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상진
주연 : 차승원, 설경구, 송윤아
개봉 : 2002년 11월 21일
감독 데뷰작인 [돈을 갖고 튀어라]이후 코미디 영화에만 전념하여 온 김상진 감독의 신작 [광복절특사]는 여러모로 개봉전부터 저에게 상당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선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이라는 영화로 최고의 웃음과 흥행을 일구어냈던 김상진 감독과 박정우 작가의 세번째 컴비작이라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첫번째 기대감이었으며, [라이터를 켜라]에서 물오른 코미디 연기를 펼쳤던 차승원과 [오아시스]에서 놀라운 연기를 펼쳐 보여줬던 설경구, 그리고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모색중인 송윤아가 주연을 맡았다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두번째 기대감이었습니다.
극장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면서 제 머리속엔 '김상진 감독과 박정우 작가가 이번엔 어떤 웃음의 세계로 날 안내할까?'하는 기대감에 충족되어 있었으며, 차승원과 설경구, 송윤아가 펼칠 코믹 연기에 맘껏 웃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복절특사]는 제겐 그리 만족스러운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영화를 보며 맘껏 웃었지만 그 웃음은 [주유소 습격사건]의 그 신선함에 대한 웃음과 [신라의 달밤]의 그 호쾌한 웃음과는 왠지 질적으로 떨어졌으며, 기대되었던 배우들의 연기도 차승원만이 기대 이상으로 채워주었을뿐, 설경구와 송윤아의 연기는 중간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너무나도 컸던 기대감이 문제였던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상진 감독과 박정우 작가, 그리고 차승원, 설경구, 송윤아라는 최고의 배우진을 갖춘 영화라면 이런 평범한 웃음보다는 좀더 강도 높고 신선한 웃음과 재미를 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암튼 이래저래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우선 이 영화의 시작은 무지 좋습니다. 배고픔을 못이기고 빵하나 훔쳤다가 신원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감방신세를 당하게 된 무석(차승원)의 억울한 사연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단순무식한 무석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웃음을 자아냅니다.
이렇게 차승원의 신들린 코믹 연기로 영화 초반의 웃음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냈던 이 영화는 무석과 재필(설경구)이 컴비를 이루며 감옥에서 탈옥을 함으로써 그 웃음의 강도를 점점 넓혀 갑니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무석과 재필에게 다시 감방으로 돌아가야만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줌으로써 웃음의 클라이막스로 관객을 안내하려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발생합니다.
분명 상황은 웃깁니다. 그리고 별다른 대책없이 무조건 탈옥만을 감행한 무석과 변심한 애인때문에 충동적으로 탈옥에 동참한 재필, 그리고 푼수끼 가득한 경순(송윤아)이라는 세명의 캐릭터들도 충분히 영화의 재미를 채워줄수 있을만큼 신선하고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장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웃음과 재미는 영화가 후반으로 흐를수록 점점 그 빛을 잃어 갑니다. 도대체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영화가 충분한 웃음의 소재와 캐릭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으로 흐를수록 영화 초반의 그 막강했던 웃음의 매력을 점점 잃어가는 이유는 제 생각엔 박정우 작가의 매너리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9년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을때 전 이 영화의 신선한 웃음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주유소를 터는 4명의 건달들... 그리고 그들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소시민들의 모습... 이 영화는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강자와 약자를 전복시킴으로써 이전의 코미디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과감한 실험을 감행한 겁니다. 그리고 그 실험에 관객들은 무아지경의 웃음으로 화답하면서 바야흐로 김상진 감독과 박정우 작가의 전성시대를 열어줬습니다.
2년뒤인 2001년 여름에 몰아닥친 조폭 코미디의 열풍속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신라의 달밤]역시 [주유소 습격사건]의 연장선에 놓인, 그러나 [주유소 습격사건]보다는 대중적인 소재로 한걸음 다가섰던 영화였습니다. 비록 김상진 감독의 작품은 아니지만 지난 여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라이터를 켜라]에서도 박정우 작가는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언제까지 [주유소 습격사건]의 연장선상에 놓인 영화들로 관객들을 웃길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제는 무언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야 할때인 겁니다. 하지만 박정우 작가의 영화는 역시 [광복절특사]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탈옥수라는 사회의 악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주유소 습격사건]을 닮았으며, 두남자와 한여자라는 캐릭터 구조는 [신라의 달밤]을, 비열한 정치인의 모습은 [라이터를 켜라]와 빼닮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엔 박정우 작가의 영화에는 언제나 등장하는 대규모 폭동씬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박정우 작가의 트래이드마크로 자리매김할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매번 똑같은 영화를 상황만 약간 비틀어서 끊임없이 재생산시키는 박정우 작가의 매너리즘은 이제 위험수위까지 올랐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이렇게 코미디 영화에는 필수요건인 신선함을 작가의 매너리즘으로 잃은 이 영화는 차승원, 설경구, 송윤아라는 세명의 주연 배우들에게만 웃음을 기대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저지릅니다. 도대체 코미디 영화의 귀재라는 김상진 감독과 코미디 영화의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박정우 작가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르겠군요.
많은 분들이 인정하겠지만, 요몇년사이에 우리나라의 코미디 영화가 급속도록 발전하며 관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것은 뭐니뭐니해도 이름조차 잘 모르는 조연 연기자들의 힘이 컸습니다. 이름은 잘 기억을 못하지만 얼굴만 봐도 '아하~ 저 배우!!!'라며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던 그 수많은 조연 배우들은 코미디 영화에서 약방의 감초같은 역할을 하며 우리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낸겁니다.
이 영화 역시 강성진과 유해진이라는 코믹 연기에 일가견이 있는 조연 배우가 포진되었습니다. [주유소 습격사건], [라이터를 켜라]등의 여러 코미디 영화에서 인상적인 코믹 조연연기를 펼쳤던 강성진과 유해진은 그 등장과 함께 관객들에게 웃음의 준비를 하게 만들만큼 코믹 연기에 관해서는 절대 다른 배우들에게 뒤지지않는 우리 코미디 영화의 대들보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영화에서 웃기지 않습니다. 강성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채 영화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고가더니만 결국엔 폭동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절 당황시켰습니다. 유해진 역시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경찰복을 입고 경순의 약혼자라며 등장하더니만 막판에는 자신의 약혼녀인 경순을 납치한 무석과 재필에게 불필요한 폭력을 쏟아냄으로써 웃을 준비를 했던 절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주연 배우들만으로 영화의 웃음을 끝까지 유지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김상진 감독과 박정우 작가가 절대 모를리는 없을텐데, 왜 충분히 관객들을 웃음의 도가니속으로 몰고갈 능력이 있는 조연 배우들을 그렇게 어이없이 소진시켜 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군요.
하지만 다 좋습니다. 매번 똑같은 조폭 코미디가 약간씩 변형된채 확대 재생산되는 요즘의 세태라면 박정우 작가의 코미디 영화가 언제나 비슷한 모양새로 재생산되는 것은 이해할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강성진과 유해진이라는 실력있는 조연 배우가 언제까지나 코믹 연기에만 매달려야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두 이해한다고해도 영화 후반부의 죄수 폭동씬은 정말로 이해할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를 가득 채운 이 영화의 폭동씬은 시종일관 코믹한 상황으로 몰고가던 이 영화의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장면이라서 보는내내 이 장면이 이 영화에 왜 들어가야하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살기위해서 자신의 죄목을 나열하며 '나도 너희와 똑같은 인간이야.'라고 우기는 비열한 정치인들과 사람대접을 받고 싶다는 죄수들의 모습에서 뭔가 메세지가 읽혀질만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광복절특사]라는 영화에 어떤 메세지를 기대하고 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부담없이 웃고 즐기기위해 이 영화를 선택하였으며, 이 영화는 중반까지 그러한 관객들의 기대감을 총족시켜주기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죄수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영화는 마치 관객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듯이 진지해지기 시작합니다. 죄수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어떤 카타르시즘을 느껴보라고 관객들에게 권유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주유소 습격사건]이나 여타 다른 박정우 작가의 영화에서 느꼈던 카타르시즘은 이 장면에선 전혀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씁쓸한 뒷맛만을 남깁니다.
이러한 폭동씬은 결국 우여곡절끝에 감옥으로 들어온 무석과 재필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엔 시종일관 웃음을 이끌어오던 무석과 재필의 명성에 누를 끼칩니다. 몇분전만해도 경순 약혼녀의 몰매에 '나는 인간 쓰레기이다'라고 외치던 재필이 몰매보다도 몇배는 더 무서운 총앞에선 '우린 인간 쓰레기가 아니다'라고 설교하는 모습은 정말 이 영화의 최악의 장면이었던 겁니다.
만약 마지막에 '분홍 립스틱'을 맛깔스럽게 부른 차승원의 모습만 없었다면 이 영화는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져버린 그런 어이없는 마무리를 할뻔한 셈입니다. 결국 영화의 초반에도, 중반에도, 그리고 마지막 장면까지도 차승원의 물오른 코믹 연기가 이 영화를 살린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