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알렉산더 페인
주연 : 잭 니콜슨, 캐시 베이츠, 더모트 멀로니, 호프 데이비스
개봉 : 2003년 3월 7일
영화를 보려면 한밤중에 감기는 눈꺼플을 애써 참으며 그렇게 고문하듯이 봐야합니다. 영화 이야기를 쓰려면 영화를 보고 싶은 유혹을 애써 뿌리치고, 역시 졸음을 참아가며 겨우 써나가야 합니다.
저희 회사의 출근 시간은 8시 30분. 다른 회사보다 30분 일찍 출근하기에 퇴근 시간도 30분이 이른 5시 30분입니다. 하지만 입사한지 3주가 되어 가지만 5시 30분에 퇴근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딱 한번 봤습니다. 모두들 뭐가 그리도 바쁜지 7시가 넘어도 퇴근할 생각을 안합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퇴근 시간이 되면 조급해지는 것은 저뿐입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남들보다 30분이나 일찍 출근한 보람도 없이 5시 30분이 넘어도 퇴근 못하는 심정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혼자 퇴근하겠다고 나서기에도 신입 사원주제에 눈치가 보이고... 그래서 예의상 6시 30분정도에 퇴근을 합니다. 하지만 집과 회사가 서울의 정반대에 위치해 있으니 집에 돌아오면 거의 8시입니다. 씻고 저녁 식사를 하고나면 9시가 훌쩍 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양호한 편에 속합니다. 한달뒤 결혼을 할 예정이다보니 뭐가 그리도 준비할 것이 많은지 나의 그녀는 거의 매일 퇴근 시간에 맞춰 절 호출합니다. 가전 제품을 사기 위해서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가격을 비교해야 하고, 신혼집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식장, 신혼 여행등등 아무리 준비를 해도 끝이 안보입니다. 그렇게 그녀와 결혼 준비를 한후 저희 집과는 정반대 방향인 그녀의 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면 어느덧 11시... 몸은 피곤하지만 영화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 앉는 날도 있지만 대개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자기 일쑤입니다.
그러다보니 보고 싶은 영화는 쌓여있는데 볼 시간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이제 결혼까지 하고나면 더욱 영화 볼 시간이 없어질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영화를 잃어가고 있지만, 대신 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나의 그녀가 곧 나의 사람이 되기때문입니다. ^^;
이렇듯 바쁜 시간을 가까스로 내서 겨우 본 영화가 바로 [어바웃 슈미트]입니다. 오랜만에 그녀의 집에 바래다 주지 않고, 배고프다는 핑계로 일찍 집에 돌아왔던 지난 일요일... 너무나도 피곤해서 그냥 잘까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보지 않으면 영원히 볼 시간이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겨우 지친 몸을 지탱하며 영화를 봤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저는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바웃 슈미트]는 그만큼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영화였으며, 이 영화를 보는 그 순간 졸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제 입가엔 미소가 그리고 제 눈가엔 눈물이 맺혔습니다.
[어바웃 슈미트]는 평생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은퇴를 하게 된 워렌 슈미트(잭 니콜슨)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최근의 다른 영화들처럼 자극적이지도 않고, 포복절도할 웃음이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눈물따위는 결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스토리는 겨우 정년 퇴직을 한 웨렌의 일상을 과장없이 그려낸 것에 불구하지만 그러한 잔잔한 스토리는 오히려 제게 영화를 보는내내 끊임없이 미소를 짓게 했으며,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텅빈 사무실에서 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고집스러운 중년 남자 워렌 슈미트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시계가 퇴근 시간을 알리자 주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워렌... 그날이 바로 워렌의 정년 퇴임날이었던 겁니다. 영화는 곧바로 회사 동료들이 워렌을 위해서 마련해준 떠들썩한 파티로 카메라를 옮기고, 그곳에서도 워렌은 결코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은퇴식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제 워렌은 자신의 일평생을 지배해온 바쁜 생활의 방식에서 해방됩니다. 하지만 워렌에게 있어서 그것은 해방이라기 보다는 또다른 구속에 불과합니다. 출근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지만 이제 더이상 출근할 회사도 없고, 바쁜 일상도 없습니다. 아내는 못생기고 뚱뚱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으며, 딸아이는 이상한 놈과 결혼하겠다며 결혼 준비를 서두릅니다. 바쁜 사회 생활때문에 뒤돌아보지 못한 그의 가족은 그렇게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어느새 흘러가 있었고, 이제 정년 퇴임으로 인하여 가족을 뒤돌아볼 시간이 생긴 그에게 가족들은 더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워렌의 그 쓸쓸한 모습이 왠지 30여년 후의 내 모습같아서 결코 웃으며 이 영화를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은퇴하고, 가족들에게 소외된 30여년 후의 내 모습이 이 영화의 초반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찡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워렌이 얼굴도 모르는 탄자니아의 은둔구라는 소년에게 후원금을 보내며 짧은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부터 찡함은 어느새 미소로 바뀌고 있었던 겁니다.
처음엔 은둔구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아주 개인적인 편지였으나 차츰 아내에 대해서, 사윗감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직장의 애송이 후임자에 대해서, 독설로 이어지는 그의 편지는 초반을 조금은 축 늘어진 기분으로 시작한 영화의 분위기를 완전히 UP시켜 줍니다. 정년 퇴임을 맞이하고 기가 꺾여 있었던 잭 니콜슨의 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모습이 이 부분에서부터 다시 독설로 가득차고, 활기찬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겁니다. 저는 이제 뭔가 워렌의 유쾌한 심통이 시작되려나 보다하며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영화를 응시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이 영화는 미소에서 찡함으로의 변화를 시도합니다. 워렌의 심통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 듯이 보이던 그의 아내가 갑자기 어처구니없이도 죽음을 맞이한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영화는 다시 한없이 DOWN되기 시작합니다. 워렌은 아내의 빈자리를 새삼느끼며 쓸쓸함과 외로움에 그렇게 하염없이 젖어 들었던 겁니다.
[어바웃 슈미트]는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내내 그런 식으로 UP과 DOWN을 반복합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빠져있는 워렌의 모습에서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다가도, 그가 엉뚱한 심통을 서슴없이 저지를 때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너무나도 완벽한 찡함과 미소뒤에는 어김없이 잭 니콜슨이라는 듬직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헐리우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연기파 배우인 그는 마치 워렌 슈미트의 모습이 바로 잭 니콜슨 그의 모습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쓸쓸하고, 외로우며, 때론 엉뚱한 심술로 가득찬 워렌의 모습을 연기합니다. 그가 축 늘어진 어깨를 선보일때면 저는 찡한 느낌을 받았고, 그가 심술 가득찬 표정으로 엉뚱한 일을 저지를때면 나도모르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한마디로 잭 니콜슨은 이 영화를 통해서 웃음과 눈물이 같은 번갈아가며 찾아오는 묘한 느낌을 제게 선사해 주었던 겁니다.
이렇게 찡함과 미소속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저를 웃기고 울렸던 이 영화는 마지막엔 이 영화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으로 마무리 합니다.
워렌은 젊었을땐 자신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고 말합니다. 위인전의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들처럼 사람들의 생애를 바꿀만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인생의 황혼기에서 뒤를 돌아본 그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의 생애를 바꿀만한 대단한 일은 커녕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평생을 바쳐서 일한 직장에서는 그가 정년 퇴임을 하자마자 젊은 인재로 그 자리를 메꿔버립니다. 자신이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워렌은 의기양양하게 회사를 찾아가지만 회사에서는 더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과 진정한 우정을 나눴다고 믿었던 친구는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적이 있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아내기도 하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외동딸 지니(호프 데이비스)는 왠 이상한 녀석과 결혼한다며 그의 외로움을 모르는척 합니다. 지니마저 떠나보내고 홀로남은 워렌은 결국 자신의 인생이 아무 가치없는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에 허탈감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 순간 77센트라는 푼돈으로 그냥 심심풀이 하듯이 후원을 했던 탄자니아의 소년 은둔구에게 편지가 옵니다. 그리고 워렌은 그 순간 엄청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77센트라는 그 작은 돈이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결국 젊었을때부터 그렇게 소망했던 워렌의 야망은 애초에 그렇게 거창하지도,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던 겁니다. 자신의 진심이 담긴 편지와 행동이 결국 그의 소망을 이루게 한겁니다.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거창하고 위대한 행동이 아닌 진심이 담긴 소박한 행동이라는 이 영화의 주제는 잭 니콜슨의 완벽한 연기와 더불어 울고 웃다가 그렇게 잔잔하게 제 가슴속에 파고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니 저도 더 늦기전에 진심된 행동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라도 내러 갈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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