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9년 영화이야기

[파주] - 안개 같은 영화!!!

쭈니-1 2009. 12. 8. 23:56

 

 


감독 : 박찬옥
주연 : 이선균, 서우
개봉 : 2009년 10월 28일
관람 : 2009년 11월 10일
등급 : 18세 이상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덕분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회사에 하루 간의 연차 휴가를 내고 하루 종일 영화를 보겠다고 결심했던 그날. 원래 계획은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들로 하루를 채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의 첫 영화인 [펜트하우스 코끼리] 때문에 제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났습니다. 오락영화를 기대했지만 전혀 오락적이지 못한 [펜트하우스 코끼리] 때문에 저는 기분이 더욱 울적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날의 두 번째 영화인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덕분에 울적한 제 기분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만약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마저 실패했었다면 전 세 번째 영화로 [킬 미], [내 눈에 콩깍지] 등 코미디영화를 볼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덕분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저는 마지막 영화만큼은 오락성이 아닌 작품성에 기대어 영화를 보자는 여유가 생겼고, 그때 제 눈에 들어온 영화가 바로 [파주]입니다.
사실 [파주]를 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박찬옥 감독의 전작인 [질투는 나의 힘]을 본 저로써는 이 여성감독의 색다른 영화 화법에 숨이 질색할 뻔한 경험을 이미 했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나의 힘]은 연상의 사진작가(배종옥)에게 매료된 순진한 대학원생(박해일)과 잡지사 편집장(문성근)의 삼각관계를 그린 영화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나도 잘 해요...'라는 자극적인 홍보문구로도 유명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는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겉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의 모습은 겉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삼각관계를 중점으로 영화를 관람하다간 '이게 뭔 영화야?'라고 어리둥절해질 뿐입니다.


 

자극적인 소재에 현혹되어 영화를 봤다간 망연자실 주저 앉게 될지도 모른다.


[파주]도 마찬가지이다.

[질투는 나의 힘] 이후 6년 만에 [파주]로 돌아온 박찬옥 감독은 하나도 변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파주]는 형부와 처제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야설에서나 나올법한 자극적인 소재의 영화로 홍보문구도 '이 사람... 사랑하면 안돼요?'라며 관객에게 끈적끈적한 눈빛을 보냅니다. 하지만 저는 '또 속을 줄 알고?'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삼각관계 영화인줄 알고 봤던 [질투는 나의 힘]의 충격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이렇듯 박찬옥 감독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화를 상업영화의 겉모습을 띄게 한 것도 [질투는 나의 힘]과 비슷했고, 자극적인 소재와 자극적인 홍보문구도 [질투는 나의 힘]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박찬옥 감독의 영화를 보는 저의 마음가짐입니다. [질투는 나의 힘]을 봤을 때는 멋모르고 영화의 겉모습만보며 상업영화의 재미를 기대하며 영화를 봤었지만 [파주]는 영화의 겉모습이 아닌 이 영화가 감춰놓은 속 모습을 기대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만큼 [질투는 나의 힘]과는 다르게 진지하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파주]는 제 예상대로 단순하게 형부와 처제의 사랑을 그린 통속적인 멜로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중식(이선균)과 은모(서우)는 분명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전혀 예상 밖의 모양새를 띄고 있습니다. 18세 관람가라서 많은 분들이 이선균과 서우의 자극적인 섹스씬을 기대하실지 모르겠지만 중식과 서우는 결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지 않으면서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지켜나갑니다.


 

중식과 은모의 사랑의 최대 수위는 고작 이 정도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법

[파주]는 기본적으로 중식과 은모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각자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중식은 선배와의 사랑 때문에 선배의 갓난아기에게 끔찍한 화상을 입히고 도망치듯이 서울을 떠났으며, 부모를 일찍 여윈 은모는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은수(심이영)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형부인 중식과 단 둘이 남아버리지만 어느 사이 자기 자신이 중식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도로 도망치듯이 떠납니다. 그들의 상처는 사회적 통념상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며 그로인한 그들의 대처방법은 한 결 같이 도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식과 은모는 서로 너무나도 닮아있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닮았기에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도 비슷합니다. 중식은 은수의 죽음의 진실을 끝까지 은모에게 감춤으로써 은모가 받을 상처를 온 몸으로 막아내며 그녀에 대한 소극적인 사랑을 지켜나갑니다. 은모는 온갖 오해와 마을 주민들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중식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철거대책위원회의 사람들로부터 중식을 격리시킴으로써 그를 지켜냅니다.
처음엔 은모의 마지막 선택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은모가 친구인 미애(김애리)와 오토바이를 타며 어디론가 떠나는 엔딩 장면을 보며 비로써 그녀의 선택도 사랑이었음을 이해하고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중식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은모의 선택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서로 적극적으로 사랑을 이루려 하지 않고 한발자국 물러서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며 서로를 지켜주려는 두 사람의 사랑은 자극적인 소재와는 달리 [파주]를 진정 아름다운 사랑영화로 만들어줍니다.


 

그 어떤 사랑보다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안개에 갇힌 듯한...

[파주]의 시작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도시의 풍경입니다. 영화 [미스트]에서도 그랬지만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는 불안감과 답답함을 안겨줍니다. 저 안개 너머에 무엇을 있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파주]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바로 안개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 자체의 분위기가 안개 같고, 영화를 이루는 캐릭터들도 안개 같으며, 중식과 은모의 사랑도 안개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사랑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안겨줬습니다.
어찌 보면 안개 같은 영화이기에 상당히 답답하고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박찬옥 감독의 스타일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안개 같기에 중식과 은모의 사랑은 답답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합니다. 과연 형부와 처제의 금지된 사랑을 표현하는데 불안함이라는 감정보다 더 안성맞춤은 것이 있을까요?
그렇기에 저는 안개 같은 영화 [파주]가 좋습니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답답하지만 금지된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불안함이라는 적절한 감정을 갖춘 이 영화가 좋습니다. 중식과 은모는 과연 사회의 통념을 넘어서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또 다시 그렇게 답답하고 불안한 사랑을 이어 나갈 것입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도시의 풍경처럼 말이죠.
[미쓰 홍당무]로 주목받은 서우의 연기도 너무 좋았고, 언제나 편안한 연기를 펼치는 이선균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얼핏 전도연을 닮은 심이영의 연기도 인상 깊었고요. 그냥 하루 세 편의 영화를 보면서 한 편 정도는 오락성이 아닌 작품성으로 영화를 보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선택한 [파주]에서 뜻밖에 너무나도 가슴 애틋한 사랑을 만나니 진흙 속에 진주를 발견한 기분입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그녀의 연기를 보면 가슴이 뿌듯하다.

편안한 그의 연기는 영화를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