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3년 영화이야기

[이중간첩] - 거역할 수 없는 주제의 무거움.

쭈니-1 2009. 12. 8. 15:51

 



감독 : 김현정
주연 : 한석규, 고소영, 천호진, 송재호
개봉 : 2003년 1월 24일

1월 25일 김포 공항의 엠파크9이라는 새로 생긴 극장을 탐방했던 저는 내친 김에 용산 전자상가의 전자랜드내에 새로 생긴 랜드시네마도 탐방을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랜드시네마는 오픈 기념으로 1,500원 할인 행사를 벌이고 있었으며, 맥스무비라는 사이트를 이용하여 지정 할인 카드로 예매시 2,000원을 추가로 할인해줘서 영화 한편을 3,500원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저희 집에 놀러온 사촌 동생과 랜드시네마로 [이중간첩]을 보기로 한 저는 내친김에 조조할인으로 영화를 보자고 사촌 동생을 꼬셨습니다. 조조할인으로 영화를 볼 경우 1,500원을 추가로 할인해줘서 한명당 2,000원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겁니다. 예매 수수료가 나온다고 해도 둘이서 4,800원. 영화 한편 값도 안되는 돈으로 둘이서 영화를 볼 생각을하니 얼마나 뿌듯하던지...
그러나 문제는 영화를 보기로 한 27일날 아침에 발생했습니다. 아침에 늦어도 8시 30분에 일어나 9시 30분전에는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백수생활에 익숙하다보니 9시까지 자고 말았습니다. 대강 씻고 지하철을 탔지만 용산역에 도착한 시간은 영화 시작 10분전인 10시 20분. 빨리 랜드시네마로 가면 영화가 시작하기전에 도착 할 수 있었지만 타고난 길치인 저는 처음가보는 랜드시네마를 쉽게 찾지 못했고, 결국 헤매다가 10시 40분에야 극장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중간첩]의 오프닝씬인 김일성광장에서의 장대한 사열장면을 놓치고, 림병호의 탈출장면에서부터 영화를 봤습니다. 이렇게 돈을 아끼려다가 영화의 초반을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랜드시네마는 극장으로써 합격점을 받을만큼 괜찮았습니다. 스크린도 그런대로 크고, 의자도 편했습니다. 아직 편의 시설이 완전하지는 않고, 매표소의 여직원이 별로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 보완해 나간다면... ^^;


 


  
일단 [이중간첩]은 제게 그리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너무 무거운 주제를 시종일관 무겁게 이끌고가서 저는 영화를 보는내내 갑갑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게 제목을 빗대어 '이중고충'이라는 극단적인 악평을 쏟고 싶은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이 영화가 제가 미처 모르고 있었던 80년대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그때 저는 초등학생이었고, 중학생이었으며,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저는 1982년에 개막된 프로 야구에 푹 빠져서 프로야구 경기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고, 영화를 이제 막 좋아하기 시작했으며, 여자를 처음으로 사귀었습니다. 소설을 쓰겠다며 수업시간에 노트를 꺼내놓고 언제나 비극으로 끝나는 멜로소설을 썼으며, 펜팔할때 활용하기위해 낭만적인 시가 가득담아져 있는 시집을 몇권씩 가지고 다녔었습니다. 그렇게 1980년대는 제게는 낭만적이고, 활기찼으며, 모든 것이 아름답고, 새로웠습니다.  
하지만 며칠전 공지영의 '고등어'라는 소설을 읽고 1980년대를 저와는 다르게 살았었던 사람들이 있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깨달었습니다. '고등어'는 1980년대를 노동운동으로 보냈던 사람들의 힘겨운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었는데, 그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1980년대를 너무나도 힘겹게 보내더군요. 그때서야 저는 제 기억속에서 잊혀져 있었던 그 시절 거의 매일같이 벌어지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기억이 났습니다. 최루탄 가스에 몸을 피하며 영문도 모르는 시위에 짜증을 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제가 프로야구와 영화에 빠지고, 여자와의 펜팔을 위해 시집을 들고 다녔던 그 시절, 한쪽에선 그렇게 살기위해 목숨을 걸고 공권력에 맞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몽정기], [품행제로]등 1980년대를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들이 저처럼 1980년대를 낭만적이고, 행복하게 보낸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면, [이중간첩]은 1980년대를 힙겹게 보낸 또다른 우리들의 이야기인 겁니다. 1980년대에 성에 대한 야한 상상에 잠못이루고, '스잔'과 '경아'를 들으며 롤러 스케이트장에서 젊음을 보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조국분단과 냉전의 차가움속에 젊음을 파묻었던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이중간첩]은 이렇게 1980년대를 즐겁게 회상하며 흥행에 성공한 다른 코미디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겁고 진지하게 그리고 절망적으로 우리가 겪었던 1980년대의 또다른 모습을 회상한 겁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남과 북... [이중간첩]은 이전의 남과 북을 소재로 한 영화들과는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이 영화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1999년 [쉬리]는 그 동안 감추기만 했던 남과 북이라는 소재를 대담하게 스크린 속으로 이끌어내며 우리 영화로는 파격적인 액션과 슬픈 사랑으로 전국에서 500백만이 넘는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초소에서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의 훈훈한 우정을 이야기하며 '결국 우리는 한민족이다'라는 가슴 뭉클한 메세지를 남겼었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휘파람 공주]에선 김정일의 딸과 남한의 한 청년의 사랑을 로맨틱 코미디 형식으로 이끌어 나갔습니다.
이렇게 이젠 더이상 속으로 감추기만 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남과 북의 문제를 아주 당당하게 영화의 소재로 이용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중간첩]의 등장은 대단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중간첩]이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영화적인 재미보다는 비극적인 현실에 그 포커스를 맞추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중간첩]엔 [쉬리]와 같은 흥미진진한 액션도 없을뿐더러 가슴아픈 사랑따위도 없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가슴 뭉클한 휴먼 코미디를 표방하지도 않고, [휘파람 공주]처럼 관객동원을 위해 어이없게도 로맨틱 코미디를 꺼내들지도 않았습니다. [이중간첩]은 마치 영화적 재미를 철저하게 배제한 듯이 보일 정도로 흥행 성공을 위한 절대적인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 남과 북이라는 소재를 말도안되는 액션이나 순진한 코미디로 치장하지 않고, 마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풀어서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쉬리]의 히어로인 한석규의 출연만으로 [쉬리]처럼 극적이고 멋있는 액션영화를 예상했던 관객들에겐 상당한 배신감을 안겨줄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분명 이 영화에서 남과 북이라는 묵직한 주제의 무게감은 영화를 보는 2시간내내 관객들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인 김현정은 신인 감독답지 않게 뚝심있게 관객에게 말합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우리가 아름답고 낭만적인 1980년대를 보낼때 한켠에서는 남과 북의 이념에 부딪혀 그렇게 비극적으로 1980년대를 보내고 있었다고...
영화적인 재미가 결여된 남과 북이라는 소재... 그 소재의 무거움을 관객이 버텨내건, 그렇지 못하건, 그것은 관객의 몫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과거이며,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흥행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뚝심있게 밀어붙힌 이 영화에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남으로 위장 귀순한 북한군 장교인 림병호(한석규)와 남에서 활동중인 고정간첩 윤수미(고소영)의 간첩 활동과 위험한 사랑을 아주 담담하게 잡아냅니다.
남으로 귀순하여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당하는 림병호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선과 악의 구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남으로 위장 귀순한 림병호가 선인지 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으며,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인다며 안기부의 지하 고문장으로 끌고가 혹독한 고문을 하는 남의 요원들도 선인지 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남에서 병원을 하며 환자들을 정성껏 돌봐주는 인심좋은 시골 의사 송경만(송재호)은 북의 임무를 수행하기위해 순진한 시골 아낙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며, 림병호가 남에서 자리잡도록 도와주는 안기부 요원 백승철(천호진)은 림병호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결국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선과 동시에 악입니다. 이념을 떠나 인간적인 면모로 보면 분명 선인데, '조국을 위해'라는 단서가 붙어버리면 악으로 돌변합니다. 이것은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결국 남과 북의 사람들이 문제가 아닌 겁니다. 남과 북을 둘로 갈라버린 허황된 이념이 문제인 겁니다.
그러한 이 영화의 주제는 영화가 후반으로 흐르면서 더욱 확고해 집니다. 남에서 활동중인 북의 요원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두명의 주인공인 림병호와 윤수미가 이념에 사로잡혀 임무를 수행하던 영화의 초반은 너무나도 무미건조하게 흘러갑니다. 관객들은 림병호와 윤수미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들의 편이 되어 줄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분명 악이라는 것을 알기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념이라는 무거운 짐을 던져버리고 단지 인간으로써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살기위해 타국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그 순간 관객들은 진정으로 림병호와 윤수미의 편이 되어 그들이 타국으로 안전하게 탈출하기만을 바라게 되는 겁니다. 그 순간 더이상 우리의 조국인 남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이념을 버리고 살기위해 탈출을 시도하는 림병호와 윤수미만이 선인 겁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같은 민족이면서 남과 북의 이념속에서 비극적인 사랑을 해야만 했던 두 주인공을 비춰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당신은 구별할 수 있겠냐고... 이것이 제가 이 영화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는 세번째 이유입니다.
[이중간첩]은 이렇게 영화적인 재미를 떠나서 1980년대와 지금의 우리 조국의 현실을 진지하게 재조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제의 무거움은 2시간내내 절 괴롭혔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이제 우리도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