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임창재
주연 : 이은주, 정준호, 계성용
개봉 : 2002년 11월 14일
전 헌혈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서워서가 절대 아닙니다. 제가 헌혈을 간절히 원했을때 헌혈이 절 단호히 거부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그럼 헌혈에 얽힌 8년전의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대하시라. 짜자잔~ ^^;)
1994년 8월. 유난히 더웠던 그때, 전 신교대에 입소를 하였습니다. 저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라면 '방위 아니었어?'라는 질문이 나올만하지만 분명한 것은 방위도 신교대에서 4주간의 훈련을 받는다는 겁니다. 암튼 신교대에 입소한 저는 한동안 찌는 듯한 더위와 더럽게 맛없는 짬밥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수는 없는 일... 이쯤에서 또 '방위주제에...'라며 딴지를 거실 분들을 위해서 한마디... 방위들도 신교대에선 현역과 마찬가지로 고된 훈련을 받는 답니다. 자꾸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군요. 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헌혈에 얽힌 정말로 서러웠던 그날의 기억을 다시 상기시키겠습니다. ^^;
그날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고된 훈련에 기진맥진되어 있었던 그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건 헌혈을 하면 오후엔 내무반에서 편하게 누워 쉴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제 동료들은 서로 앞다퉈 헌혈을 하겠다고 자진해서 나섰습니다. 그땐 정말로 잠시라도 고된 훈련을 피하고 편하게 쉬어보는 것이 소원이었기에 거의 대부분의 동료들이 지원을 했었죠. 하지만 제 차례가 되었을때 의무관은 제 얼굴을 쳐다보더니만 '넌 너무 말라서 헌혈하면 안돼'라며 퇴짜를 놓더군요.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저는 괜찮다고 매달려 보았지만 결국 한대 얻어맞고 훈련장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헌혈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땐 절 거부했던 헌혈이 어찌나 밉던지... 결국 사회에 나와서 헌혈차를 보더라도 그때의 아픈(?) 기억을 상기하며 '니가 먼저 날 외면했지?'라는 심보로 헌혈차를 외면하였었습니다.
제가 갑자기 8년전의 기억을 끄집어내면서까지 헌혈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이번에 본 영화인 [하얀방]을 나의 그녀가 헌혈을 하고 받은 공짜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제가 싫어하는 초코파이하고 우유를 줬었는데, 이젠 영화표나 문화상품권등을 준다는 군요. 흠~ 그렇다면 나도 8년전의 아픈 기억을 떨쳐버리고 헌혈과 화해를 한번 해봐??? ^^; (아~ 공짜에 너무 약한 쭈니!!!)
[하얀방]... 이은주라는 배우를 좋아했던 저로써는 정말 기대가 많이 되었던 영화입니다. '멜로 영화에서 매력을 맘껏 발휘했던 이은주가 과연 공포 영화에선 어떤 매력을 뿜어낼것인가?' 그런데 막상 [하얀방]은 영화에 대해서도, 이은주의 연기에 대해서도 이래저래 제게 아쉬움만 많이 남긴 영화였습니다.
먼저 이 영화의 스토리... 어떤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장르 영화에서 새로움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라고... 그건 분명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하루에도 셀수없이 쏟아지는 영화의 홍수속에서 새로운 영화를 찾는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일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할지라도 [하얀방]의 스토리 라인은 여러 공포 영화들을 대놓고 짬뽕한듯한 인상이 너무 많이 풍깁니다.
우선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죽음이라는 소재는 이미 [피어닷컴]이라는 헐리우드 공포 영화에서 써먹은 수법입니다. 물론 [피어닷컴]보다 [하얀방]이 먼저 기획되었다고 하지만 관객들에게 먼저 소개된 것은 [피어닷컴]이니만큼 [하얀방]의 신선함은 떨어질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건에 뛰어들어 죽음의 위기에 봉착하고 그 죽음을 모면하기위해 진실을 파헤치는 수진(이은주)이라는 캐릭터는 이미 [링], [폰], [가위]등 최신 공포 영화에서 자주 써먹는 캐릭터에 불과하며, 수진의 애인이며 보도 프로그램의 MC인 이석(계성용)의 성공에 대한 집착은 이미 [가위]의 정욱(유준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제시된 적이 있습니다. 사이트에 접속한 후 2주안에 죽는다는 설정은 비디오를 본 후 일주일안에 죽느다는 [링]의 설정과 비슷하고, 유실의 아기에 대한 집착은 [폰]의 호정(김유미)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따진다면 비슷하지 않은 영화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문제는 이렇게 여러 공포 영화를 혼합하였으면서도 이렇게 혼합된 요소들에대한 상호 연관성이 이 영화엔 부족하다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유실과 그의 뱃속의 아기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자에 대한 복수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문제는 그 과정인데, 유실의 복수의 대상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남성이 아니라 낙태 수술을 받은 일반 여성들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영화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유실이 복수해야될 대상이 전도되었다'라는 표현을 쓰셨던데 저도 전적으로 그것에 대해선 동감입니다. 낙태에 대한 비윤리적인 행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위한 장치였다면 굳이 유실의 복수를 영화의 기본 줄거리로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유실의 복수라는 스토리의 큰 줄기와 낙태 수술을 받은 여성들의 죽음이라는 스토리의 또다른 줄기가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왜 굳이 인터넷 사이트라는 공간을 끄집어내어 죽음의 매개체로 사용했을까요? 사이버 수사대의 최진석(정준호)형사를 사건에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어떤 분의 해석도 있었지만, 제 생각엔 그것보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일반화된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인터넷을 영화의 소재로 채택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진석을 사건에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이었건, 관객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위한 목적이었건간에 인터넷과 유실의 복수간의 연관성은 관객들을 쉽게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리 산부인과 사이트에 접속하고 14일후면 죽는다는 시간적인 설정 역시 이 영화와는 연관성이 부족합니다. [링]의 경우는 그 비디오를 본 후 죽음의 바이러스가 몸안에 퍼지는 그 시간이 일주일이라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지만, [하얀방]의 경우는 14일이라는 시간적인 설정은 아무런 의미를 부과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이 영화의 최대 약점은 공포 영화의 여러 소재와 설정을 빌려왔을뿐 그러한 것들을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인 유실의 복수와 전혀 연관을 짓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 공포 영화의 소재와 설정을 빌려 옴으로써 스스로 참신함을 잃고, 그에따른 스토리의 연관성을 매듭짓지 못한 이 영화는 이은주와 정준호라는 스타급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 중 이은주의 연기는 제겐 상당한 실망이었습니다. [오! 수정], [번지점프를 하다], [연애소설]에서 정말 인상적인 멜로 연기를 펼쳤던 이은주는 공포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함으로써 그 연기의 폭을 넓히려 시도했지만 제가 보기엔 아직은 역부족인 듯 보입니다. 멜로 영화에서 생동감있는 연기로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던 그녀였지만, 이 영화에선 그 생동감을 모두 잃어버린채 매우 수동적이고, 정적인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일단 수진이라는 캐릭터를 살펴보면 결혼보다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입니다. 연인인 이석과의 관계 후 생긴 아기를 별다른 고민없이 낙태해 버리기도 하고, 인터넷 사이트의 접속 후 자신의 죽음을 느낀 후에는 그 죽음의 공포에 직접 맞서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진이라는 캐릭터와는 달리 이은주의 연기는 성공에 집착하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으며,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당당함도 역시 보여주지 못합니다. 단지 공포에 질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과 어색한 비명으로 수진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합니다.
[폰]에서 죽음의 핸드폰에 대한 비밀을 밝혀냈던 지원역을 맡아 역시 호러퀸이라는 명성을 재확인했던 하지원의 연기와 비교한다면 이은주의 연기는 구태의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은주의 팬이기에 이러한 이은주의 실망스러운 연기는 제게있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했습니다.
조폭 코미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정준호 역시 이 영화에선 전혀 조폭 코미디에서의 발휘했던 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그 날카로움은 온데간데 없고 마치 [좋은 사람있으면 소개시켜줘]의 현수라는 캐릭터와 같은 그 어리숙함만 보입니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도 있습니다. 그중 한가지는 낙태 수술이라는 소재를 효과적으로 영화속 공포에 삽입했다는 겁니다.
낙태수술... 어쩌면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살인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 살인의 대상이 자신의 아기라는 것은 낙태수술을 받은 여성이나, 그 사실을 묵인한 남성에게도 분명 공포심과 죄책감을 심어주는 일일겁니다.
일단 임창재 감독은 그러한 낙태수술을 이 영화의 소재로 채택을 함으로써 관객에게 효과적인 공포심을 심어줍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해야만 했던 그 이름모를 수많은 아이들의 원혼이 영화를 보는 내내 섬뜩하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후에 낙태 수술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안될 듯 보입니다.
그 외에도 여운을 남기는 라스트씬도 꽤 좋았습니다. 물론 많은 관객들이 유실과 진석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라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영화의 홈페이지를 찾고 자료들을 뒤지는 것은 이 영화의 여운을 오랫동안 유지시켜 주는데에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결말이 확실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겐 이 영화의 라스트가 마음에 안들었겠지만, [텔미썸딩]처럼 약간은 미심쩍은 라스트를 관객에게 던져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영화의 실마리를 스스로 풀게끔 유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제겐 이 영화의 라스트는 꽤 흥미진진하게 느껴 졌습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분명 낙태수술이라는 효과적인 공포 영화의 소재와 마지막 여운을 남길줄아는 신예 임창재 감독의 연출력을 분명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장점들이 어디에선가 많이 본듯한 낯익은 장면들과 공포 요소간의 연관성 부족 그리고 배우들의 실망스러운 연기로 파묻혔다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