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전윤수
주연 : 김민선, 김영호, 추자현, 김남길
개봉 : 2008년 11월 13일
관람 : 2008년 11월 16일
등급 : 18세 이상
쉬지는 못했지만 내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재고조사로 인하여 토,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직딩에게 주말 휴일을 빼앗아 간다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와도 같은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자칫 회사에서 짤리기라도 하면 직장 구하기도 어려운 탓에 회사 직원들 모두 찍소리 못하고 아주 열심히 휴일에 나와 재고조사를 했습니다.
저 역시 피곤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차라리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하다는 사실을 아주 오래 전부터 깨달았기에 저는 오히려 콧노래를 부르며 일을 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며 직장 동료들은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며 부러워합니다.
전 재고조사 하는 날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보고 싶은 영화를 재고조사 마지막 날 보기로 함으로써 기분을 좋게 유지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쉬지는 못했지만 컨디션이 최상이었던 저만의 비법입니다.
그날 제가 보기로 한 영화는 [미인도]입니다. 이미 꽃미남이 가득한 [앤티크]를 본 저로써는 이젠 헐벗은 여인네들이 가득한 [미인도]를 봄으로써 엉큼한 남자의 본능을 달래줄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미인도]를 기대했던 것은 그저 야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폭풍과도 같은 삶을 살다간 역사속의 인물을 소재로 다룬 사극을 좋아하는 저로써는 [미인도]는 꼭 야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제게 기대작이 될 수밖에 없는 영화였습니다. 비록 야하다는 입소문으로 인하여 자꾸만 그쪽으로 제 관심이 기울여지는 것은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내 알몸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신윤복이 진짜 여자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요즘 들어서 갑자기 신윤복이 인기입니다. 작년 비슷한 시기에 조선시대의 기녀 황진이가 TV 드라마에 이어 영화로 이어지며, 하지원, 송혜교의 각기 다른 황진이를 탄생시키더니만, 올해는 TV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 이어 [미인도]로 이어지며 신윤복 신드롬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신윤복에 대해서 아냐고 묻는다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조선시대의 화가'라고 거의 대부분이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의 화가'라는 대답 속에는 '조선시대의 남장 여류화가'라는 대답도 상당부분 들어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신윤복은 여자였을까요? 하필 비슷한 시기에 드라마와 영화라는 각기 다른 장르로 소개된 신윤복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신윤복은 사실 여자였다'라는 가정으로 시작되었고, 신윤복이 누구였는지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겐 '신윤복이 여자 였구나'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그러했고, 구피도 그랬었으니까요.
하지만 신윤복 연구로 박사 논문을 쓴 안휘준 문화재위원장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쓰더라도 신윤복의 경우에는 분명한 역사적 인물이고 남자인 것이 명백하다'며 '그런 역사적 인물을 흥미를 돋우기 위해 여성으로 변질시킨 것은 심각한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안희준 문화재위원장의 발언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미인도]에서는 신윤복이 여자였다 라는 가정이 있었기에 유교라는 권위적인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시대에서 조선 저작거리의 보통 사람들의 솔직한 삶을 그리고자했던 신윤복의 욕망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근엄한 유교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뒤로는 인간의 말초적인 욕망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여자라는 나약한 내면을 남자라는 딱딱한 외형으로 감춘 신윤복의 모습과 묘하게 일치했던 셈입니다.
요즘은 남자 가면 쓰고 노는 것이 유행이라고...
스스로 사랑에 갇히다.
[미인도]는 여자에겐 그림을 그릴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은 조선시대에서 단지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오빠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을 떠안고 남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신윤복(김민선)의 삶을 재구성하였습니다.
분명 남자였던 신윤복을 여자로 탈바꿈시키는 역사의 왜곡을 감행함으로써 [미인도]가 얻어낸 영화적 재미는 꽤 많았습니다. 여자이면서도 남자의 거짓된 삶을 살며 여자의 욕망을 감추고 살아야했던 신윤복이 인간의 감춰진 말초적인 욕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이 바로 그 중 하나입니다. 만약 신윤복이 남자였다면, 그래서 그 스스로 감춰진 내면이 없었다면 갑자기 저속한 풍속화에 빠지는 신윤복의 변화는 관객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윤복이 강무(김남길)와의 사랑을 통해 그동안 내면 깊숙이 감춰만 두었던 여자로써의 행복을 느끼게 되는 과정 역시 [미인도]가 역사를 왜곡하며 얻어낸 영화적 재미 중 하나입니다. 그 외에 신윤복의 스승이자 라이벌인 김홍도(김영호)가 신윤복에 대한 감춰진 사랑을 드러내는 부분도 '신윤복은 여자다'라는 설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미인도]는 이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얻는 것에 그치면 안 됩니다. 획득한 것을 다듬고 포장하여 좀 더 세련된 영화적 재미를 창출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획득한 것 중 하나를 선택하여 메인으로 내세워야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됩니다. 전윤수 감독이 역사 왜곡의 희생으로 얻은 것들 중 가장 손쉽고 보편적으로 영화적 재미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을 메인으로 내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또 하나의 단단한 새장에 스스로 갇힙니다.
신윤복과 강무의 사랑은 분명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메인으로 나오면서 애초에 신윤복이 남자 행세를 하며 그림을 그려야했던 이유가 많이 퇴색되고 맙니다. 그 결과 [미인도]가 끝날 때쯤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자신의 성을 포기했던 화가 신윤복은 사라지고 이루지 못할 사랑에 목맨 지고지순한 여자 신윤복만 남게 됩니다.
너, 화가 신윤복 하지 말고 그냥 여자 신윤복해라!
에로티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득(得)인가? 실(失)인가?
하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소재만큼이나 동소고금을 막론하고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영화 소재도 없을 것입니다. 전윤수 감독이 그러한 탁월한 소재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던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전윤수 감독은 기왕 화가 신윤복을 포기하고 여자 신윤복을 선택한 만큼 좀 더 과감해지자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선언의 바탕엔 뚜렷한 대표작이 없던 김민선이 배우 생활의 사활을 걸고 [미인도]의 촬영에 임했던 마음가짐과 뜻을 같이합니다.
전윤수 감독과 김민선이 선택한 과감함은 바로 에로티즘입니다.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일 가장 확실한 마케팅에 유명 여배우의 노출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전윤수 감독과 김민선은 [미인도]의 흥행을 위해 바로 그러한 노출을 시도한 것입니다.
[미인도]는 개봉 전부터 김민선의 노출에 대한 정보를 매스컴에 흘렸습니다.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도 김민선을 비롯한 추자연의 노출과 기방에서의 파격적인 장면 등은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대가로 [미인도]는 흡족할만한 흥행을 거두고 있지만 그러한 흥행 성적만큼이나 잃은 것이 더욱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야할까?'에 대한 관심으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면 그건 에로영화입니다. 하지만 [미인도]는 애로영화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사극이고,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살아야했던 신윤복이라는 비극의 여성이 주인공이며, 조선시대 파격적인 풍속화를 그린 실존 인물에 대한 상상의 결과물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고작 여배우들의 노출에 묻혀야 한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윤복과 강무의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그들의 과감한 섹스는 이 영화의 볼거리중 하나에 불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이 이 영화 볼거리의 전부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영화의 에로티즘에 대한 제 반감은 영화를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 영화가 그리고자했던 주제가 별로 공감되지 않았습니다.
신윤복 저것이 기녀인 나보다 더 많이 벗잖아!
2%가 부족해. 2%가 부족하단 말야.
영화는 후반부에 각 캐릭터의 파멸로 끝을 맺습니다. 신윤복도, 강무도 결코 행복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 김홍도도 설화(추자연)도 평생 가슴에 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건 제가 좋아하는 완벽한 비극입니다. 제 뒤에 앉은 여자 관객은 훌쩍거리며 눈물을 터트렸고, 제 옆에 앉은 남자 관객은 여자 친구 몰래 눈물을 숨기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피와 저는 두 눈만 말똥말똥 거리며 '하나도 안 슬퍼.'를 연발했습니다. 구피는 '우리가 감정이 매 마른 것일까?'라고 묻습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구피와 제가 감정이 매 말랐기 보다는 [미인도]가 2%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미인도]는 남자의 삶을 살아야했던 여자 신윤복만으로도 충분히 폭풍 같은 삶을 살다간 역사적 인물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릴 수 있었습니다. 굳이 강무를 희생시키지 않더라도 신윤복의 운명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자연스러운 비극을 앞에 두고 부자연스러운 억지 비극을 만들어 냅니다. 강무의 처형도 조금은 억지스러웠고, 그에 얽힌 김홍도와 설화의 엇나간 사랑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런 억지스러운 설정이 영화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었지만 영화를 더욱더 감동적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2%가 부족해. 그런데 뭐가 부족 한거지?'라며 끊임없이 제게 질문을 던졌던 저는 영화를 보간 후 며칠이 지나고 나서 이 영화가 부족한 2%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바로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쉬웠습니다. 사랑이 메인으로 나서지 않고, 자신의 성을 포기할 정도로 강했던 그림에 대한 신윤복의 열정이 메인에 나왔다면 자연스럽게 감동스러웠을 텐데...
그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구나. 계속 연습하도록 해라.
이 그림을 그리던 신윤복의 열정으로 돌아와 줬으면...
IP Address : 211.227.13.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