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앤드류 스탠튼
더빙 : 벤 버트, 프레드 윌라드, 제프 갈린
개봉 : 2008년 8월 6일
관람 : 2008년 8월 9일
등급 : 연소자 관람가
습관이라는 것은 정말 무섭다.
살인적인 폭염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구피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기세가 아까워 웬만하면 집에서 에어컨을 켜지 않는 구피는 설상가상으로 여름휴가로 인하여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하니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죽을 맛인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가 후유증으로 목, 금요일을 회사에서 비몽사몽으로 보내야했던 저는 산더미처럼 쌓인 일들을 처리해야했지만 마음만 굴뚝같은 뿐 몸은 전혀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유로 기진맥진이 된 채 맞이한 토요일 아침, 구피는 열대야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루다가 늦지막히 잠자리에 든 탓인지 아침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으며, 휴가 후유증으로 비몽사몽 하다가 금요일 저녁 일찍 열대야도 무시한 채 깊은 잠자리에 든 저는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그 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한꺼번에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구피를 홀로 남겨두고 극장으로 향했던 저는 설렘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로 예정되어 있던 영화가 바로 [월-E]와 [다크 나이트]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렸던지...
하지만 그날 첫 번째 영화인 [월-E]가 시작되는 그 순간 저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온 몸을 감 쌓았습니다. 그 이유는 [월-E]가 자막 버전이 아닌 우리말 더빙 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영화 보는 재미에 푹 빠진 웅이 덕분에 애니메이션은 항상 웅이와 함께 봤던 저는 습관적으로 [월-E]도 우리말 더빙으로 예매를 했던 것입니다. 저 혼자 영화를 보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습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 인가봅니다. 영화가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까지 저는 제가 당연히 자막 버전으로 [월-E]를 예매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는 습관적으로 우리말 더빙 버전으로 예매를 했던 것입니다. 거참, 허탈하고 난감하더군요.
난 습관적으로 퍼즐큐브만 보면 머리가 아프다.
지구에 홀로 남은 청소 로봇 월-E
비록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말 더빙 버전으로 [월-E]를 봐야했지만 [월-E]는 내 인생의 애니메이션이라고 칭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정말 엄청난 재미와 감동을 지닌 영화였습니다.
처음 이 영화의 예고편을 봤을 때 전 곧바로 감이 왔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애니메이션이 될 것 같다는... 그리고 그러한 제 감은 이 영화의 신선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미래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들은 쉘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월-E]처럼 전혀 색다른 시선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희망을 찾은 영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색다른 시선과 희망은 사람이 아닌 '월-E'라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로봇에게서 비롯됩니다.
'월-E'는 쓰레기더미로 뒤덮인 지구를 버리고 스스로 우주의 방랑자의 길을 선택한 인간들과는 달리 혼자 묵묵히 지구의 청소를 맡아온 로봇입니다. 이 로봇의 기능은 아주 단순합니다. 쓰레기를 모아 압축시키고 그 압축된 쓰레기들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지구에 홀로 남은 '월-E'는 점차 외로움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월-E]와 비교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나는 전설이다]입니다. [나는 전설이다]역시 가까운 미래, 바이러스로 인하여 인류가 돌연변이가 되어 버린 절망적인 시대에 홀로 남은 인간인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의 활약상을 호러와 액션의 중간지점에서 그려낸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초반, 홀로 외로움 이겨내려 몸부림치는 네빌의 모습은 '월-E'의 그것과 많이 비슷합니다.
하지만 [나는 전설이다]가 제겐 그냥 볼만했던 오락 영화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월-E]는 결코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영화로 기억되는 것은 두 영화가 가지고 있는 희망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전설이다]는 영웅의 등장과 그러한 영웅의 사명감, 정의감으로 인류의 희망을 제시한데 반에, [월-E]는 외로움과 사랑이라는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음을 희망으로 제시합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다움을 잊지 않을 때 인간의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그렇기에 '월-E'의 단순한 행동 하나하나가 제겐 감동스러웠던 것입니다.
홀로 남은 자의 외로움을 그대는 아는가?
투철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탐사 로봇 이브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며 홀로 외로움을 이겨나가던 '월-E'에게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바로 이브의 등장입니다. 이브는 '월-E'와는 달리 고성능을 지닌 로봇임과 동시에 투철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오히려 '월-E'와는 달리 영웅에 가까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월-E'에겐 그러한 자신과 이브의 차이를 감지할 능력이 없습니다. '월-E'는 무작정 이브에게 다가갑니다. 이브가 무시무시한 공격을 해와 두려움과 공포가 온 몸을 휘감아도 '월-E'는 이브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만큼 외로움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낼 정도로 '월-E'에겐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처음 '월-E'와 이브가 만나는 장면에서 앤드류 스탠튼 감독은 의도적으로 두 로봇의 차이를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까칠까칠한 표면과 네모반듯한 구식 디자인의 '월-E'와 부드럽고 세련된 곡선으로 표현된 이브의 모습은 마치 구식과 신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월-E'의 이브를 향한 구애는 그저 웃음만 자아냅니다.
하지만 '월-E'는 구식 로봇답게 구식으로 이브를 지켜내고, 이브를 향한 일편단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재고, 앞뒤 사정을 살피며 계산적으로 만나는 이름만 사랑인 거짓 사랑이 아닌, 눈에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만 보이고, 귀에는 사랑하는 이의 이름만 들리는, 죽음도 결코 무섭지 않은, 이른바 지금은 멸종해버린 구식 사랑. 그것을 '월-E'가 하고 있으며, [로미오와 줄리엣]이후 그러한 사랑을 볼 수 없었던 구식 사랑의 매니아인 제 마음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월-E'의 지고지순한 구식 사랑은 이브를 감동시키고, 인간다움을 잊은 채 우주를 방랑하던 인간들도 다시 인간다움을 찾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우리가 '구식'이라며 비웃고 멸시하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 미래의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사랑은 신분, 아니 로봇의 레벨도 초월한다.
인간다움을 되찾아라.
영화의 초반은 이렇듯 요즘 영화에서 보기 드문 구식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월-E'가 이브를 쫓아 인간들이 우주에서 방랑을 하던 우주선에 탑승하면서 이야기는 긴장감과 감동의 강도를 높입니다.
우주선의 인간의 모습, 어쩌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일을 할 필요도 없고, 고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움직일 필요조차 없습니다. 모든 것이 로봇이 알아서 해주는 인간들은 손 하나 까닥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러한 세상이 미래의 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몸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지고, 정신은 나태해지고, 생활은 지루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 그들에게 행복인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오랫동안 그러한 생활을 반복해왔기 때문입니다.
[월-E]의 후반부는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월-E'의 이브를 향한 단순하고도 구식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오랫동안 나태한 생활에 익숙해진 인간들을 일깨우고 지구로의 회귀와 인간다움의 회복을 선언하게끔 이끕니다. 물론 그 사이에 이를 방해하는 세력과의 흥미진진한 모험이 펼쳐짐으로써 영화는 극적 재미를 최대화합니다.
비대해진 몸으로 인하여 인간이라기보다는 오뚜기에 가까운 몸매를 보여주고 있는 인간들이 드디어 인가다움을 회복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문 벅찬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몸은 노동으로 인하여 고달프고, 거친 지구의 환경으로 인하여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그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들은 고향별을 되찾았고, 되찾은 고향별 지구를 위해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극장 밖을 나서는 저도 그들처럼 행복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렇게 행복감을 느껴 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소화기를 이용한 그들의 사랑 행각?
이 구식 로봇이 날 이렇게 행복하게 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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