면 버지니아 울프에 과도하게 매료되었던 제가 나 자신도 모르는채 마이클 커닝햄이라는 이름을 무시하고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에만 집착하여 내 스스로 기억력을 조작한 것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월'을 결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극적인 연애소설에 빠져있던 제게 '세월'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었던 겁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에 매료되어 몇번이고 '세월'을 읽기위해 도전을 했지만 10페이지도 채 넘기지 못하고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는 '세월'을 읽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아마도 '세월'을 사온 누나 역시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 책은 꽤 오랫동안 새책처럼 가지런히 책꽂이에 꽂혀있다가 어느날 무관심속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속의 버지니아 울프는 단지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에 잠시 이름이 언급되었던 여류 소설가라는 아주 단순한 이미지만 남아 버린 겁니다. 물론 그녀의 이름에서 풍기는 묘한 뉘앙스는 여전히 절 매료시켰지만... 그렇게 버지니아 울프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만으로도 절 매료시켰으면서도, '세월'이라는 책이 안겨준 심오함에 대한 처절한 패배의 충격때문에 제게 은근히 외면당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디 아워스]는 바로 그러한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제 앞에 불러들인 겁니다. 그것도 내 스스로 책벌레라고 믿고 있었던 그 시절의 제게 패배를 안겨준 그토록 어렵고 지루했던 '세월'을 원작으로하여...
[디 아워스]는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월'을 결코 읽지 못한 저로써는 이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멋지게 영화로 옮겼는지에 대해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 단지 박인환 시인의 시로 인한 추상적인 이미지만을 간직하고 있던 저는 [디 아워스]가 버지니아 울프를 완벽하게 영화속으로 부활시켰는지도 솔지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는 있는 것은 단지 제 상상속에서만 존재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가 [디 아워스]를 통해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제게 다가왔다는 겁니다.
[디 아워스]는 1941년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가 주머니속에 돌을 가득 넣고 강물속에 서서히 걸어들어가 목숨을 끊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1951년 LA의 평범해보이는 가정 주부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을 잠시 비춰주고, 다시 1923년으로 돌아가 영국 리치몬드 교외의 버지니아 울프, 2001년 미국의 뉴욕의 출판 편집자인 클라리사 보간(메릴 스트립)의 하루를 보여줍니다.
이렇듯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속에 살고 있는 세명의 여성들의 아주 특별한 하루를 그린 이 영화는 그렇기에 제가 기대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그린 전기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천편일률적인 전기 영화보다도 더욱 세심하게 버지니아 울프를 잡아 냅니다. 바로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적인 소설을 매개체로 하여...
이 영화속에 등장하는 세명의 주인공은 모두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인 '델러웨이 부인'으로 하나로 묶습니다. 1923년의 버지니아는 이제 막 '델러웨이 부인'의 집필을 시작하였고, 1951년의 로라는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에 푹 빠져 있으며, 2001년의 클라리사는 에이즈로 죽어가는 옛 애인인 리차드(에드 해리스)에게 '델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워 집니다. 버지니아가 '델러웨이 부인이 말한다 꽃을 사러가자고...'라고 쓰면, 로라는 '델러웨이 부인은 꽃을 사러 가자고 말한다'라고 읽고, 클라리사는 '꽃을 사는게 좋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형식입니다. 이런 교묘한 교차편집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세명의 여성을 하나로 묶는 기발한 효과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버지니아 울프, 한사람에게 그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세명의 여성에게 포커스를 맞추며 지루해질 수 있는 전기 영화의 형식을 살짝 벗어났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제겐 단지 박인환 시인의 시속의 이미지로 머물러있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가 아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이 영화의 효과가 탁월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디 아워스]를 보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해했단 말이지? 그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가 어떻던???'하고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전 솔직히 할말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속의 세 여인(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 클라리사 보간)중에서 두여인(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의 심정은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듯 합니다.
제가 보기엔 버지니아 울프와 로라 브라운은 상당히 공통점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버지니아의 남편인 레나드(스티브 딜란)는 분명 버지니아를 끔찍히도 사랑했습니다. 어느 영화 사이트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일생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보니 레나드는 버지니아와 결혼하기위해서 자신의 거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더군요. 버지니아와의 잠자리마저도... 하지만 버지니아는 레나드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버지니아를 바라보는 레나드의 그 간절한 눈빛과는 다르게 레나드를 바라보는 버지니아의 그 냉정한 눈빛이 더이상 긴 설명이 필요없게 그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해 줍니다. 보수적인 사회의 분위기속에서 여성의 복종적인 삶을 살기를 거부했던 이 당찬 여인은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혼이라는 관습에 얽매인채 자신의 건강을 이유로 자신의 삶을 구속하려하는 레나드의 품에서 결코 헤어나올 수 없었던 겁니다. 결국 영화의 오프닝씬처럼 강물에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는 어쩌면 남편에게 세상에서 가장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결코 그 사랑에 행복하지 못했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버릴 수 없었기에 그 결혼이라는 구속속에서 너무나도 불행했던 삶이었던 겁니다.
로라 브라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남편인 댄(존 C. 라일리)의 로라를 향한 극진한 사랑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해 보입니다. 이 영화는 자신의 생일날 아침, 로라가 피곤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녀를 깨우지도 못하고, 로라가 생일 파티 준비를 해야한다는 말을 들으며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짓는 댄의 소박한 모습만으로 로라를 향한 댄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로라는 결코 댄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라는 의무감 때문에 댄의 생일 케잌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행복감따위는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그대로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댄의 케잌을 만든 겁니다. 결국 버지니아 울프처럼 죽음으로써 자신을 구속하는 여성의 삶에서 탈출하려했던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거짓같은 삶속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통해서 이 영화는 말합니다. 로라 역시 자신을 얽매인 삶속에서 도망을 쳤다고... 비록 버지니아 울프와는 다른 방법이었지만 그녀 역시 그렇게 결혼이라는 관습에서 탈출을 한겁니다.
결코 남편을 사랑하지도... 자신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도 않은 버지니아와 로라의 그 무표정한 표정을 보며 왠지 모를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냉정하게 버리고 자신의 삶에서 탈출을 하는 그녀들의 마지막 선택에서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그녀들에겐 가족에 대한 의무감보다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더욱 중요했던 겁니다.
제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디 아워스]를 보고 느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는 제겐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초반을 엄습하는 졸음을 애써 참고, 점차 세 여인의 폭풍과도 같은 하루에 나도 빠져들며 영화를 감상했던 저는 저로써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섬뜩한 충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충격을 받은 부분은 바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버지니아와 로라의 공통점을 쉽게 찾은것과는 반대로 클라리사의 하루 동안의 시간속에서 그녀가 리차드에게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진다는 사실외에는 버지니아와 로라와의 별다른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한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영화는 결국 클라리사가 버지니아와 로라에게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마지막 숨겨둔 장면을 통해서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이 세 여인은 영화의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교묘한 교차 편집과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단순한 소설로 연관되어 진 것이 아닌 좀더 복잡한 실타래속에서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겁니다.
1923년의 버지나아는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소설 '델러웨이 부인'을 통해서 표현했으며, 1951년의 로라는 버지니아의 '델러웨이 부인'을 통해서 자신의 불행한 인생에서 과감한 탈출을 한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로라의 탈출은 2001년의 클라리사와 리차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리차드는 바로 로라가 자신의 행복을 되찾기위해서 버려야만 했던 아들이었던 겁니다. (이 사실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주저함이 있었지만 이 영화는 결코 마지막 반전에 의한 영화가 아니며, 단지 스토리를 읽고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영화의 재미가 반감이 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과감하게 반전이라고 한다면 반전일 수도 있는 이 사실을 밝힙니다.)
결국 클라리사와 그녀의 전 애인인 리차드는 로라의 선택으로 인하여 남겨지고 버려진 사람들의 그 끔찍한 인생에 대한 모습이었던 겁니다. 아마도 버지니아의 죽음으로 인하여 남겨지고 버려진 레나드 역시도 리차드처럼 남은 인생을 황량하게 살았을 겁니다. (잘은 모르지만... ^^;)
하지만 리차드의 죽음으로 인하여 클라리사의 집에 방문한 로라의 표정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다시한번 그날로 되돌아 간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그러한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품은 듯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그 남겨진 가족들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이 냉혹한 여인들에게 하지만 저는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그녀들의 선택에 동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녀들을 이해할 수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10여년동안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통해서 그토록 궁금해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 영화를 통해서 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춘기의 그 낭만적인 감수성으로 상상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는 전혀 맞지않은 어찌보면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충격적인 그녀의 생애는 [디 아워스]가 올해 보았던 영화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며 인상적인 영화로 제게 기억되게끔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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