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2년 영화이야기

[트랩트] - 규칙은 처음부터 깨져 있었다.

쭈니-1 2009. 12. 8. 15:34

 



감독 : 루이스 만도키
주연 : 샤를리즈 테론, 케빈 베이컨, 코트니 러브, 스튜어트 타운센드, 다코타 패닝
개봉 : 2002년 11월 29일  

나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군밤입니다. 추운 겨울... 새카맣게 잘 익은 군밤을 까서 그녀의 입속에 넣어주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전에 항상 집앞 전철역에서 군밤을 2천원어치 사갑니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면서 정성들여 군밤을 까며 그녀를 기다립니다. 저멀리서 그녀가 신이나서 뛰어오면 그녀의 입속에 얼른 잘 익은 군밤 한톨을 넣어 줍니다. 그리고 그녀의 그 해맑은 미소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요즘 제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지난 토요일...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면서 저는 언제나처럼 군밤을 파는 포장마차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포장마차는 닫혀 있었고 저는 어쩔수없이 빈손으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시청으로 향했습니다.
저멀리서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 그녀의 그 작은 입속으로 잘익은 군밤 한톨을 넣어주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제게 보여줄텐데, 안타깝게도 제 주머니속엔 군밤이 없었습니다. 어쩔수없이 숨차게 뛰어온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안아주는 것으로 그녀의 미소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녀와 점심 식사를 하고, 명동에 가서 영화 [트랩트]를 보는 그 순간에도 군밤을 맛있게 먹는 그녀의 천사같은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습니다. 결국 영화를 보고나서 군밤을 산 후 그녀를 바래다주는 버스안에서 군밤을 먹었습니다. 껍질이 잘 까져 있는 명동의 군밤 가게... 손에 까만 검뎅이를 묻히며 그녀를 위해 군밤을 까는 행복을 그날은 느낄 수 없었지만, 한봉지 가득한 군밤을 맛있게 먹는 그녀의 모습은 결국 볼 수 있었습니다.


 

 


[트랩트]... 제가 상당히 기대를 많이 했던 영화입니다.
[데블스 에드버킷]이라는 영화에서 압도적인 미모를 과시했던 샤를리즈 테른이 나오고, 출연하는 영화마다 멋진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케빈 베이컨이 나오며, [아이 엠 샘]에서 천사같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아역 배우 다코타 패닝이 나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래리 플린트]에서 '포르노도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것을 제게 가르쳐준 매력적인 여배우 코트니 러브의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한명도 아닌 네명이나 한편의 영화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흔치않는 기회이며 [트랩트]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제 기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메멘토]를 뛰어넘는 지능형 스릴러'라는 이 영화의 광고 카피는 오랫동안 스릴러 영화에 목말라 있던 저에겐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뛰어난 배우들과 벌이는 한판 두뇌 싸움... 정말 생각만해도 온몸이 짜릿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트랩트]는 분명 재미있는 영화이긴 했지만 영화의 광고 카피와 같은 지능형 스릴러는 아니었습니다. 나의 그녀는 이 영화를 이렇게 평을 하더군요. '스릴러 영화라기보단 액션 영화 같았다'라고... 이 영화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그렇습니다. [트랩트]는 유괴범과 아이를 유괴당한 부모간의 스펙타클한 액션 영화이긴 했지만 영화와 관객간의 불꽃튀는 두뇌 싸움을 벌일 지능형 스릴러 영화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속에 몰입하며 영화적인 재미를 실컷 만끽했지만 그것은 배우들의 매력적인 연기와 헐리우드 영화 특유의 관객 흡입력에 의한 것이었을뿐 결코 이 영화와의 두뇌 싸움을 하기위해 영화속에 몰입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결국 [메멘토]를 뛰어넘는다는 이 영화의 광고는 오히려 영화에 대한 기대를 다른 곳으로 유도했으며, 지능형 스릴러를 기대했던 저는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영화적인 재미를 망각한채 지능형 스릴러에 대한 목마름만 더 느끼고 말았던 겁니다.


 

 


이 영화는 3명으로 이루어진 유괴범들의 기상천외한 범죄 행각을 설명하며 시작합니다. 그들의 범죄는 세명이 한조가 되어 각자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 아버지를 맡아 다른 장소에 가두고 서로 30분마다 30초씩 통화를 하며 24시간안에 돈을 가로채는 완벽 범죄입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이렇게 유괴범들의 규칙을 설명하며 관객들에게 이 규칙을 지키며 아이를 무사히 구해보라는 게임을 제시합니다. 이제 관객들은 아이의 어머니인 캐런(샤를리즈 테른)과 감정이입이 되어 카리스마가 넘치는 유괴범 조(케빈 베이컨)에 맞서 조가 제시한 규칙을 지키며 아이를 구해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처음부터 발생합니다. 유괴를 당한 에비(다코타 패닝)는 천식환자여서 미세한 먼지에도 곧바로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여기서부터 조의 완벽해보이던 규칙은 서서히 무너집니다. 30분마다 30초씩 통화를 해야한다는 시간적인 규칙은 에비를 가두고 있는 마빈에게 에비가 천식 환자임을 알리는 과정에서 무너지고,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 아버지를 각기 다른 곳에 가두어야 한다는 공간적인 규칙 역시 에비에게 약을 전해주는 과정에서 무너집니다. 이렇듯 완벽해 보였던 조의 규칙이 무너지면서 이 영화는 지능적인 스릴러가 아닌 흥미진진한 액션 영화로 점차 변모해 나갑니다.
아이를 되찾기위한 캐런의 당찬 행동은 캐런과 감정이입을 했던 관객들을 당황시키며 저절로 캐런과의 감정이입을 풀게끔 만듭니다. 이렇게 캐런과의 감정이입을 본의아니게 풀게 된 관객들은 영화와의 두뇌 싸움보다는 아이를 되찾기위한 캐런 부부의 영웅적인 액션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감상하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영화의 후반 고속도로에서 벌어지는 경비행기와 차량간의 대규모 충돌씬에 이르면 이 영화의 흥미진진한 액션은 극에 달하게 되고, 관객들은 스릴러 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에 들어섰는지 액션 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에 들어섰는지 애매모호해 지고맙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지능형 스릴러라는 애초의 약속과는 다르게 점차 액션 영화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액션 영화로의 전환뒤에는 스릴러 영화와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캐릭터 성격이 한 몫합니다.
유괴범인 조와 세릴(코트니 러브) 그리고 마빈은 지능적인 스릴러에 어울릴만큼 완벽하지 못합니다. 범행 대상인 에비가 천식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조 일당의 범행이 허술했음을 알려줍니다. 만약 조가 에비의 약을 일찌감치 챙기기만 했더라도 이 영화와 관객간의 두뇌 싸움은 좀더 오랫동안 진행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조는 범행 대상의 병력조차 조사를 하지 않았으며, 그로인해 자신의 규칙이 무너지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오히려 캐런의 몸을 탐하는 어이없는 행동만을 일삼습니다. 세릴 역시 에비의 아버지인 윌(스튜어트 타운센드)의 설득에 간단히 넘어감으로써 오랜 시간동안 호흡을 맞춘 전문 유괴범과는 안어울리는 행동만을 일삼습니다. 그나마 약간은 편집증세가 있는 마빈이라는 캐릭터가 그 순진함속에 예기치 못한 위험함을 지니고 있어서 스릴러 영화의 캐릭터에 부합함을 보여 줬지만 그 역시 위험함은 너무 깊숙히 숨기고 순진함을 너무 관객에게 오랫동안 내비춰서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액션 영화로 비춰진데에는 유괴범인 조 일당보다는 피해자인 캐런과 윌이라는 캐릭터의 탓입니다. 캐런은 사랑스런 딸을 유괴당한 나약한 어머니와는 어울리지않게 너무 당차게 조에게 대항을 합니다. 그의 그런 행동이 에비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윌은 한술 더뜹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액션 영화다운 장면으로 손꼽히는 경비행기와 차량간의 충돌씬은 도저히 평범한 아이의 아버지가 할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가 트럭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의 위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경비행기를 트럭에 충돌시키는 그 대범함... 이건 액션 영화의 영웅들이 할 짓이지, 한 아이의 아버지가 할 짓은 분명 아닙니다. 저는 그 충돌 장면의 스펙타클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아이의 생명을 담보로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만약 이 영화에 스릴러에 대한 기대감을 빼버리고 액션 영화로 이 영화를 감상하려 한다면 영화적인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듯 합니다.
샤를리즈 테른은 아름다움과 강함을 함께 지닌 여전사로써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부합되며, 스튜어트 타운센드 역시 아이가 유괴를 당했다는 소식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영웅적인 행위를 완성하는 액션 영화의 영웅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적당히 악의적이며, 적당히 빈틈을 보이는 조역의 케빈 베이컨의 연기는 언제 보아도 든든함이 느껴집니다. 물론 스릴러 영화와는 어울리지않게 그 빈틈을 너무 많이 보이긴 했지만 이 조라는 캐릭터를 스릴러 영화속의 캐릭터가 아닌 액션 영화속의 캐릭터로 본다면 그의 연기는 충분히 매력적인 악당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코타 패닝은 역시나 천사같았고, 코트니 러브 역시 스튜어트 타운센드와 맞대결을 벌이기에는 너무 약해 보이긴 했지만 악과 선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습니다.
영화의 진행은 단 한순간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만큼 흥미진진했으며, 다시말하지만 마지막 경비행기와 차량간의 충돌씬은 최근에 본 헐리우드 영화의 장면중에서도 가장 스펙타클했습니다.
마지막 반전 역시 스릴러 영화의 반전치고는 빈약해 보이지만, 액션 영화의 반전치고는 꽤 알차게 보였습니다.
아직 이 영화의 원작이라는 그렉 일스의 소설 '24시간'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한편의 스릴러 소설을 이렇게 완벽한 흥미진진한 액션 영화로 변모시키는 헐리우드의 힘은 대단하다는 겁니다. 하긴 스릴러 영화보단 액션 영화가 더 장사가 잘 될테니... ^^;


 

 

 



구피의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군밤은 앤이 까주는 군밤이쥐...꿀꺼억...또 군침 넘어간다....
근데 쮸냐...'적당히 악의적이며, 적당히 빈틈을 보이는 조역의 케빈 베이컨의 연기는 언제 보아도 든든함이...'
케빈 베이컨이 조역이었어?
 2002/12/03   

구구콘

[..잘 익은 군밤 한톨을 넘어 줍니다.]
[..이미 껍질을 잘 까져 있는 명동의 ..]
[.. 대규모 충돌씬에 이르르면..]
[..이렇듯 이 영화가 지능형 스릴러라는 ..] 이상~
 2002/12/03   

쭈니

케빈 베이컨이 조역이라는 소리가 아니고 케빈 베이컨이 연기한 캐릭터의 이름이 '조'라고... ^^  2002/12/04    

winmir

샤를리즈 테론 너무 쉑시하군요...애엄마가 저정도면...ㅋㅋ
딸도 너무 귀엽고..샘에 나왔던 그딸..천사같아..나도 저런 딸 이었으면...
남편은 음..드라큐라에 나왔던 그 주인공..머리 짧은게 훨씬 낮군요...

근데 유괴범보다 이 가족이 더 무섭더군요...
 2003/02/18   

쭈니

ㅋㅋㅋ
아주 오래전에(?) 쓴 영화이야기를 읽다가 winmir 님이 오래전에 쓴 리플글을 발견하는 것도 제겐 꽤 엄청난 즐거움이랍니다.
예상하지 못한 보너스를 얻은 격이라고나 할까요... ^^;
 2003/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