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9년 영화이야기

[프로스트 vs 닉슨] - 패자는 없이 승자만 있는 인터뷰 게임.

쭈니-1 2009. 12. 8. 23:15

 

 


감독 : 론 하워드
주연 : 프랭크 랑겔라, 마이클 쉰, 케빈 베이컨, 레베카 홀
개봉 : 2009년 3월 5일
관람 : 2009년 3월 13일
등급 : 12세 이상

술 마시고 비실비실

지난 목요일, 회식이 있었습니다. 회계결산 때문에 일주일 연속 야근을 했던 저는 주말엔 어머니 생신 상차림 때문에 마트에 함께 가야한다는 구피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술은 조금만 마시고 금방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공수표를 남발하고 회식에 참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한 잔은 두 잔이 되고, 두 잔은 한 병이 되어 어느새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인지, 술이 나를 마시는 것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회식 후 집에 돌아갈 마지노선인 택시비를 마지막 순간까지 사수했으나 필름이 잠시 끊긴 순간에 동료 직원에게 대리운전비로 빌려 줘버리고 또다시 택시비가 없으니 집 앞으로 나와 달라는 구피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술주정을 한 후에 집에서 쓰러져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화가 난 구피는 먼저 출근해버리고, 저는 쓰린 속을 움켜잡으며 가까스로 회사에 출근을 했지만 하늘에서 벌을 받은 것인지 그날따라 외근 계획이 주루룩 잡혀 있더군요. 책상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든데 외근을 나가려고 하니 눈앞이 핑 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비실비실 거리며 외근을 나왔답니다.
속은 쓰리다 못해 뒤집혀 아프기까지 하고, 난데없는 돌풍이 불어 온 몸은 덜덜 떨리기까지 합니다. 이러다가는 술에 의한 숙취는 물론 감기몸살까지 걸릴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 일단 회사에 전화해 몸이 아파서 외근지에서 곧장 퇴근하겠다고 보고한 후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잃어버린 제 컨디션을 회복했습니다. 물론 당장 집으로 돌아가 이불 속에 파묻혀 자고 싶지만 도끼눈을 하며 벼르고 있는 구피와 개구쟁이 표정으로 절 반길 웅이를 생각하니 우선 극장에서 원기 회복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더군요. 이렇게 해서 제 원기회복 영화로 [프로스트 vs 닉슨]이 선택되었답니다.


 

젊은 사람이 술 마시고 이렇게 비실비실 하려면 앞으로 술 그만 마시게나.


역사 속 인물의 재발견은 그의 장기이다.

[더 레슬러], [드래곤 볼 : 에볼루션]을 제치고 제가 원기회복용 영화로 [프로스트 vs 닉슨]을 선택한 이유는 팽팽한 연기력에 의한 카리스마로 부족한 제 원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레슬러]에서도 미키 루크의 연기력이 돋보인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세월의 풍파에 힘겨워하는 미키 루크의 모습이 오히려 제 원기를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일찌감치 제외되었습니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프랭크 랑겔라) 등 주요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안타깝게도 단 하나의 수상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비록 이 영화가 이렇게 이번 아카데미의 패자가 되어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작품성마저도 평가절하 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미 [뷰티풀 마인드]를 통해 아카데미의 승자로 기록되었던 론 하워드 감독은 [프로스트 vs 닉슨]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어김없이 발휘합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 속의 인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발견해내는 론 하워드 감독만의 독특한 화법입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론 하워드 감독은 수학천재 존 내쉬의 일생을 첩보영화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그려냈습니다. 그 어떤 전기 영화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스릴을 그는 존 내쉬의 과대망상을 통해 이루어 낸 것입니다.  미국의 최고 암흑기였던 경제 대공황 시기에 인간승리를 기록한 복서 짐 브래독의 이야기인 [신데렐라 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록키 시리즈]이후 반복되는 뻔한 스포츠 영화로 보이지만 절망적인 시기에 한 가정의 가장이 겪었던 고난을 복싱이라는 스포츠에 투영시켜 감동을 자아낸 것입니다.
그러한 재발견은 [프로스트 vs 닉슨]에서도 유효한데...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중 퇴임한 대통령인 불명예를 안고 있는 닉슨 대통령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닉슨 소재의 영화처럼(예를 들면 올리버 스톤 감독의 [닉슨]) 정치적이지 않습니다. 단지 최고의 자리에서 추락한 늙은 정치인과 그를 딛고 성공하려는 토크쇼 MC의 입담과 그로인한 인물의 재발견만 있을 뿐입니다.  


 

각하는 이제 한 물간 정치인임을 잊지 마십시오.


닉슨은 절박했다. 그래서 그는 승기를 잡았다.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쉰)는 닉슨(프랭크 랑겔라) 대통령의 사임 장면을 보고 그와의 인터뷰를 기획은 합니다. 처음 그는 단지 닉슨 대통령의 사임 장면을 전 세계 4억이 넘는 사람들이 시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닉슨과의 인터뷰로 돈과 명예를 거머쥐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프로스트에게는 절박감이 없었습니다. 그는 호주에서 알아주는 인기 토크쇼 MC이고, 돈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있으며, 원한다면 여자들과 맘껏 잠자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단지, 지금보다 더 유명해 지고 싶고,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욕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닉슨은 절박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전 세계 최고의 권력에 올랐던 그가 한 순간에 몰락하여 은둔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로써는 더 이상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곳이 없는 최악의 상황인 셈입니다. 돈도 필요했고, 추락한 명예를 회복할 기회도 필요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프로스트와의 인터뷰를 받아들입니다. 그와의 인터뷰를 이용하여 돈과 명예를 되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명은 지금도 충분하지만 더 많은 돈과 명예가 필요했고, 또 다른 한 명은 한때는 많았지만 이젠 전부 잃어버린 돈과 명예의 회복을 노립니다. 이렇게 시작한 두 사람의 인터뷰에서 닉슨이 승기를 잡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닉슨과의 인터뷰를 통해 진실과 국민에 대한 사과, 자신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을 보고 싶었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프로스트는 단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인물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고 싶었을 뿐입니다. 프로스트가 이길 가능성은 그야말로 희박한 게임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갔을 텐데...괜히 나서서 쪽박 차게 됐네.


이젠 프로스트도 절박해졌다. 그래서 이 승부는 박빙이다.

만약 프로스트가 닉슨과의 인터뷰를 방송할 거대 방송사와 계약을 따냈다면, 아니면 인터뷰 방송의 스폰서인 광고를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따냈다면, 어쩌면 프로스트와 닉슨의 승부는 싱겁게 닉슨의 완승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프로스트는 닉슨과의 인터뷰로 인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했고, 그것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이제 프로스트도 절박해진 것입니다.
프로스트는 인터뷰 초기엔 캐롤라인(레베카 홀)과 희희덕거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처음엔 영화를 보며 도대체 캐롤라인이라는 캐릭터가 왜 필요한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프로스트가 그만큼 닉슨과의 인터뷰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캐릭터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터뷰 후반, 캐롤라인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닉슨과의 인터뷰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프로스트의 집념이 비춰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점점 절박해지는 프로스트와는 달리 2번의 인터뷰에서 완승을 거둔 닉슨은 절박감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채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내면 깊숙이 감췄던 속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은 닉슨의 결정적인 패인이 됩니다.
이 영화는 결국 프로스트의 역전승으로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 닉슨의 눈물은 이 인터뷰를 지켜본 미국 국민들이 그토록 원했던 패자의 가녀린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정 여기에서부터 론 하워드 감독의 장기가 펼쳐집니다. 부패한 정치인이었지만 대통령 사임 후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상처를 감추며 오히려 당당해보이려 애쓰던 닉슨의 마지막 무기력한 모습은 그의 패배가 속 시원하기보다는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잘못을 시인하는 그 순간 닉슨은 비열한 정치인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굴레에 갇혀 사는 가여운 사람으로 보여 집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 싸움은 패자는 없이 승자만 있는 게임이 아니었을까요?


 

모두가 승자인 인터뷰 게임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그는 더 이상 비열한 정치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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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영화광
이 영화는 저랑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도 보려고 했으나, [더 레슬러]는 교차상영으로 시간대가 안맞고 [프로스트vs닉슨]은 심야밖에 없더군요.
울며 겨자먹기로 [드래곤볼]을 봤는데, 원작을 안본 저로써는 그냥 무난했습니다.
그런데 원작 드래곤볼이 동양에서 만든것 아닌가요?
영화에서의 배경은 철저히 모두 할리우드라서,,,,,
그리고 약간 유치함 또한,,, 그런데 박준형은 꽤 잘하더군요. ㅎㅎ
뿌듯했답니다.
 2009/03/17   
쭈니 그렇게 인연이 안닿는 영화가 있죠. ^^
저도 [드래곤 볼]이 보고 싶기는 하지만 시간이 안나네요.
박준형이 어떻게 연기했는지 궁금한데... ^^
 2009/03/17   
이빨요정
제가 닉슨 세대가 아니라서 가슴깊이 와닿을것같지는 않을 영화같습니다.
이런 소재는 역시 올리버 스톤같이 아주 치밀하면서도 과격하게 묘사를 해야 제맛인데 말이지요.
론 하워드는 좀 밋밋할거같군요.
 2009/03/29   
쭈니 닉슨에 대한 이야기로 보신다면 밋밋합니다.
우린 미국인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벼랑끝에 선 두 남자의 대결로 보신다면 꽤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두환 전대통령과 허참이 인터뷰를 한다라고 생각해 보세요. ^^
 2009/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