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류승완
주연 : 임원희, 공효진, 박시연
개봉 : 2008년 8월 13일
관람 : 2008년 8월 14일
등급 : 12세 이상
목요일 저녁, 혼자 극장에 간 쭈니의 굴욕
구피는 앞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영화를 보겠다는 군요. 제가 너무 많은 영화를 보여줘서 영화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다운로드로 영화를 보겠다는 구피의 생각이 어이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극장가는 것이 귀찮다는 구피를 억지로 끌고 영화 보러 갈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냥 앞으로는 혼자 영화 보는 것에 익숙해지기로 했습니다.(구피와의 6년간의 결혼 생활동안 혼자 극장에 가는 것은 이제 별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목요일 저녁, 다음 날은 광복절이기에 부담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전 그날 영화를 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발생했습니다. 혼자 극장에 갈 땐 항상 통로 쪽 좌석을 예매했었는데 그날은 무심코 가운데 좌석을 예매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평소 하지 않은 짓을 하면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기는 법이죠.
그 불길한 일은 극장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열심히 사람들을 헤치고 맨 가운데 좌석으로 간 저는 왼쪽 옆에 혼자 영화를 보러 온 남자와 오른쪽 옆엔 닭살 커플 사이에 앉았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몇 분 동안은 별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고나니 닭살 커플이 공공연하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입니다. 키스는 보통이었고, 남자의 손이 여자의 가슴과 짧은 치마 속으로...(그 다음은 18금이기에 생략)
암튼 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영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 왼쪽의 혼자 온 남자가 영화는 안보고 제 오른쪽 닭살 커플을 구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거 난감하더군요. 오른쪽엔 닭살 커플은 여관인지 극장인지 분간 못하고 애정행각을 벌이고, 왼쪽엔 남자는 영화는 안보고 그 닭살 커플의 애정행각을 구경하고, 그 중간에 낀 저는 '영화에 집중하자'라며 제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있으니...
그래도 다행히 영화가 재미있어서 이 난감한 상황에서도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영화가 끝난 후 껌껌한 극장에 불이 켜지자 닭살 커플은 절 자꾸만 째려보더군요. '뭐야... 영화는 안보고 너희들의 애정행각을 구경한 것은 내가 아닌 내 옆의 남자였어. 난 정말 영화만 봤어. 난 변태가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런 변명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에 그냥 서둘러 극장 밖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처럼 잘 생긴 남자도 가끔은 혼자 영화를 보러 간다고...
류승완 감독, 처음 출발점을 되돌아 보다.
전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저와 동갑내기인 그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통해 단번에 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젊은 감독으로 떠오르더니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 [주먹이 운다], [짝패]를 통해 젊은 감각의 영화들을 주로 만들어 왔습니다. 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보지 못했고, [피도 눈물도 없이]는 기대와는 달리 실망스러웠지만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서부터 [짝패]까지 그의 영화가 너무 맘에 들어서 이번 [다찌마와 리]도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찌마와 리]는 류승완 감독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들기 전 인터넷 상영을 위해 만든 디지털 단편 영화 [다찌마와 Lee]를 장편으로 옮긴 영화입니다. 류승완 감독은 이 괴짜 같은 단편을 통해 스타로 등극했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도 만들 수 있었으며, 지금의 이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다찌마와 Lee]는 지금의 류승완 감독을 있게 해준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류승완 감독이 [다찌마와 Lee]를 장편 영화로 옮기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마치 [엘 마리아치]를 통해 스타 감독으로 등극한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엘 마리아치]를 [데스페라도]에 정성껏 옮겨 놓았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로 마무리를 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류승완 감독도 자신의 원천을 뒤돌아보고 완벽하게 완성 짓는 작업에 착수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의미 있는 이유는 주류 감독으로써의 경력이 쌓이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초심을 다시한번 되돌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류승완 감독의 시작이 B급 감수성이 농후한 액션 영화였지만, 스타 감독으로 등극한 그의 영화들은 점점 매끈한 상업 영화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처음으로의 회귀는 류승완 감독의 B급 감수성과 주류 감독으로써 터득한 상업성의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다찌마와 리]가 좋았습니다. 사실 [다찌마와 리]는 상업 영화로는 어울리지 않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대놓고 유치하고, 스토리는 할리우드 첩보 영화들을 짜깁기한 것처럼 조잡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유치함과 조잡함은 류승완 감독의 원천을 엿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류승완 감독은 의미 있는 '출발점 되돌아보기'를 통해 유치함과 조잡함이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게 행복한 웃음을 전해줍니다.
내가 유치하다고? 하지만 곧 내 매력에 흠뻑 빠져들걸!!!
유치함의 미학
이 영화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치합니다. 과장된 액션은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만 같고, 의도적으로 유치찬란하게 꾸민 대사는 70년대 멜로 영화의 느낌을 한껏 살려냅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TV에서조차도 방영하지 않는 엄앵란, 신성일 시대의 아주 유치한 목소리로 더빙 작업을 함으로써 '그래, 나 유치하다'라고 당당하게 선언을 합니다.
만약 그러한 유치함을 즐기지 못한다면 이 영화를 절대로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국의 주성치표 영화들보다 훨씬 유치하고, 마이크 마이어스의 [오스틴 파워 시리즈]보다는 조금 더 유치합니다. 사실 이 정도면 대놓고 유치한 영화들 중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유치함이 바로 제가 [다찌마와 리]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40년대, 사실 생각해보면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들은 많았습니다. 올해에만 [원스 어폰 어 타임]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시대적 배경과 이야기의 전체적인 전개 방식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것뿐입니다. 시대적 배경이 같고, 이야기의 전제적인 틀이 같다고는 하지만 막상 [다찌마와 리]와 [원스 어폰 어 타임]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비교해보면 그 어디에도 비슷한 점이 없습니다.
그만큼 [다찌마와 리]는 독특합니다. 요즘처럼 영화들이 서로 엇비슷해지는 상황에서 이런 독특한 영화를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입니다. 물론 그 독특함이 자신의 취향과 맞아야 하지겠지만 제 경우는 이렇게 대놓고 유치한 영화를 좋아하는 독특한 취향 탓에 [다찌마와 리]가 딱 제 스타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엉터리 외국어와 인터넷 불법 동영상 자막을 패러디한 장면 등 이 영화를 아직 안본 분들을 위해서 이 영화의 유치함을 글로써 설명하고 싶지만 제 짧은 글 솜씨로는 부족하네요. 일단 한번 보시는 수밖에...
아무리 꽃단장을 해도 유치한건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래, 임원희... 잘 생겼다.
이러한 유치함은 배우들에게서도 드러납니다. 사실 유치함을 담보로 하는 영화에서 잘생긴 주인공은 필요 없습니다. 주성치나, 마이크 마이어스가 개성은 있지만 잘생겼다고 할 수 없듯이 [다찌마와 리]의 주인공인 임원희는 그 독특한 마스크를 십분 활용하여 영화의 웃음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임원희는 제임스 본드를 뺨치는 희대의 바람둥이 첩보요원입니다. 영화도중 등장인물들이 다찌마와 리를 보며 '잘생겼다'라며 감탄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탄사는 임원희의 독특한 얼굴과 맞물려 제게 웃음을 안겨줍니다.
바로 그러한 식입니다. 만약 [원스 어폰 어 타임]의 박용우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정우성처럼 실제로 잘생긴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면 결코 웃을 수 없는 코믹 요소들이 임원희로 인하여 웃음으로 뒤바뀌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절묘한 캐스팅은 박시연, 공효진에게도 이어집니다. 상당한 미모를 지닌 박시연과 터프하면서도 당당한 매력이 있는 공효진이 겉보기에 어리버리한 임원희에게 반해서 쩔쩔 매는 모습은 참 묘한 카타르시즘을 안겨줍니다.
류승완 감독의 동생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중 한명인 류승범이 임원희에게 매번 당하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류승범과 임원희의 역할이 바뀌었어야 마땅하지만 이 뒤바꾼 배역으로 인하여 느끼는 웃음과 재미는 정상적인 캐스팅이 안겨주는 재미를 몇 배 능가합니다.
결국 [다찌마와 리]의 유치함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임원희의 존재가 절대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독특한 얼굴과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이 영화의 유치 코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영화의 재미를 더욱 살려주는 것입니다.
어머! 너무 잘생겼다.
첩보 영화로도, 액션 영화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과연 유치함만 있었다면 제가 이토록 [다찌마와 리]를 격찬했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대놓고 유치한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오스틴 파워 시리즈]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유치함만 있을 뿐, 그 속을 관통하는 탄탄한 스토리 전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다찌마와 리]의 스토리는 조잡합니다. 할리우드의 첩보 액션 영화들을 짜깁기한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짜깁기는 이 영화의 유치함이라는 특성에 맞춰 오히려 영화의 내용 안에 패러디 이상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어갔습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영화의 액션입니다. A급 영화라고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짜여진 이 영화의 액션은 마음껏 웃고 즐기면서도 어느 순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연출시킵니다. 생각해보세요. 얼굴은 웃고 있고, 손엔 땀을 쥐고 있는 상황을.
첩보 스릴러로써도 꽤 좋은 점수를 받을만한데, 맘껏 웃다가보면 마지막 반전에 뒤통수를 맞게 됩니다. 물론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고, 그리고 눈치 못 챌 반전은 아니었지만 이 영화 자체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기다보면 반전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혔습니다. 젊은 감독의 패기와 독특함, 그리고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먹힐 수 있는 연출력과 영화적인 재미는 류승완 감독이 아직 젊고 지금까지 만든 영화보다 앞으로 만들 영화들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고무적입니다. 그런 젊은 감독이 있기에 한국 영화는 매번 위기론에 봉착하면서도 그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것일 겁니다.
앞으로 정진하다가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류승완 감독. 이제 그는 뒤도 돌아 볼 줄 아는 현명한 감독이 되었기에 그의 앞으로의 영화들은 더욱 진취적이고, 새로우며,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007영화의 스키장 액션에 버금가는 인간썰매 액션이다.
다찌마와 리, 우리 이번 영화 성공적인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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