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대니 보일
주연 : 데브 파텔, 프리다 핀토, 마두르 미탈
개봉 : 2009년 3월 19일
관람 : 2009년 3월 22일
등급 : 15세 이상
대니 보일에게 오스카가 수여된 것은 특별한 사건이다.
2009년 아카데미 영화제 후보작이 발표되었을 때 저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수상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비록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비평가들의 만장일치로 걸작 판정을 받았고, 아카데미 영화제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드라마부문 작품상과 함께 감독상마저 휩쓸었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이 영국인 감독이 만들고 인도를 배경으로 한 작은 영화인 [슬럼독 밀리언네어]를 애써 외면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연발아 봤지만 영화를 보고나서도 [슬럼독 밀리어네어]보다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훨씬 아카데미의 구미에 맞는 영화임은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선택했습니다. 아주 조금 구색을 맞춘 것이 아니라 아예 작품상, 감독상 등 연기상을 제외한 주요 8개 부문의 상을 몰아서 줬습니다. 요즘 들어서 아카데미 영화제가 조금씩 그 성향이 바뀌고 있음을 느끼긴 했지만 분명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아닌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선택한 올해의 아카데미는 보수적 성향의 아카데미가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한 가운데에 선 영화인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의 빈민가 청년의 인생 역전기입니다. 영화는 주인공인 자말(데브 파텔)의 인생이 얼마나 골곡이 많았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대니 보일 감독은 그런 자말에게 동정의 눈길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말의 인생에 약간의 유머와 활력을 불어 넣음으로써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인도 빈민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강요하기 보다는 유쾌한 해피엔딩을 선사합니다.
그렇기에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비교해서 아주 작은 규모의 영화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긍정적인 삶의 방식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갓난아기의 몸으로 죽어야 하는 벤자민(브래드 피트)의 삶을 해탈한 모습과 비교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제치고 아카데미를 거머쥔 기분이 어때?
대니 보일 감독의 진가는 처음부터 발휘된다.
혹시 대니 보일 감독을 아시나요? 혹시 대니 보일의 대표작이 [28일 후]로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지금 바로 [쉘로우 그레이브]와 [트레인스포팅]을 보셔야 합니다. [쉘로우 그레이브]는 대니 보일 감독의 데뷔작으로 엄청난 돈 가방을 우연히 손에 넣은 세 친구가 돈에 눈이 멀어 점차 변해가는 상황을 감각적으로 그린 스릴러 영화로 제겐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환생]과 함께 최고의 스릴러영화로 기억되는 영화입니다.
물론 대니 보일 감독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그의 두 번째 영화인 [트레인스포팅]에서부터입니다. 영국의 마약에 취한 영국의 쓰레기 청춘의 일상을 재기발랄하게 그려낸 [트레인스포팅]은 전 세계적으로 열풍에 가까운 성공을 거둡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화의 오프닝신이 CF에 사용되며 흥행에서도 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트레인스포팅]의 성공으로 대니 보일 감독은 자신의 페르소나인 이완 맥그리거와 함께 할리우드에 연착륙하게 됩니다.
그 후 대니 보일 감독은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 [비치], [28일 후], [밀리언즈], [선샤인] 등의 영화를 만들며 감독으로써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 영화 모두 제 개인적으로는 그의 초기작인 [쉘로우 그레이브], [트레인스포팅]과 비교해서는 실망스러운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는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로 볼 땐 [쉘로우 그레이브], [트레인스포팅]보다는 오히려 대니 보일의 영화중 가장 착한 영화인 [밀리언즈]와 닮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 빈민가의 아이들이 경찰을 피해 도망치는 장면에서 [트레인스포팅]의 그 유명한 오프닝신이 떠올랐습니다. 경쾌한 음악과 빠르고 화려한 카메라 워크, [트레인스포팅]의 대니 보일 감독의 진가가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시작에서부터 다시금 발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외쳤던 제게 있어서 그러한 대니 보일 감독의 진가는 정말 반갑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의 뜀박질은 위대하다.
현재는 과거를 만들고, 과거는 현재가 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두 가지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콜센터의 차 심부름꾼에 불과한 자말이 많이 배운 지식인들도 풀지 못하는 퀴즈쇼에 나가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장면과 다른 하나는 그가 그 문제의 답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 과거의 행적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두 가지 장면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장면은 퀴즈의 정답을 부정한 방법으로 알아냈다고 믿고 자말을 사기죄로 심문하고 있는 경찰서 장면입니다.
이러한 서로 상반되지만 서로 연결된 장면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관객에게 보여 집니다. 그러한 방식은 장점이 있지만 단점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은 하나의 장면으로 풀어나가는 단조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그렇게 교차 편집이 너무 반복되면 식상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장점이 단점을 커버합니다. 자말의 과거 행적들을 담은 장면들이 영화적인 재미와 설득력을 얻음으로써 식상함을 없앤 것입니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말의 이야기는 슬프고, 충격적이지만 그와 상반되게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그의 사기죄를 추궁하던 경찰 서장이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듯이 관객 역시 자말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그의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자말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희망을 잃지 않은 빈민가 소년의 열정이 있기 때문이며, 그 열정을 뒷받침해주는 운명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여운 어린 아이와 운명적인 사랑. 관객에게 어필하기 딱 좋은 소재들이 이 영화엔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는 자말이 어떻게 퀴즈쇼의 문제의 답을 알았는지에 대한 영화 초반의 궁금증들은 영화가 진행되며 그의 과거 행적의 이야기 속에서 묻히고, 결국은 과거 행적의 이야기들이 현재의 퀴즈쇼 장면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후반부의 감동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현재의 궁금증으로 시작한 과거가 현재를 뒤덮고, 마지막엔 그 스스로 현재가 되는 이 영화의 독특한 방식은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재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퀴즈쇼는 과거를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너무 착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다.
라띠까(프리다 핀토)를 향한 자말의 사랑은 결코 포기를 모르며 운명적입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관객들은 자말의 해피엔딩을 원하게 됩니다. 과격한 이슬람 단체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아동 앵벌이 단체에게 잡혀가 장님이 될 뻔하고, 형 살림(마두르 미탈)의 방해로 번번이 라띠까를 잃어도 자말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를 향한 해피엔딩은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사실 저는 노골적인 해피엔딩과 너무 착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니 보일의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쉘로우 그레이브], [트레인스포팅]에서 보여준 그의 악동적인 영화의 분위기와 결말이 좋았기 때문이며, 최근 그의 영화중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 분명한 [밀리언즈]에게 유일하게 아쉬웠던 것은 너무 착해진 영화의 분위기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하지만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는 틀립니다. 제가 아무리 착한 영화를 싫어하고 해피엔딩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고단한 인생을 살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던 자말이 행복해지지 않았다면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너무 아픈 여운으로 이 영화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똥통에 빠지면서도 자신이 갖고 싶던 배우의 사인을 받아낸 어린 자말의 그 해맑은 웃음처럼 그가 라띠까와 함께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들었던 것은 비단 저 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흥겨운 음악과 출연배우들의 춤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비록 영원히 가슴에 남을 거대한 감동을 얻지는 못했지만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 행복감을 느꼈으며 어쩌면 그러한 행복감이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쓴 원동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떨 땐 거대한 감동보다 아주 작은 행복이 소중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들의 영원한 행복을 빌었던 것은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자말의 작은 행복은 거대한 감동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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