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장예모
주연 : 이연걸, 양조위, 장만옥, 장쯔이, 견자단, 진도명
개봉 : 2003년 1월 24일
1월 24일... 설날을 겨냥한 대작 영화들이 한꺼번에 개봉되었습니다.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톰 행크스가 만난 [캐치 미 이프 유캔]을 비롯하여, 세계 영화계가 인정한 장 예모 감독과 중국의 유명 배우인 이연걸, 양조위, 장만옥 등이 한꺼번에 출연한 [영웅], 그리고 오랜 침묵을 깨고 돌아온 한석규와 고소영의 만남만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중간첩]. 미국, 중국, 한국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저마다 폭발적인 흥행성을 가지고 있는 이 세편의 영화는 개봉과 함께 오랫동안 대작 영화에 굶주려있던 제겐 상당한 호기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이 세편의 영화를 모두 보겠다는 계획을 세운 저는 이 영화들에 대한 기대치의 순서에 따라서 영화의 관람 순서를 정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제일 먼저 보게 된 영화가 [캐치 미 이프 유 캔]이었으며, 예정대로였다면 그 다음 순서는 [영웅]이었고, 마지막이 [이중간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 계획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계획대로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1월 25일 본 저는 1월 26일 [영웅]을 보기위해 예매사이트에 접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웅]의 예매표는 전부 매진 상태였고, 할수없이 26일에 현장에 직접가서 영화표를 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때마침 일어난 인터넷 대란으로 극장에선 영화 매표 업무가 마비가 되어 버려 저는 헛걸음질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10분정도의 타이밍으로 다음회를 기다려야 하는 불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26일엔 [영웅]보기를 포기해야 했으며, 그러던중 [이중간첩]을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른 영화는 몰라도 [영웅]만큼은 제대로 된 극장에서 봐야한다고 우겼던 저는 기다림을 참지못하고 컴퓨터로 [영웅]을 보게되었습니다. 거대한 스케일과 그림같은 액션, 그리고 원색으로 가득채워진 색체... 예고편만으로도 제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던 [영웅]은 그렇게 컴퓨터의 작은 화면속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아마도 저와는 인연이 닿지않았던 2003년의 첫번째 영화로 기억될 것입니다.
[영웅]은 일곱개의 국가가 광활한 중국대륙을 통일하기위해 자웅을 겨루었던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잔인한 폭군인 진나라의 영정(진도명)을 암살하려는 조나라의 암살자들에 대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암살자들의 암살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다는 암살자들에 대한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진실게임을 제안합니다.
이 영화의 화자인 무명(이연걸)이 영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와 무명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반박하는 영정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이어서 암살자들에 대한 진실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렇게 하나의 상황을 가지고 이어지는 세개의 이야기들은 각자의 색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명의 이야기는 빨간 색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영화를 같이 본 제 사촌동생의 말에 의하면 무명의 이야기가 새빨간 거짓말이기 때문에 빨간 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더군요. ^^;) 그에 반박하는 영정의 이야기는 파란 색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사촌동생에 의하면 파란색은 냉정하고 차분한 판단력을 나타낸다는 군요. 게다가 빨간색의 대비색으로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에 무명의 이야기에 대한 정반대의 의견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암살자들에 대한 진실은 하얀색으로 그려집니다. (역시 내 사촌동생에 의하면 하얀색은 꾸밈없는 진실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색에 대해서 박식한 녀석같으니라고... ^^;)
이렇게 각 이야기에 대해서 각기다른 색체를 입힌 이 영화는 색체에 의해 캐릭터의 성격에도 그 영향을 미칩니다. 무명의 이야기속의 파검(양조위)과 비설(장만옥)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감정적인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그러한 파검과 비설의 감정적인 행위는 빨간 색체에 의해서 더욱 감정의 선이 격하게 표현됩니다. 그에 반에 영정의 이야기속의 파검과 비설은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묵숨따위는 포기할 수 있는 냉철한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 부분에서 파검과 비설은 개인적인 복수심과 전쟁으로인하여 핍박받고 고통받는 중국인들에 위한 행위의 대치속에서 고민하는 진솔한 면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색체에 의한 캐릭터의 성격 변화는 장예모 감독의 깔끔한 연출 솜씨와 더불어 관객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겨줍니다.
이러한 화려한 색체와 그로인하여 변하는 캐릭터의 성격 변화라는 조금은 낯설은 무협 영화를 선보인 장예모 감독은 그림과도 같은 액션씬들을 통하여 영화적인 재미를 획득해 나갑니다.
이미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액션 배우로써 각광을 받고 있는 이연걸은 이 영화의 화자이자 실질적인 주인공인 무명을 맡아서 화려한 액션을 펼쳐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선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액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견자단 역시 암살자중의 한명인 장천이라는 역을 맡아 이연걸과 그림같은 결투씬을 벌입니다.
이렇게 중국의 세계적인 액션배우들과 더불어 세계 영화제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중국의 배우들까지 가세하여 영화의 화려함을 돕습니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배우들로써 이 영화의 한축을 맡고 있으며, [와호장룡]으로 단번에 국제적인 스타가 되어버린 장쯔이 역시 그 역할은 미비하지만 조연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 냅니다.
이렇게 이젠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버린 중국 배우들의 출연은 '홍콩 영화는 이젠 한물갔다'라고 치부했던 국내 관객의 마음까지 움직일 정도로 그 파괴력이 꽤 큽니다.
그리고 이젠 세계가 인정한 배우들을 보유한 이 영화는 이들을 활용하여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액션 명장면들을 연출해 냅니다. 전 개인적으로 비설과 여월(장쯔이)이 벌이는 은행나무에서의 액션씬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은행나뭇잎의 노란색과 비설과 여월의 붉은 의상이 어우러진 이 액션씬은 [와호장룡]에서의 대나무숲에서의 액션을 능가할 정도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룹니다. 그 외에도 무명과 장천의 결투씬과 무명과 파검의 결투씬 등 이 영화가 보유하고 있는 인상적인 액션씬들은 홍콩의 무협 영화에 질릴대로 질린 제게도 나도모르게 탄성이 나오게 할 만큼 아름답고 인상적입니다.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등의 영화로 국제 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은 장예모감독은 어쩌면 그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큰 프로젝트일지도 모르는 [영웅]을 연출하면서 이처럼 이 영화를 흔하디 흔한 무협 액션 영화로 만들기보다는 좀더 사색적이고, 깊이있으며, 아름다운 액션 대작으로 만들기를 원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그의 시도는 분명 인상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예모 감독의 시도에서 왕가위 감독의 흔적이 묻어나는 것은 과연 나만의 느낌일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이 떠올랐습니다.
[동사서독]... 장국영, 양조위, 임청하, 장만옥, 장학우 등 당시의 홍콩 스타들이 총 출동한 왕가위 감독의 아름다운 무협 영화는 그러나 철저하게 영화의 스토리를 포기한채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운 영상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슬픈 내면 세계를 자아냄으로써 관객들에게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용조차 알 수 없는 어려움속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정서를 지니고 있는 [동사서독]에 매료되어 왕가위 감독의 열혈팬이 되었었습니다.
[영웅]은 분명 [동사서독]보다는 영화의 스토리에 충실한 영화입니다. 그렇기에 [영웅]은 분명 [동사서독]보다는 쉬우며, 관객과의 친밀도가 [동사서독]보다 휠씬 용이한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영웅]이 가지고 있는 인상적인 장면들과 액션씬들은 [동사서독]의 그늘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마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는 빠지지않았던 촬영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영입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크리스토퍼 도일은 특유의 화려한 카메라 기법을 통해 [영웅]을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무협 영화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작은 영화에서 그 능력을 발휘했던 장예모 감독의 영화에서 난데없이 왕가위 감독의 그늘이 느껴지자 약간은 당황스럽더군요. 마치 [패왕별희]의 첸 카이거 감독이 크리스토퍼 도일을 영입하여 만든 [풍월]을 보며 느꼈던 그 이유없는 실망감을 [영웅]에서도 느낀 겁니다.
장예모 감독이라고해서 분명 작고 아기자기하며, 중국의 근대사에 희생된 서민들의 이야기만을 다루라는 법은 없을텐데... 그의 영화에서 왕가위 감독의 흔적을 느끼고 아쉬워하는 나의 심정은 도대체 무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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