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조민호
주연 : 박해일, 박희순, 신민아, 이민기, 정유미
개봉 : 2009년 8월 6일
관람 : 2009년 8월 6일
등급 : 15세 이상
여름휴가 마지막 날 즐긴 [10억]의 유혹
어느덧 4일 간의 제 여름휴가는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출근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아침이 아닌, 느긋하게 잠의 여운을 즐기면서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는 달콤함을 이제는 당분간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서운하더군요. 암튼 여름휴가 마지막 날에도 느지막하게 일어나 올해 제 여름휴가를 지배했던 졸업논문을 드디어 제출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식당에서 칼국수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여유롭게 영화를 봤습니다.
여름휴가의 마지막 날 제가 본 영화는 [10억]과 [지.아이. 조 :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지. 아이. 조 : 전쟁의 서막]이야 여름의 끝자락에 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이기에 당연히 봐야할 영화였지만 [10억]은 최근까지만 해도 그다지 끌리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해운대]에서 이민기의 귀여운 연기와 [차우]에서 정유미의 짜증나는 연기를 동시에 경험한 저로써는 [10억]에서는 그 젊은 배우들이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고, 미스터리스릴러영화에서의 마지막 반전도 제 호기심을 꽤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맛 난 음식은 마지막에 먹는다는 신념으로 애초부터 기대 작이었던 [지. 아이. 조 : 전쟁의 서막]은 여름휴가의 마지막 영화로 미뤄두고 [10억]부터 봤습니다.
결과적으로 [10억]은 꽤 신선한 기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실망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사건 자체가 스릴이 부족했고, 캐릭터들도 공감되지 않았으며, 마지막 반전은 허무했습니다. 젊고 유망한 배우들을 총집합해놓은 영화치고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며 '제법인대.'라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도 꽤 있었습니다.
쭈니의 여름휴가는 바다 한 번 가지 못한 채 영화로 막을 내리다.
조유진은 혹시 카이저 소제?
[10억]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8명의 게임 참가자와 2명의 방송 스탭 중 살아남은 것은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살아남은 그 한명의 캐릭터인 조유진(신민아)이 경찰에 진술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혹시 그러한 설정에서 기억나는 영화 없으신가요? 전 [유주얼 서스펙트]가 생각났습니다. [식스센스]와 함께 최고의 반전영화로 손꼽히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말입니다.
[유주얼 서스펙트] 역시 27명이 사망한 유혈참극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버벌(케빈 스페이시)이 사건의 내막을 경찰에 진술하면서 영화가 진행됩니다. 사건에 대한 아무런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과 관객은 버벌의 진술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버벌이 지목한 범인 카이저 소제의 행방이 사건 해결의 유일한 단서라는 착각에 빠져듭니다.
그렇다면 [유주얼 서스펙트]의 함정은 무엇일까요? 바로 영화 속 화자(話者)의 이야기가 꼭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디까지나 버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버벌이 이야기를 꾸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버벌의 이야기가 영화 속의 영상으로 재현되면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야기가 진실인 것으로 믿게 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화자는 관객의 믿음을 사야하고 화자의 이야기는 관객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짜임새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버벌은 그 모든 것에 적합했습니다. 카이저 소제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절름발이 버벌의 모습은 처음부터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도했고, 그의 이야기는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스릴 넘치고 재미있었습니다.
[10억]의 조유진은 분명 [유주얼 서스펙트]의 버벌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연약해 보였고, 영화 속의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신뢰감이 갔으니까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조유진의 이야기는 저를 한 눈 팔지 못하도록 하는 매력이 부족했습니다. 물론 [유주얼 서스펙트]와는 달리 [10억]은 사건의 전반적인 부분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인터넷에 생중계되지 않은 사건의 이면은 조유진의 이야기에 철저하게 기대야한다는 점에서 [10억]의 이야기의 힘은 아쉬웠습니다.
우린 조유진을 믿어야 하는가? 믿지 말아야 하는가?
'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한 것이다.
[10억]의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은 10억이라는 상금을 타기 위해서 모인 8명의 게임 참가자가 실제로 하나씩 죽어간다는 설정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죽는가?'입니다. '왜?'라는 질문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명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10억]의 '어떻게?'는 상당히 부실합니다. 여덟 명의 게임 참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고작 한 명의 게임 진행자(카메라맨은 열외하기로 하죠.)입니다. 결국 8:1이라는 불공정한 싸움입니다. 여기에서 게임 진행자가 유리한 것은 처음엔 이 게임이 탈락자를 진짜로 죽이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게임 진행자인 장 PD(박희순)는 그러한 이점을 이용하여 첫 번째와 두 번째 희생자를 손쉽게 제거합니다. 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아닙니다. 게임 참가자들도 이 서바이벌 게임의 목적을 이미 알고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진정한 시작을 알립니다. 이미 두 명이 죽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다섯 명의 건장한(뚱땡이를 제외한) 젊은이입니다. 5:1... 여전히 게임 진행자가 불리합니다. 장 PD는 과연 이 불리함을 어떻게 이겨낼까요? 일단 장 PD에겐 유리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게임 참가자들은 장 PD의 일거수일투족을 못 보지만, 장 PD는 게임 참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몰카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이고, 게임 참가자들의 애당초 목표인 10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 PD가 가지고 있는 이점 중 감시 카메라는 영화에서 너무 과도하게 이용됩니다. 마치 그 넓은 땅을 모두 감시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장 PD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과장한 셈이죠. 그러나 또 다른 장 PD의 이점인 10억은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용되지 못합니다. 영화의 제목이 [10억]이니만큼 차라리 10억이 감시카메라보다 과장되게 이용되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난 말이야, 수 백, 아니 수천 개의 몰카를 지닌 몰카의 대왕이다.
게임 참가자들의 잘 못된 선택.
장 PD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게임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게임 참가자들의 잘 못된 선택 때문입니다. 수적으로 유리한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그들은 이 넓은 땅에서 무작정 도망치기를 선택합니다. 게임 시작 전에 차를 타고 게임 장소로 이동한 만큼 게임 장소가 마을과는 상당히 먼 곳임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점을 전혀 활용하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선택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게임 참가자들 중에서 장 PD와 내통한 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잘 못된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의심한 것은 게임 참가자들을 이끄는 리더인 한기태(박해일), 박철희(이민기) 그리고 이 영화의 화자인 조유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심은 결국 부질없는 결말에 허무하게 막을 내립니다.
결국 [10억]은 '어떻게?'보다 '왜?'에 초점을 맞춘 영화였습니다. 분명 '왜?'라는 부분도 영화 속에서 중요하지만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이끌어 가야하는 부분은 '어떻게?'입니다. 차라리 [배틀로얄]처럼 혼자 남으면 10억이라는 거액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게임 참가자들이 처음부터 서로 죽이는 설정이었다면 '어떻게?'가 잘 표현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쉘로우 그레이브]처럼 돈 가방을 손에 쥔 게임 참가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돈 가방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배신이 난무하는 설정이었다면 차라리 재미있었을 듯합니다. 조민호 감독도 그러한 점을 알고 있었는지 후반부에 [배틀로얄], [쉘로우 그레이브]의 설정을 비슷하게나마 삽입하지만 오히려 너무 뒤늦은 캐릭터의 급박한 변화로 인하여 어색해지기만 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10억]은 '어떻게?'를 포기하면서까지 그토록 자신 있게 지켜왔던 '왜?'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왜?'라는 질문의 해답은 이미 김이 빠져버린 이 영화의 재미를 일으켜 세우지 못합니다. [유주얼 서스펙트]를 살짝 따라한 마지막 반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새롭지 못하고 오히려 진부합니다. '어떻게?'라는 의문을 좀 더 보완하였더라면 충분히 재미있는 미스터리스릴러가 되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만 남았습니다.
철희는 좀 더 일찍 변했어야 했다.
게임 진행자들이 진즉에 수적인 이점을 이용한 장 PD 습격을 감행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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