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9년 영화이야기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그녀는 하얀 어둠에서 벗어날 수없을 것이다.

쭈니-1 2009. 12. 8. 23:57

 

 


감독 : 박신우
주연 : 한석규, 손예진, 고수
개봉 : 2009년 11월 19일
관람 : 2009년 11월 21일
등급 : 18세 이상

달라진 영등포 거리를 헤매다.

토요일 아침, 모처럼 만의 늦잠도 포기하고 집에서 한참 떨어진 CGV 영등포를 갔습니다. 오픈한지 얼마 안 된 곳이라 그런지 영등포역에서 CGV 영등포를 찾느라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맞으며 한참을 헤맸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극장에 도착할 수는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토요일 아침부터 영등포에서 길을 헤맸던 이유는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개봉 첫 주부터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일으키며 저희 집 근처 멀티플렉스를 전부 독차지한 [2012] 때문에 영등포까지 가지 않으면 토요일 아침 시간대에 [백야행]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상관없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그 모든 수고를 하고서라도 [백야행]을 꼭 보고 싶었으니까요.
[백야행]은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원작소설은 물론이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져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하지만 책하고도 별로 친하지 않고, 일본 드라마하고는 더더욱 친하지 않은 저로써는 이 영화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과 일본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원작과의 단순 비교는 할 수가 없지만 [백야행]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기대했던 스릴러영화로는 그다지 치밀한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14년 전의 사건으로 인하여 이어진 세 캐릭터의 운명의 끈과 그로인한 엇갈림, 그리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꽤 세련된 영상미로 그려냄으로써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슬픈 사랑에 의한 먹먹함으로 여운을 안겨준 영화였습니다.


 

14년 전의 사건을 엿보아라. 그것을 이해해야만 그들의 엇갈린 운명도 이해되리라.


섹스와 살인

[백야행]은 처음부터 자극적인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미호(손예진)와 그녀의 약혼자인 승조(박성웅)의 섹스와 다른 한쪽에서는 요한(고수)이 재두를 살해하는 장면입니다. 흔히들 섹스와 살인은 영화의 소재 중에서 가장 자극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백야행]은 그러한 섹스와 살인을 한꺼번에 영화의 오프닝에 배치함으로써 처음부터 저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 이후로도 섹스와 살인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입니다. 미호는 과거의 불행함을 씻고자 돈이 많은 승조와 거짓 사랑을 이어가고, 요한은 그런 미호의 거짓 인생을 지켜주고자 미호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죽여 나갑니다. 이쯤 되면 미호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악녀이며, 요한은 비현실적인 살인자가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백야행]은 그러한 함정을 교묘하게 벗어납니다.
그것은 분명 배우의 매력 덕분입니다. 특히 손예진의 매력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입니다. 그녀는 이미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인간의 가장 오래된 관습인 결혼제도를 부정함으로써 관객들에게(특히 남성 관객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마땅한 인아를 자신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여 오히려 매력적인 캐릭터로 변모시킨 경력이 있습니다. [백야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관객이 미호를 단순한 악녀로 받아들인다면 그 순간부터 이 영화는 모든 힘을 잃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손예진의 매력은 미호를 악녀가 아닌 가녀린 피해자로 만듬으로써 영화의 재미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배우로써의 매력을 물씬 풍긴 것은 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썸]을 끝으로 군 입대를 위해서 한동안 공백기를 가졌던 고수는 그 공허한 눈빛만으로도 미호를 사랑하지만 결코 그녀 곁에 갈 수 없는 요한의 슬픈 사랑을 표현해냅니다. 이렇게 손예진과 고수의 매력은 섹스와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가 가득한 이 영화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손예진의 매력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이다.


빛과 어둠

[백야행]에는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가 많이 등장합니다. 섹스와 살인이 그렇고 빛과 어둠도 그렇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미호의 섹스엔 화면 가득 환한 빛이 넘쳐흘렀지만, 요한의 살인에서는 어두컴컴한 어둠만이 화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호는 빛을 상징하고 요한은 어둠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그러한 이미지들은 각각 반전을 맞이합니다.
미호가 스스로 밝혔듯이 미호를 비춰주던 빛은 요한에 의한 것입니다. 그는 미호를 밝혀주는 환한 태양은 되지 못했지만 자신의 온 몸을 불태워 가느다란 한줄기 빛을 그녀에게 바쳤고, 그것으로 미호는 충분했습니다. 미호에게 자신의 모든 빛을 줘버린 요한은 컴컴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백야행]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연결 끈입니다. 14년 전 요한의 아버지가 행한 악행으로 빛으로 충만해야할 요한의 인생과 가난으로 인한 어둠으로 가득차야 할 미호의 인생은 뒤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지금까지 요한은 자신이 가진 모든 빛을 미호에게 비춤으로써 어둠으로 가득 차야할 그녀의 인생을 환한 빛으로 탈바꿈시킨 것입니다.
그러한 미호와 요한의 엇갈린 인생은 영화 속에서도 여러 번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미호와 요한의 횡단보도에서의 통화 장면입니다. 요한과 서로 마주한 횡단보도에서 미호는 안전한 인도에 서서 다가오는 요한을 멈춰 세웁니다. 그 때문에 요한은 위험한 차도에서 미호와 통화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두 사람이 처해진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의 빛을 모두 빼앗았지만 그보다 더 환한 태양을 바랐던 여자와 미호에게 모든 빛을 다 줬지만 그녀를 위해서 사라져야할 어둠이 되어버린 남자의 슬픈 사랑. 태양이 높이 떠오르면 그림자는 사라져야 하는 법이라는 요한의 마지막 한 마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더 이상 빛을 줄수 없었던 요한의 슬픈 운명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미호에게 자신의 모든 빛을 내준 요한은 이제 사라져야할 그림자일 뿐이다.


그들을 쫓은 한 남자

미호와 요한의 엇갈린 운명과 비극적인 사랑에 균형을 맞춰주는 캐릭터인 동수(한석규)도 이 영화의 재미에 한 몫을 거둡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동수는 그저 사건의 뒤를 캐는 영화의 들러리에 불과한 캐릭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행되며 동수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동수에게 미호와 요한이 가진 14년 전의 아픔의 무게와 버금가는 상처를 안김으로써 동수가 미호와 요한의 사건에 그토록 집착을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동수에게 분명 14년 전의 사건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이자 지우고 싶은 과거였을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 그는 14년이 흐른 후에 이 모든 것을 바로 잡고자 다시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렇기에 사건의 모든 진실을 알고 오열하는 동수의 모습은 영화의 포스터처럼 일그러진 모습이 아닌 14년 전 그들을 막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후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미호와 요한을 어둠의 세계에서 빼냄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를 구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한때 흥행불패신화를 이끌었던 한석규. 그러나 [쉬리] 이후로 그의 흥행 돌풍은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그는 더 이상 흥행배우는 아니지만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성격파 배우로 한층 성장해 있었습니다.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의 그 사람 좋은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세월의 무게에 악에 받친 일그러짐만 남아 있는 [백야행]에서의 그의 모습은 어쩌면 미호와 요한보다 더한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멈추지 못했으며, 미호와 요한을 어둠의 세계에서 빼내지도 못했고, 따라서 14년 전의 회한의 시간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호를 향한 그의 외침은 이 영화에서 가장 슬펐고, 가장 공허했습니다.


 

한동수, 그는 이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불행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하얀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과연 미호의 남은 인생은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태양이 강렬하게 비추는 환한 세상이었을까요? 아뇨,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를 비춰주던 가느다란 빛이 없는데 그녀의 남은 인생이 환한 빛의 세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제목인 '백야행'이라는 단어가 참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친절하게도 부제로 '하얀 어둠 속을 걷다'라며 '백야행'의 뜻을 설명해준 제작사 덕분에 제목이 뜻하는 의미가 더욱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얀 어둠은 제가 보기엔 미호와 요한이 있는 세상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빛을 미호에게 준 요한도, 그 빛으로 인하여 환한 빛의 세계에 살고 있었던 미호도 사실은 하얀 어둠 속에서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미호는 하얀색에 매료되어 자신 있는 곳이, 자신이 향하는 곳이 빛의 세계라고 착각했지만 아닙니다. 그녀의 세계 역시 어둠입니다. 요한의 희생으로인하여 가까스로 빛으로 가장된 어둠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승조의 딸에게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줌으로써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그 치밀함으로도 그녀는 결코 자신이 원했던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호에게 있어서 유일한 빛이었던 요한이 없는 상황에서 승조는 요한과 달라 자신의 온 몸을 불살라 미호의 인생을 밝혀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결국 이 영화는 아주 철저한 비극입니다. 결국 미호의 곁에 가지 못한 요한도, 자신의 유일한 빛을 잃고 하얀 어둠이 아닌 컴컴한 어둠 속에 갇힐 것이 분명한 미호도, 그리고 결국 14년 전 자신의 실수에 대한 회한을 씻어 내리지 못한 동수도, 그들 모두 괴로움에 쌓인 여생을 보낼 테니까요.
[백야행]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올해 제가 본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스릴러로써의 재미도 갖추고 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이런 먹먹한 사랑의 아픔을 제게 안겨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영화였습니다.


 

미호와 요한의 사이에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의 엇갈림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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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
이거 막 텔레비에 광고하던데 별로 안끌리는.. ;;  2009/11/23   
쭈니 세상엔 볼 영화가 많은만큼 별로 안끌리는 영화는 안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2009/11/24   
ssook
일본 드라마를 보다 그 음울함에 치를 떨고 접었는데.......보고 온 친구 말에 의하면 이 영화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일 보러 갑니다....나름 흥미 있어했던 드라마였거든요...  2009/11/24   
쭈니 영화도 상당히 음울합니다.
그래도 워낙 손예진과 고수의 매력이 출중해서... ^^
 2009/11/24   
404page
인터넷 메신저 대화명에다가 백야행 결말을 달아버리는 몹쓸짓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미치겠습니다.
구지 기억안할려구해도 이미 머리에 박혀버리는...ㅠㅠ
 2009/11/26   
쭈니 ㅋㅋㅋ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백야행]은 스릴러가 아닌 멜로영화로 보는 편이 났기에 결말을 알더라도 뭐 크게 상관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 역시 영화를 보기 전에 결말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고수와 손예진이 연기한 두 캐릭터의 감정선을 쫓아가다보니 자연스럽게 매료되더군요. ^^
 2009/11/26   
DayWalker
전 아직 못봤지만 유일하게 본 일드가 이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아직 못 봤지만 보러 갈 생각은 있습니다. 이 진부하긴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두 남녀가 한국인의 손으로는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거든요.
드마라 얘길 좀 해보자면

새벽에 제가 자주 듣는 하는 "xx의 영화음악"의 한 코너에서 한 평론가분이 꽤 괜찮게 평하고 일본내에서도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그해 연말시상식에서 이 드라마가 대부분의 상을 쓸었다더군요.
일드를 전혀 본적도 없지만 시청률이 그닥이었는데 상을 휩쓸었다?
딱 떠오르는건 네멋이나 다모였습니다. 이 두 드라마역시 한국드라마에 남을 역작이었지만 그 완성도나 감동에 비해 시청률이 그리 좋진 않았거든요.
물론 그보다 못했지만 괜찮았습니다. ㅅㅅ;

404님 우려하시는 결말은 별로 중요치 않을 것 같네요. 아예 드마라같은 경우는 영화의 끝장면이 드라마의 시작장면으로 나오거든요.
이미 결말부터 시작을 합니다. 사실 백야행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결말이 예상되죠.
제목에 주제와 결말이 축약되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그 하얀 어둠을 걷게 되는 계기와 과정에 촛점을 맞췄었죠.
이미 소설과 드라마로 인기몰이를 했던 소재니만큼 내용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설마 다 알고 있는 그 내용을 가지고 어설픈 반전놀이를 할 만큼 감독이 어리석긴 않겠죠.
 2009/11/27   
쭈니 대부분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신 분들의 경우는 영화에 실망을 나타내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 만큼 드라마가 잘 만들어졌음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2시간 남짓한 영화가 드라마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미호와 요한의 감정과 사랑을 축약적으로 잡으려하다보니 관객의 동감을 사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둘을 각각의 별개로 보면서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요근래 만들어진 한국영화 중에서도 꽤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
 2009/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