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대민
주연 : 황정민, 류덕환, 엄지원, 오달수
개봉 : 2009년 4월 2일
관람 : 2009년 4월 8일
등급 : 15세 이상
난 탐정 추리극이 좋다.
제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이 바로 '셜록 홈즈 시리즈'였습니다. 홈즈가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풀 때마다 제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었습니다. 이후에는 '괴도 루팽'은 물론이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등을 섭렵하며 한때는 추리 소설 작가를 꿈꾸기도 했답니다.
아! 물론 제가 직접 쓴 추리소설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인데 아버지가 고위급 경찰인 주인공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경찰이라는 조직의 경직된 분위기 대신 자유분방하게 혼자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칫솔에 독약을 묻혀 남편을 살해한 귀부인의 범죄를 밝혀내는 소설의 인트로까지는 완성했지만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은 완성하지 못한 채 제 추리소설은 그렇게 잊혀 졌습니다.
추리소설을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더군요. 사건, 범인, 알리바이, 추리 과정 등 꼼꼼하게 신경써야할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마지막 반전에 신경 쓰면 소설 자체가 억지스러워지고, 그렇다고 억지 없이 꾸미려면 너무 뻔해지고...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서인지 저는 스릴러영화를 좋아합니다. 특히 범인을 맞춰야하는 미스터리 스릴러를 좋아하는데 영화와의 두뇌싸움에서 이겼을 때의 쾌감도 좋지만 졌을 때의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은 제겐 정말 마약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가 [그림자 살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2009년 시작과 동시에 쏟아져 나온 한국형 스릴러영화들이 제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하는 가운데 [그림자 살인]은 아예 제 취향에 100% 맞추겠다는 듯이 탐정 추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제게 있어서 오랜만에 받아보는 도전을 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혼자 극장에서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저는 생각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내가 전부 밝혀내겠다.'라고...
쭈니야, 과연 네가 날 이길 수 있을까?
시대적 배경도, 색다른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그림자 살인]은 탐정 추리극이라는 제 취향에 딱 맞은 맞춤 장르영화라는 점 외에도 제가 좋아하는 요소가 많은 영화입니다. 특히 이 영화의 배경이 현대가 아닌 일제시대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탐정하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셜록 홈즈를 생각하는 제게 탐정영화는 현대보다는 근대화의 물결이 소용돌이치던 100여 년 전이 더 잘 어울립니다. 게다가 [그림자 살인]은 시대적 배경을 잘 활용하여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해냅니다.
주인공인 홍진호(황정민)는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바람난 여인네들의 뒤를 캐주며 돈을 받는 3류 탐정입니다. 그는 나라를 잃은 아픔과 사랑하는 여인을 잡지 못한 상실감에 막연하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동경하고 있으며, 거대한 유람선을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 유일한 꿈입니다. 돈을 벌기위해 미국으로 가려한다고 그는 설명하지만 제가 보기엔 조선이라는 땅에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할 것이 남아있지 않아 조국을 버리고 낯선 미국으로 떠나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광수(류덕환)와 순덕(엄지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수는 의학도를 꿈꾸지만 가난한 조선인에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해부 실습을 위해 버려진 시체를 몰래 집으로 가져올 정도로 열성적이지만 그러한 열성 때문에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순덕은 여성이라는 굴레를 갇혀 있습니다. 여류 발명가를 꿈꾸지만 여성이라는 사회적 지휘는 그녀에게 그런 창조적인 생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습니다.
탐정 진호, 의학도 광수, 발명가 순덕으로 이루어진 황금의 트리오는 [그림자 살인]에 대한 기대도를 더욱 높였습니다. 구태의연한 과거의 유물들이 서양의 과학으로 대체되던 그 시기. 진호와 광수, 순덕은 새로운 서양의 문물을 이용하여 고위 관료들만 골라 죽이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황금 트리오라던데... 뭔가 보여줘야하지 않겠어?
캐릭터는 잘 구축했건만...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림자 살인]은 독특한 캐릭터를 내세운 영화는 맞지만 탐정 추리극으로는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범인을 너무 쉽게 노출한 것이 문제인데... 물론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긴 했지만 그러한 반전으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쾌감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를 살리는 것도 실패했습니다. 진호와 순덕의 관계는 알듯 모를 듯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광수의 활약은 미비하며, 순덕의 발명품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림자 살인]이 좀 더 완벽한 탐정 추리극이 되려면 각각의 캐릭터들이 유기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건을 퍼즐을 맞춰나가야 했습니다. 진호는 추리력과 액션, 광수는 의학적 지식, 그리고 그들의 활약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순덕의 발명품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 살인]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표현한다면 영화가 너무 방대해 졌을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핍박받던 서민의 애환도 담아야 하고,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질러야 했던 범인의 감정도 관객에게 전달해야 했으며, 진호 일당의 통쾌한 마지막 반격도 준비해야 했으니 거기에 캐릭터간의 관계와 그들이 각자의 능력으로 사건의 퍼즐을 맞추는 과정을 그려내기엔 무리가 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습니다. 독특한 캐릭터를 잘 구축해 놓고 막상 그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격이 되고 말았으니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러닝타임을 조금 늘이더라도, 아니면 사건의 전말을 조금 축소해서라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 캐릭터는 정교하게 살렸어야했습니다.
야, 이런 건 의사인 네가 해야 되는 것 아냐?
만약 2편이 나온다면...
[그림자 살인]은 분명 시리즈화가 가능한 영화입니다. 무엇보다도 캐릭터가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 살인]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한 점은 높이 살만합니다. 이제 [그림자 살인]이 활용하지 못한 캐릭터를 2편은 그냥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소재는 무궁무진합니다. 나라를 잃은 아픔과 엽기적인 사건을 한데 묶으면 관객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도 수월합니다. 게다가 영화 자체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강약의 조절을 하는 황정민의 연기력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의학도에서 전문 의사가 된 광수의 활약도를 좀 더 강조하고, 1편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진호와 순덕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면 관객들이 좋아하는 러브라인까지 형성되므로 영화 자체는 더욱도 풍성해질 것입니다.
제게 [그림자 살인]을 평가하라면 솔직히 가능성만 보여준 불발판이라고 평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림자 살인]이 보여준 가능성은 그냥 묻어버리기엔 아깝습니다. 최근 봤던 그 어떤 한국영화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구축했기에 [그림자 살인]을 그냥 실패작이라 치부하기엔 아쉬운 것입니다.
이 영화가 데뷔작인 박대민 감독이 좀 더 장편영화의 감각을 배우고 2편을 도전한다면 충분히 할리우드 스릴러영화와 승부가 될 것입니다. 만약 2편이 나온다면 전 열심히 응원할 것입니다. 진호, 광수, 순덕의 황금 트리오가 다시금 손을 잡고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전통 탐정 추리극에 도전할 수 있도록...
2편이 나온다면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1편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한 난 2편에 나올 수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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