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마크 로마넥
주연 : 로빈 윌리암스, 코니 닐슨, 마이클 버턴
개봉 : 2002년 12월 6일
로빈 윌리암스... 그의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편안하다', '착하다', '재미있다' 정도일겁니다. 그의 데뷰작인 [뽀빠이]에서부터 [굿모닝 베트남], [죽은 사인의 사회] 그리고 최근작인 [패치 아담스], [바이센티니얼 맨]등 그의 출연작들을 살펴보면 '착한 어른'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잘어울리는 배우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1991년 [후크]라는 영화에서 어른이 된 피터팬역으로 로빈 윌리암스를 캐스팅하며 '피터팬이 어른이된다면 바로 로빈 윌리암스의 모습 그대로일것이다'라고 공언을 한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최근들어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썸니아]에서 선한 얼굴뒤에 악마적인 본성을 감췄던 살인자 핀치의 모습으로 절 깜짝 놀라게 했던 그는, 이번엔 행복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한 가정을 위험속에 빠뜨리는 싸이라는 캐릭터로 다시한번 연기변신을 시도했습니다.
[인썸니아]의 핀치가 그의 착한 이미지때문에 그 속에 감춰진 악마성이 잘 표현되지 않았다면, [스토커]의 싸이는 그의 착한 이미지와 행복에 대한 집착을 잘 버무린 스릴러 영화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새로운 캐릭터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영화의 화자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인 싸이(로빈 윌리암스)입니다. 영화는 싸이가 수사관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이야기하며 시작되고, 관객들은 가해자인 싸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겁니다.
일단 이러한 이 영화의 시도는 상당히 위험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장르가 스릴러이기 때문입니다. 관객의 감정이입이 가해자인 싸이에게 맞춰 진다는 것은 그만큼 관객들이 싸이를 이해하고, 가해자이긴 하지만 그를 동정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다시말해 이 영화에는 싸이의 엽기적인 범죄 장면이 없다는 것을 뜻하며, 스릴러 영화치고는 너무 밋밋하게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에 대해서 '지루하다'라고 평을 내린 대부분의 관객들의 의견은 이 영화가 스릴러치고는 너무 얌전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관객이 스릴러 영화에 바라는 것은 엽기적인 범죄행각을 벌이는 범인을 스스로 추리하고 잡았을때의 쾌감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엽기적인 범죄행각도 없을뿐더러 범인의 시점에서 영화를 이야기했기에 범인을 잡는 쾌감도 느낄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살리지 못했으니 분명 지루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겐 오히려 이러한 부분들이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지금까지 스릴러 영화에서 스토커는 평화로운 보통 가정을 파탄에 빠뜨리는 사회악이었으며, 평화로운 사회에선 없어져야 하는 악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악인을 이해하려 했다는 겁니다. 선하고 순진하기까지한 싸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평화로운 가정을 위협하는 사회의 악인 스토커가 되었는지 그의 외로움과 그를 악인으로 만들어 갔던 상황들을 이 영화는 싸이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무조건적인 악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사정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은 선인에게 촛점을 맞춰 그들이 어떻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가에만 관심을 두고, 그들을 위협하는 악인에 대해서는 죽어 마땅하다는 결론만을 성급하게 내립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악인도 처음엔 선인이었으며 악인이 되기까지 그럴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토커]는 지루한 스릴러 영화일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스릴러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영화가 이처럼 새로운 스릴러 영화가 되기위해선 먼저 관객들이 싸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해야 합니다. 관객들이 싸이를 이해못한다면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해하지 못할 악한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라고 강요하는 매우 불쾌한 영화가 될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때 악인이 분명한 싸이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이면엔 로빈 윌리암스라는 배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로빈 윌리암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착한 어른'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배우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싸이는 이러한 로빈 윌리암스의 이미지와 맞물려 전혀 위험해보이지 않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착한 이웃집 아저씨같은 인상을 풍깁니다. [인썸니아]의 핀치가 착한 얼굴뒤에 이해할 수 없는 악마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가 악한이라고 생각하기에 조금은 무리가 있었다면, [스토커]는 싸이를 아예 처음부터 그는 악한이 아닌 단지 외로웠던 선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정은 처음부터 관객에게 너무나도 잘 먹혀 들어갑니다. 관객들은 처음부터 너무나도 외로웠던 싸이를 동정하게 되고, 그가 욜킨 가족의 행복을 동경하며 그들의 가족 사진을 방안 가득 붙여 놓아도 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관객들은 로빈 윌리암스라는 너무나도 착해보이는 배우의 연기력으로 인하여 무리없이 싸이와 감정이입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서서히 싸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으며 그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는 다니는 직장에서 별 이유없이 쫓겨나게 되고,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욜킨 가족의 행복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러한 싸이가 느꼈던 허탈감을 함께 공유하며 그와 함께 공범이 되어 갑니다.
이렇듯 로빈 윌리암스라는 '착한 어른' 이미지의 배우를 통해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싸이라는 캐릭터를 관객에게 감정이입시킨 이 영화는, 분명 선인이며 피해자인 욜킨 가족을 통해 겉만 번지르한 미국 중산층의 거짓된 행복을 해부해 나갑니다.
실제로 관객에게 맨처음 소개된 욜킨 가족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이상적인 미국의 중산층의 모습이었습니다. 건실한 회사의 오너인 남편 윌 욜킨(마이클 버턴)과 너무나도 아름다운 부인 니나 욜킨(코니 닐슨) 그리고 귀여운 9살난 아들 제이콥 욜킨까지... 이 욜킨 가족의 모습은 내가 봐도 부러울정도로 거의 완벽한 행복을 갖추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러한 행복은 단지 겉모습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윌은 회사의 여직원과 불륜에 빠져있었으며, 니나는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합니다. 제이콥은 부모의 불화에 언제나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욜킨 가족의 거짓된 행복은 그대로 싸이의 범죄로 연결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인하여 행복한 가정을 경험하지 못했던 싸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이 원하는 가정을 이루지 못한채 너무나도 행복해보이는 사진속의 욜킨 가족을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의 이상형으로 삼고 살았던 겁니다. 그런 그에게 그들의 행복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 싸이의 은밀한 범죄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과의 감정이입이 된 캐릭터가 가해자인 싸이인 만큼 여느 스릴러 영화와 같은 엽기적인 범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싸이는 단지 자신이 가진 행복을 인식하지 못한 윌에게 그것을 인식시킴으로써, 욜킨 가족의 행복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싶었을 뿐이었던 겁니다.
그의 그러한 의도는 자신을 해고한 직장 상사에게 위협을 가하는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자신을 부당하게 해고한 그에게 위협적인 복수를 할만도 한데 그가 행한 것은 겨우 그의 어린 딸의 사진을 보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치밀하지도 못할 뿐더러 악의도 거의 없었던 겁니다.
윌의 불륜의 현장에서 싸이가 취한 행동 역시 [한니발]과 같은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스릴러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너무나도 밋밋한... 범죄라고 부를것도 없는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이 영화는 스릴러라는 장르의 법칙을 깨고, 관객이 스릴러 영화에 원하는 영화적인 재미를 배신하면서까지 새로운 스릴러 영화를 창조해 냈습니다. 관객들은 지금까지의 스릴러 영화가 촛점을 맞췄던 피해자인 선인의 모습이 어쩌면 거짓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무조건 제거되어야 하는 악인에게도 그만의 사정과 사연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불쾌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인정해야하며,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악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그렇기에 [스토커]는 재미없는 스릴러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히 새로운 스릴러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