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9년 영화이야기

[번 애프터 리딩] - 코엔 형제의 장난에 놀아나다.

쭈니-1 2009. 12. 8. 23:18

 

 


감독 :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주연 :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존 말코비치, 틸다 스윈튼, 프란시스 맥도먼드
개봉 : 2009년 3월 26일
관람 : 2009년 4월 2일
등급 : 18세 이상

코엔 형제의 장난기가 발동하다.

[번 애프터 리딩]을 봤습니다. 여전히 혼자 간 극장 앞에서 잠시 [그림자 살인]과 [번 애프터 리딩]을 놓고 고민에 빠졌었지만 [그림자 살인]은 어쩌면 구피와 함께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부질없는(정말 부질없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구피가 안 볼 것이 분명해 보이는 [번 애프터 리딩]을 봤습니다.
[번 애프터 리딩]은 요 근래 봤던 할리우드 영화중에서 캐스팅이 가장 화려한 영화입니다. 할리우드 최고의 연기 배우 브래드 피트와 조지 클루니가 [오션스 시리즈]이후 다시 호흡을 맞추었으며, 1997년 코엔 형제의 [파고]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맥도먼드, 2008년 [마이클 클레이튼]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틸다 스윈튼, 그리고 개성 있는 성격파 배우로 유명한 존 말코비치 등이 출연합니다. 이 정도면 '우와!'라는 탄성이 나올만합니다.
하지만 [번 애프터 리딩]은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많은 개봉관을 잡지는 못했습니다. 출연 배우들의 이름값이라면 전국 대규모 개봉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영화인데 이 영화가 개봉하는 극장은 서울 시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2008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던 코엔 형제의 영화에다가 스타급 배우들이 단체로 출연한 영화치고는 참 조촐한 개봉입니다.
그러나 [번 애프터 리딩]을 보는 순간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이 영화는 결코 대중적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작품성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마치 코엔 형제가 그들답지 않은 심각한 스릴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만든 이후 휴식 차원에서 가볍게 만든 장난 같은 영화였습니다.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감각은 여전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들었던 첫 생각은 '아! 코엔 형제의 장난에 내가 놀아났구나.'였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ㅋㅋㅋ 코엔형제의 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어때?


아무나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번 애프터 리딩]에는 주인공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형수술을 통해 인생역전을 실현하겠다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린다(프란시스 맥도먼드)와 그의 동료이자 얼간이 채드(브래드 피트), 술을 자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좌천되자 스스로 사표를 내던진 전직 CIA요원 오스본(존 말코비치)과 오스본과의 이혼을 결심한 케이티(틸다 스윈튼),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바람끼로 본의 아니게 이 영화의 중심에 서게 된 해리(조지 클루니)가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일 수 있겠네요.
이렇게 5명이나 되는 주인공들은 오스본의 자서전 CD를 매개체로 서로 얽힙니다. 우연히 오스본의 CD를 줍게 된 린다와 채드는 그것이 국가 일급비밀이 담긴 CD로 오인하여 오스본에게 돈을 뽑아내려하고, 케이티의 이혼 선언에 예민해진 오스본은 점점 자신에게 불어 닥친 최악의 상황에서 이성을 잃어갑니다. 케이티와는 내연의 연인이자 린다와 소개팅 사이트를 통해 만남을 가진 해리는 린다, 채드와 오스본의 복잡한 관계를 더욱 복잡하고 심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번 애프터 리딩]은 우선적으로 할리우드의 대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첩보영화를 비틉니다. CIA요원인 오스본은 불같은 성미를 지닌 별 볼일 없는 남자이고, CIA요원을 상대로 게임을 벌이는 린다와 채드는 슬랩스틱 코미디에나 어울릴 정도로 얼간이들입니다. 린다와 채드가 국가 일급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라 예상한 오스본의 CD는 별 볼일 없는 CIA요원의 회고록입니다. 린다와 채드는 자신들이 굉장한 음모에 빠져들었다고 착각하지만 그들이 빠져든 상황은 웃지 못 할 해프닝 밖에 안 되며, 그러한 상황은 해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첩보게임을 하느라 무척 심각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이없기만 합니다. 마치 이 사건을 보고받은 CIA국장의 그 어이없는 표정처럼 말입니다.


 

뭐야? 우린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말야?


코엔 형제의 장난은 여자에게만 특혜가 주어진다.

할리우드의 대표 장르인 첩보영화의 비틀기 외에도 [번 애프터 리딩]은 또 한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웃지 못 할 해프닝의 승자는 여자이고, 패자는 남자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린다부터 살펴보죠. 그녀는 제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갖춘 여성 캐릭터입니다. 헬스클럽 트레이너이면서 출렁출렁한 뱃살을 자랑하고, 그러한 뱃살을 노력으로 빼려하지 않고 성형수술로 해결하려합니다. 문제는 성형수술비인데 그녀는 그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에 대해서 서슴치않습니다. 마치 성형수술을 하면 자신의 인생이 활짝 필 것이라 생각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성형수술비를 마련하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린다는 해프닝을 일으킨 중심인물이고, 그 해프닝을 통해 다른 남성 캐릭터들을 비극으로 내몹니다. 매력적이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으며, 적극적이지도 않은 그녀는 최근에 제가 본 영화의 여성 캐릭터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최후의 승자입니다. 이 모든 해프닝을 단지 성형수술비 때문에 일으킨 그녀는 결국 다른 이들의 비극을 딛고 일어서 성형수술비를 획득합니다. 영화를 보고나면서 '이건 불공평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이 영화의 최종 승자는 린다 뿐만이 아닙니다. 오스본과 이혼을 결심한 케이티는 물론이고, 해리의 아내인 샌디 마저도 이 어이없는 해프닝 속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은 승자입니다. 그에 반에 남자 캐릭터들은 모두 개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파멸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올바른 캐릭터인 테드 마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코엔 형제의 장난은 제가 남자이기에 더욱더 불공평하게 느껴졌습니다.(전 정말 린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고 싶었습니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결과적으로는 코엔 형제의 장난에 놀아나다.

만약 제가 이 영화를 비디오로 봤다면 아마도 평이 호의적이었을 것입니다. 전 장난거는 영화를 좋아하고, 그것이 코엔 형제의 장난이라면 더욱더 재미있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습니다. 그것도 아주 어렵게 시간을 냈고, 제 두 번의 점심식사비와 같은 거금을 투자했습니다. 그러한 선택의 결과가 장 난같은 영화라니 조금 허탈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제게 있어서 코엔 형제의 영화가 재미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중 최초로 극장에서 봤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겐 그냥 주제가 무엇인지 알듯 말 듯 한 어려운 영화였고, 그 외에도 그들의 번뜩이는 유머 감각은 제 미소를 자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제가 코엔 형제의 영화중 재미있게 본 것은 평론가들이 코엔 형제 영화중 최악의 졸작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하드서커 대리인]입니다. [바톤 핑크]의 성공 이후 할리우드 거대 자본과 손을 잡고 만든 첫 영화인 [하드서커 대리인]은 그러나 코엔 형제와 할리우드 거대 자본은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 일깨워주며 실패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 영화가 하필 코엔 형제의 그 수많은 걸작 리스트 중에서 제가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라는 사실은 결국 코엔 형제의 영화가 저와는 잘 맞지 않음을 나타내는 지표일지도 모르겠네요.
암튼 코엔 형제의 장난에 놀아난 90분간의 경험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기에 앞으로 코엔 형제의 영화를 비디오가 아닌 극장에서 선택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날 장난의 대상으로 만들다니... 코엔 형제... 너희들 두고 보자.

대체 내게 왜 그래? 난 그래도 코엔 형제를 믿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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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요정
전체적으로 정말 장난같은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대충만들엇다는 느낌은 들지않더군요.
고급배우들이 전부다 망가져주니 그걸보는 재미만으로도 정말 만족이었습니다.
 2009/10/04   
쭈니 ㅋㅋㅋ
뭐 충분히 그렇습니다.
코엔 형제는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들이니 장난처럼 만들었어도 대충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2009/10/12   
이빨요정
뭐 그렇지요.
거장들이 심심풀이로 만든 영화는 못해도 평작이상은 되는거 같습니다.
아~! 저도 "허드서커 대리인" 을 정말 좋아합니다.
정말 재기발랄한 영화였던걸로 기억됩니다.
 2009/10/13   
쭈니 [하드서커 대리인]은 정말 재미있었는데...
아무래도 코엔 형제와 저는 영화 코드가 맞지 않나봅니다. ^^;
 2009/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