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마틴 캠블 주연 : 피어스 브로스넌, 이자벨라 스코룹코
60년대를 살았던 사람치고 암호명 007인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냉전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나 서방세계의 안보를 위협하는 국제 테러분자들에 맞서 지구의 평화를 수호하는 왕립 해군 중령 출신의 영국 스파이. 거칠지만 미남이고 낭만적인 특수공작원 제임스 본드를 만들어낸 사람은 명문 이튼 출신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1908~1964)이었다. 제임스 본드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이언 플레밍이 45세때인 1953년에 '카지노 로열'이라는 스파이 소설을 출간하면서였다. 플레밍은 원래 귀족적인 잉글랜드 억양과 말쑥한 외모의 데이비드 니본이 본드역에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하고 그를 [카지노 로열]에 기용했으나 결과는 흥행의 실패였다. 본드의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사람은 서민적인 스코틀랜드 억양과 멋진 체격, 그리고 정력적이고 악마적인 짙은 눈썹이 특징인 숀 코넬리였다. 숀 코넬리가 주연한 제임스 본드 영화들은 모두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007 시리즈는 거의 매해 한편씩 제작되었고 최근까지 19편이 영화화됐다. 본드역은 숀 코넬리가 7편, 로저 무어가 7편, 티모시 달튼이 2편, 그리고 데이비드 니본과 조지 레젠비와 피어스 브로스넌이 각각 1편씩 나누어 맡았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007 영화가 90년대들어 이분법적 가치관이 와해됨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피어스 브로스넌을 새로운 007로 맞이한 [골든아이]는 낙하산도 없이 자유낙하해 추락하는 경비행기에 오르는 너무나도 본드적인 오프닝 액션으로 시작한다. 영국을 배반한 동료 첩보원 006을 상대로 세계를 지켜내는 007. 그런 그는 자신의 상관인 M16의 냉혹함을 알게되고 그에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흔들린다. [골든아이]는 냉전시대가 무너진 변모한 세태를 반영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머니 페니는 본드의 은근한 태도를 성추행이라 빗대어 말하고, M은 본드가 남성우월론자라 여성을 깔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본드는 본드걸과 사랑에 빠진다. 이자벨라 스코룹코가 연기한 본드걸 나탈리아는 79년 [007 문레이커]이후 진짜 인텔리 본드걸이다. 그녀는 골든아이 공격으로 초토화된 세베르나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제임스 본드를 도와 야누스 신디케이트의 아킬레스건을 노출시키는 동행자가 된다. 이제 새로운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그는 선배 007에 비해 인물이 결코 빠지지도 않고 연기를 못하지도 않으며 매력적이다. 물론 로저 무어처럼 대사를 읽지도 않고 007을 연기해야한다는데 대한 머뭇거림도 없다. 그러나 아직 숀 코넬리와의 비교는 무리다. 그는 너무나 섹시하고 완벽한 본드였기에 굳이 피어스 브로스넌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숀 코넬리 이후의 가장 본드다운 본드라고나 할까? 탱크를 타고 러시아 건물을 허물며, 차를 추격하는 열차와 부딪히는 그야말로 너무나도 본드다운 액션을 펼치는 이 영화는 그러나 본드의 신화를 이어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반영웅적인 탈식민주의 시대라는 90년대 상황은 둘째치고라도 본드의 액션은 크게 진보되지 못했다. 80년대만 하더라도 본드의 액션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영화팬들도 이제 헐리우드의 대형 액션 영화를 보기위해 [골든아이]를 외면하였다. 본드 영화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본드걸과의 로맨스도 왠일인지 [골든아이]에선 유치하게만 느껴진다. 이안 플레밍의 원작을 짜집기한 이 영화의 각본도 그래서인지 관객을 매료시키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아무리 매력적인 제임스 본드라할지라도 액션의 진보없이는 살아남기 힘들듯하다.
1997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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