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용균
주연 : 조승우, 수애, 천호진, 최재웅
개봉 : 2009년 9월 24일
관람 : 2009년 9월 24일
등급 : 15세 이상
야호! 암울했던 극장가의 비수기가 끝났다.
정말로 암울했던 극장가의 비수기 9월이 이제 추석을 기점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추석이 지나고 나면 겨울방학시즌 이전인 10월, 11월도 극장가의 비수기에 해당되지만 10월엔 [디스트릭스 9], [나는 비와 함께 간다]와 같은 기대 작들이 기다리고 있고, 11월에도 [2012], [닌자 어쌔신]등 오히려 기대 작들이 수두룩합니다. 결국 9월이 지남으로써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어서 몸부림쳤던 저는 한 고비를 넘긴 셈입니다.
전통적으로 명절엔 우리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합니다. 그래서인지 일찌감치 [불꽃처럼 나비처럼]과 [내 사랑 내 곁에]가 동시에 개봉하여 추석 관객들을 유혹했습니다. 명절 극장가의 단골이었던 성룡 영화가 이젠 보이지 않고, 코미디가 대세였던 예전과는 달리 올 추석에 개봉한 두 편의 우리 영화의 장르는 멜로라는 점이 특이했지만 그래도 저로써는 비수기를 끝내준 이들 영화가 고맙기만 했습니다.
사극을 좋아하는 저로써는 추석을 겨냥하여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 단연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 먼저 눈에 갔습니다. 조승우와 수애라는 믿음직한 배우의 조합도 좋았고, TV 드라마와 소설, 뮤지컬까지 다양한 장르의 대중문화 속에서 폭 넓게 사용되고 있는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무미건조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한 단순한 사극이 아닌 역사적인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입니다. 최근 팩션이라는 장르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흥미로운 재해석과 함께 상업영화로써의 영화적 재미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도 그러합니다. 조선 말기, 일본의 위협 속에서 나라를 강탈당할 위기에 빠진 급박한 상황의 한 가운데에 서있던 명성황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팩션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가는 상당히 냉철한 편이며, 흥행에서도 같은 날 개봉한 [내 사랑 내 곁에]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는 기대작들의 성찬이 벌어질 것이다.
기대치를 채우지 못한 배우들의 연기.
제가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너무 기대해서일까요? 이 영화는 그런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제 기대치를 채우기엔 약간 모자란 영화였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배우들의 연기에 있습니다.
조승우와 수애... 상당히 연기를 잘 하는 배우입니다. 특히 조승우는 젊은 배우로는 드물게 부드러운 감수성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배우입니다. [타짜]에서 부드러움과 강렬함을 동시에 뿜어내는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수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님은 먼 곳에]를 통해서 그냥 예쁜 인형 같은 배우라는 제 편견을 철저하게 깨부쉈습니다.
이 둘이 주연을 맡은 영화이니만큼 연기력에 대한 기대 역시도 남달랐습니다. 수애가 명성황후를 연기함으로써 조선 말기를 살다간 여장부 명성황후가 아닌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한 여성으로써 민자영을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며, 무명 역시 조승우라는 배우에 의해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도, 지켜줄 수도 없는 아픔을 지닌 슬픈 무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둘은 민자영과 무명의 캐릭터를 잘 표현해냅니다. 하지만 조승우와 수애라면 이 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해 냈어야 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모자랐습니다.
영화의 초반 민자영이 궁에 들어가기 전에 죽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바닷가를 가는 장면에서 조승우와 수애의 연기는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린시절 어머니를 여위고 냉철한 킬러로써의 삶을 살던 무명이 민자영에게 첫 눈에 반하여 우스꽝스럽게 허둥지둥 거리는 연기와 양반 규수의 체면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속치마를 보이며 소녀처럼 거닐던 민자영의 모습은 이전, 그리고 이후의 무명, 민자영의 캐릭터와는 너무 상반되기에 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조승우와 수애 정도의 연기력이라면 이러한 낯간지러운 장면들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사랑의 감정을 잘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가장 중요해야할 장면이 가장 어색했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력 탓일까?
감정의 과잉, 평범한 스토리 전개, 촌스러운 CG
솔직히 조승우와 수애의 연기가 기대치에 밑돌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초반 20여분의 짧은 시간에서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시간에서는 수애의 여성으로써의 명성황후의 모습을, 조승우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한 무사의 모습을 잘 표현해 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명과 민자영의 슬픈 사랑과 안타까운 운명으로 인하여 관객들의 눈물샘을 쑥 빼는 일만 남은 셈입니다.
하지만 전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며 결코 눈시울이 단 한번도 뜨거워지지 않았습니다. 무명과 민자영의 이룰 수 없는 슬픈 사랑을 보며 한번쯤은 뜨거운 눈물을 흐릴 만도 했는데 영화를 보는 제 눈은 그저 담담하게 스크린을 응시하기만 했습니다.
이 영화가 슬픈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가 슬프지 않았던 이유는 이 영화 자체가 중반부터 내내 슬픔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분위기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슬픔이라는 것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서서히 관객의 감정을 촉촉하게 적셔야 했지만 이 영화는 중반부터 '빨리 울어!'라고 강요하듯이 슬픔을 드러냅니다. 그 결과 민자영과 무명의 최후를 그린 클라이맥스에서는 슬픔에 적응되어서 오히려 슬프지 않는 부작용을 낳은 거죠. [와니와 준하]에서 슬픔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멜로를 선보여 제게 깊은 인상을 전해줬던 김용균 감독이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는 흥행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무리수를 둔 느낌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평범한 스토리 라인도 이 영화의 재미를 갉아 먹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이미 너무나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고, 여기에 민자영과 무명의 사랑 이야기가 덧붙여졌지만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별다른 특별함 없이 그저 평범하게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맴돌다 끝나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무명과 뇌전(최재웅)의 결투 장면에 과도하게 사용된 CG도 좀 촌스러웠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CG는 CG를 했는지 안했는지 모를 정도로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CG는 '우리 CG했어요.'라고 대놓고 자랑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가 열심히 싸워도 우린 이미 그의 죽음을 알고 있기에 슬프지 않다.
역사의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기대와는 다르게 이 영화에 실망하고 네티즌들의 영화 평들을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보신 분들도 있고, 저처럼 약간 실망하신 분들도 있고, 최악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시며 욕하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민자영은 조선의 수치다.'라는 요점의 글이 있더군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는 참 어렵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고, 기록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사실이 왜곡되거나 과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경우도 만약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우리나라의 영토가 달라졌을 것이며 아시아에서의 우리나라의 위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신라는 분열된 한반도의 삼국을 통일시킨 위대한 나라일 수도 있고, 우리 민족의 활동영역을 한반도라는 작은 땅덩어리에 가둬놓은 한심한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에게 후대를 위해서 삼국을 통일하지 말고 고구려한테 멸망을 당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명성황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명한 역사학자가 '이렇게 말했다.'라고 해서 그 말을 100% 믿고 무조건 그녀를 비난하는 것은 참 우스운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명성황후에 대한 그 역사학자의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전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닌 이상 그냥 영화는 영화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맹점은 명성황후가 어떤 인물인가가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시해당한 국모라는 아픈 시대의 상징성과 그녀의 여성성을 강조한 가상의 사랑 이야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재미있게 보지 못했으면서 역사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양 떠들며 악의적인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괜히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옹호해주고 싶어지네요.
최소한 이 영화에선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대의 아픔과 사랑의 슬픔을 느낄 수 있으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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