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트란 안 홍
주연 : 조쉬 하트넷, 이병헌, 기무라 타쿠야
개봉 : 2009년 10월 15일
관람 : 2009년 10월 20일
등급 : 18세 이상
어차피 영화적 재미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10월 20일 마지막으로 제가 선택한 영화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입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스타 조쉬 하트넷과 일본스타 기무라 타쿠야, 그리고 [지. 아이. 조 : 전쟁의 서막]을 통해 성공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류스타 이병헌까지 가세한 초호화 캐스팅이 돋보이는 영화이지만 사실 저는 이 영화에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이 영화에 대한 네티즌 평이 '재미있다.'보다는 '난해하다.'라는 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을 확인했고, 지난번 [디스트릭트 9]을 보러 갔을 때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보고 극장을 나서던 두 명의 여성이 '내 생애 최악의 영화'라며 불평을 늘여 놓는 것을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의 영화 평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저로써는 그러한 것들에는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감독이 다른 누구도 아닌 트란 안 홍 감독이라는 사실이 이 영화의 재미에 대한 기대감을 깡그리 앗아간 이유였습니다.
트란 안 홍 감독의 데뷔작인 [그린 파파야 향기]는 깐느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황금카메라상을 안겼으며 단번에 그를 베트남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양조위를 캐스팅했던 [씨클로]는 베니스 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세 번째 영화인 [여름의 수직선에서]는 깐느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역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트란 안 홍 감독은 영화제를 위한 감독의 입지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영화제를 위한 감독의 영화... 좋게 말하면 작품성이 있는 영화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난해하고 재미없는 영화를 뜻합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 [씨클로]를 본 저로써는 이들 영화가 영화의 재미보다는 주제의식과 아름다운 영상미에 중점을 둔 영화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역시도 그런 그의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비상업영화에도 잘 어울리는 우리 병헌씨.
시타오... 너의 정체는 도대체 뭐냐?
제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사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기본 스토리 라인은 전형적인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엽기적인 연쇄 살인마와의 한 판 승부의 후유증으로 경찰직에서 물러난 클라인(조쉬 하트넷)에게 어느 날 대 부호가 실종된 아들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하게 됩니다. 클라인은 부호의 실종된 아들인 시타오(기무라 타쿠야)를 찾기 위해 홍콩을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잔인한 홍콩의 마피아 보스 수동포(이병헌)와 그의 연인인 릴리(트란 누 옌케)와 얽히게 됩니다.
클라인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릴러영화에 어울리는 캐릭터이고, 수동포는 홍콩의 느와르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동서양의 배우의 조합만큼이나 이 영화의 캐릭터 역시 동서양 액션영화의 대표적인 캐릭터로 이루어 진 셈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상업영화에서나 어울리는 캐릭터들을 지니고 있지만 도저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시타오라는 캐릭터로 인하여 영화의 내용 자체가 모호해져 버렸습니다.
얼핏 보기엔 [그린 마일]의 존 커피(마이클 클라크 던칸)처럼 타인의 고통을 빨아 들여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닌 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미스터리에 휩싸인 시타오을 보여주지만 그가 왜 그러한 고통을 감내하는지, 그것이 그에게, 그리고 이 영화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끝내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한 불확실성은 예술영화와 일반관객들과의 간격을 벌여놓은 요소들인데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역시 일반관객들과의 간격을 좁힐 생각보다는 '너희가 이해 못해도 어쩔 수 없지.'식의 안하무인적인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스토리 전개를 영화 시작 전부터 눈치 챘기 때문에 전 '흥, 그럴 줄 알았지.'라는 자세로 영화에 집중했습니다.
기무라씨, 당신은 시타오가 왜 그러는지 아시나요?
하지만 결국 내가 이 영화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보기 위한 제 마음가짐은 빈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조쉬 하트넷과 이병헌, 기무라 타쿠야, 여문락까지, 미국, 한국, 일본, 홍콩의 미남 스타가 총 출동하더라도 결코 이 영화가 상업영화는 아닐 것이라는 애초의 판단은 옳았고, 트란 안 홍 감독의 전작으로 유추해볼 때 스토리 전개보다는 이미지를 위한 영화일 것이라는 추측도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틀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잔인함이었습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의 아름다운 영상을 기억하는 저로써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가 비록 어려운 내용을 지닌 영화이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영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나름 기대했습니다. 그러한 기대가 바로 제가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영화의 시작부터 저는 고개를 돌려야 했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이용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엽기 살인마의 등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영화는 잔인한 장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만약 아침부터 이 영화를 봤다면 한동안 점심식사를 뒤로 미루어야 했을 것이며, 만약 점심식사 후에 곧바로 봤다면 영화가 끝나고 곧장 화장실로 향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전 비위가 상당히 약한 편입니다.)
그러한 잔인성은 결국 '예술영화? 어디 한번 내가 도전해 보지.'라는 당찬 마음으로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 도전했다가, 영화를 보는 내내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도대체 이 영화 왜 이래'라고 속으로 중얼거려야 했습니다. 모호한 스토리 라인도 좋습니다. 시타오가 예수인지 모르지만 암튼 종교적인 내용도 참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가 이 영화에 굴복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잔인한 장면들이었습니다. 그래, 인정합니다. 내가 졌습니다. 당신이 짱 먹으세요. 트란 안 홍 감독님...
너무 그러지마. 나도 이 영화의 잔인함에 고개를 돌리고 싶단 말이다.
감독님, 왜 이리 잔인해 지셨어요? 예전엔 안 그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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