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연우
주연 : 김윤석, 정경호
개봉 : 2009년 6월 11일
관람 : 2009년 7월 24일
등급 : 연소자 관람가
잠시 작은 한국영화에 눈길을 돌리다.
매년 여름만 되면 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느라 영화를 향한 모든 시선을 빼앗깁니다. 올해 여름도 그러했습니다. [스타트랙 : 더 비기닝]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에 이르기까지... 무려 7편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쉴 새 없이 관람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관람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과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가 극장가를 점령하여 잠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개봉이 중단된 시점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게 시선을 빼앗겨 미처 보지 못한 우리 영화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거북이 달린다], [킹콩을 들다], [차우] 등등.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관람하면서도 [박쥐], [마더]와 같은 한국영화 화제작들은 꼼꼼히 챙겨 봤지만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은 작은 영화들에겐 관심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극장 앞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다가 작은 우리영화 제목들을 보니 요즘 들어서 제가 너무 편식만 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더운 여름이라고 시원한 아이스크림만 먹다가는 배탈이 날지도 모른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느낀 저는 [해운대]를 보기위해 갔던 극장 앞에서 충동적으로 [거북이 달린다]의 표를 끊었습니다.
[거북이 달린다]는 개봉한지 벌써 한 달이 넘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제게 [블러드]와 더불어 기대작으로 꼽혔지만 결국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보느라 잊혀진 영화입니다. [블러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관객들에게 꽤 좋은 평을 얻은 영화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개봉한지 한 달이 넘도록 개봉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나봅니다.
김윤석, 그가 망가질수록 관객들의 즐거움은 더욱 커진다.
[추격자](토끼) VS [거북이 달린다](거북이)
[거북이 달린다]는 제목 그대로 거북이 같은 시골 형사가 토끼 같은 신출귀몰한 탈주범을 잡기 위해서 남자의 자존심을 걸고 뛰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거북이 같은 시골 형사 역에 김윤석은 [추격자]에서 그 끈적끈적 거리는 끈기로 한국형 스릴러영화의 진수를 보여준 장본인입니다. 그런 그가 선택한 또 다른 스릴러영화였기에 [거북이 달린다]는 필연적으로 [추격자]와 비교당할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거북이 달린다]의 개봉 초기에는 [추격자]의 아류작이라는 소리마저 들었으니, [거북이 달린다]의 흥행여부는 [추격자]의 아류작이라는 오명을 벗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추격자]는 토끼라면 [거북이 달린다]는 거북이였습니다. 이 두 영화는 김윤석이 주연을 맡았다는 것 이외에 놀랍게도 비슷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김윤석의 캐릭터마저도 완벽하게 틀립니다. [추격자]에서의 엄중호(김윤석)는 보도방을 운영하는 전직형사이지만 뛰어난 직관력과 동물 같은 감각으로 끈질기게 지영민(하정우)을 뒤쫓고 김미진(서영희)을 찾아냅니다. 그는 비록 쓰레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먹잇감을 뒤쫓고 찾아내는 능력만큼은 토끼처럼 재빠르고 야수처럼 끈질깁니다.
그와 반대로 [거북이 달린다]의 조필성(김윤석)은 말 그대로 거북이입니다. 보도방을 운영하는 전직형사 엄중호와 비교해도 더욱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릿하고 할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는 탈주범인 송기태(정경호)를 뒤쫓을 때도 결코 서두르지 못하고 느릿느릿 움직입니다.
어떻게 같은 배우가 같은 장르의 영화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저렇게 다른 모습일 수 있는지 영화를 보다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김윤석의 힘이겠죠? 토끼도, 거북이도 연기할 수 있는 연기력을 지닌 배우 김윤석의 힘... 그것 밖에는 설명이 안 되네요.
난 말이여... 결코 서두르지 않아. 끈질기게 기다릴 뿐이지.
송기태(토끼) VS 조필성(거북이)
이제 관객 스스로 [거북이 달린다]가 [추격자]의 아류작이라는 오명을 벗겨냈다면 본격적으로 [거북이 달린다]에서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볼 만반의 준비가 끝난 셈입니다.
사실 애초부터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에서 토끼를 이길 수 없었듯이 조필성 역시 송기태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토끼와 거북이' 동화를 읽으면서도 느꼈었지만 이건 너무 불공평한 게임입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이 불공평한 게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끼의 조롱으로 인하여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거북이 달린다]는 충실하게 '토끼와 거북이'우화를 영화 속에 재현해 놓습니다. 거북이인 조필성에게 모멸감을 안겨줌으로써 그가 이 불공평한 게임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유도합니다. 누가 봐도 승자가 뻔히 결정된 게임에 말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이 영화의 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만약 거북이가 토끼 흉내를 내며 스피드로 승부를 보려 했다면 거북이는 결코 토끼를 이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필성 역시 신출귀몰한 송기태 흉내를 내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 바로 덫을 놓고 끈질기게 기다립니다. 언젠가는 송기태가 이 덫에 걸릴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연우 감독은 어설픈 거북이들의 행동으로 끈임 없이 관객들을 웃깁니다. 그가 웃기지 않은 채 짜증만 났던 코미디영화 [2424]의 감독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북이 달린다]의 재치 넘치는 연출력은 거북이의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도 관객들에겐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 영리함을 보여줍니다.
어설픈 거북이와 친구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기 위해서는...
토끼는 너무나도 손쉽게 거북이를 앞지르자 방심을 하고, 그 틈을 타서 부지런하게 거북이는 토끼를 앞지릅니다. 과연 태연스럽게 낮잠을 자는 토끼의 앞을 지나가면서 거북이는 얼마나 많은 유혹을 느꼈을까요? 배도 고팠을 것이고, 목도 말랐을 것이며, 잠시 쉬고 싶었을 것이고, 토끼처럼 편안하게 낮잠도 자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고 승리를 위해 앞으로, 앞으로 전진 할 따름입니다.
조필성도 그러했습니다. 처음엔 소싸움을 해서 벌어들인 돈에 대한 욕심에 잠시 한 눈을 팔기도 하지만 송기태를 잡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그는 한 눈 팔지 않고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합니다. 그리고 결국 토끼인 송기태를 이깁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라 할 수 있는 두 캐릭터간의 최후의 싸움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토끼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경주에서 이긴 거북이처럼, 조필성은 그렇게 송기태를 이겨냅니다. 남편으로써, 아버지로써의 자존심을 살리고 싶었고, 자신을 믿지 않고 무시하던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고 싶었던 이 거북이는 그렇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뤄냅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정말 제목 한 번 잘 지었다는 생각이듭니다. 개봉 첫 주, 최대한 많은 개봉관을 잡아 짧고 굵게 치고 빠지는 멀티플렉스 시대의 토끼와 같은 영화들 속에서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부지런히 그리고 천천히 관객을 모아가는 거북이 같은 이 영화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가끔 이런 거북이가 있어야 스피드만 강조하는 이 삭막한 시대도 살만하다고 느껴지지 않을까요?
재빠른 토끼도 끈질긴 거북이 앞에선 지쳐 갈 뿐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최후의 경주... 한 눈 팔지 않는 자가 이긴다.
IP Address : 211.227.13.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