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창동
주연 : 한석규, 심혜진, 문성근, 명계남
97년 한국영화의 가장 큰 화제작은 바로 [초록물고기]이다. 비평가들의 만장일치로 걸작 판정을 받은 이 영화는 스텝진을 살펴보면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감독을 맡은 이창동은 소설가이다. 82년 [전리]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뒤 [소지], [천기], [끈]등의 작품으로 80년대 대표적인 작가로 주목받았으며 93년엔 [녹천에는 똥이 많다]라는 작품으로 25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다시한번 잘 살펴보면 그의 영화에 대한 집념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햄릿], [티타임의 정사]등 10여편의 3류 영화를 연출하거나 출연하였으며,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초록물고기]는 그의 긴 여정의 결실이며 한국영화의 또다른 수확이기도 하다.
제작 기획은 감독겸 배우인 여균동과 코미디 배우 명계남이 맡았고, 문성근은 직접 제작, 기획, 프로듀서를 맡았다. 이렇게 기이한 스텝진들이 만든 [초록물고기]의 출연진 역시 화려하다. [닥터봉], [은행나무침대]를 통해 영화 데뷔하자마자 연타석 홈런을 친 한석규. 그는 특이하게도 신인 감독의 영화에만 출연해으며 [초록물고기]는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의 연기자적 입지를 확고히 해준 작품으로 손꼽힌다. [결혼이야기], [세상밖으로], [은행나무침대], [박봉곤 가출 사건]등 출연하는 영화마다 독특한 캐릭터로 영화의 흥행을 이끌어내는 한국 최고의 여배우 심혜진과 [그들도 우리처럼], [경마장 가는 길], [세상밖으로], [너에게 나를 보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등 작품성있는 영화에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표출하는 문성근도 출연한다.
영화는 이제 막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막동(한석규)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기차안에서의 한 여인과 우연한 만남, 그리고 건달들과의 싸움. 이 오프닝 장면에서 관객들은 막동의 성격을 알게된다. 그의 집은 일산이다. 아카시아 나무가 가득했고 시냇물이 흐르던 그의 따뜻한 고향 일산은 사라지고 딱딱한 아파트가 가득 드리워진 신도시 일산만이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오손도손살던 식구들은 뿔뿔히 흩어져 제각기의 삶을 살아간다. 막동이 느끼는 현실은 그러한 것이다. 삭막하고 답답하다. 될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한 그에게 기차에서 우연히 만났던 미애(심혜진)는 하나의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녀는 조직계 보스 배태곤(문성근)의 정부이다. 그녀 역시 참을 수 없는 인생의 무거움속에 방황한다. 막동과 미애의 사이는 막도이 배태곤의 밑에 들어가며 좀 더 구체화된다. 그리고 영화의 예정대로 막동은 죽음으로 치닫는다.
전체적인 줄거리만 흩어본다면 이 영화는 [게임의 법칙]류의 한국 느와르이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현대화, 도시화되어가는 요즘에 대한 과거의 그리움이다. 그리고 해체되어가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다. 카메라는 부드럽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며 주연 배우들의 명연기는 영화의 메세지를 관객에게 안겨준다. 특히 라스트에 막동이 죽은 후 막동의 소원대로 가족이 모여 음식점을 차리고 그곳에 배태곤과 미애가 우연히 들르는 장면은 막동의 죽음으로 '영화가 끝났겠지'라고 안심하는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언젠가 막동에게 받은 사진속의 나무가 그곳에 있는 것을 본 미애는 막동을 그리며 흐느끼고 그제서야 영화는 막을 내린다.
1997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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