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인항
주연 : 유덕화, 홍금보, 매기 큐
개봉 : 2008년 4월 3일
관람 : 2008년 4월 3일
등급 : 15세 이상
종로거리에만 서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종로거리는 고등학교 시절 제가 처음으로 영화에 대한 열정을 싹 피웠던 추억의 거리입니다. 요즘은 집도, 회사도 서울 강서 쪽에 있다 보니 종로에 올 기회가 적은 편이지만 종로라는 말만 나와도 제 머리 속엔 영화의 향기에 취해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혼자 종로거리를 방황하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런 제게 있어서 회사일로 을지로 사무실에 가야할 땐 유혹의 연속입니다. 을지로 사무실에 가기위해 필연적으로 거치는 종로에서 저는 사무실로 곧장 가지 못하고 고등학교 시절처럼 방황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대형 멀티플렉스로 변신하였지만 제겐 추억의 극장인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 그리고 다른 극장들에 비해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편인 서울극장과 지금은 예술영화 상영관으로 변신한 허리우드극장, 종로에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갈 수 있는 명보극장과 중앙극장, 대한극장, 그리고 이제는 사라진 국도극장까지... 종로와 을지로, 충무로로 이어지는 그 거리는 봄기운 탓에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제게 새로운 영화의 활력소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서울극장에서 [어톤먼트]를 봤을 때처럼 그날도 저는 영화의 유혹을 못 이기고 점심식사를 거르는 것으로 업무 땡땡이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또다시 종로의 피카디리극장 앞에 섰습니다. 도대체 몇 년 만에 피카디리극장에 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오랜 시간 만에 저는 고등학교 시절 추억이 물씬 풍기는 극장 앞에 다시 선 것입니다.
추억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날 제가 선택한 영화는 그날의 상황과 너무나도 잘 맞는 [삼국지 : 용의 부활]이었습니다. 종로거리에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에 빠져 회사업무를 뒤로 밀고 영화를 봤듯이, [삼국지 : 용의 부활]은 [삼국지]라는 추억의 소재와 유덕화, 홍금보라는 추억의 스타로 단단하게 무장된 영화입니다.
먼저 [삼국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죠. 과연 어린 시절 [삼국지]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소설로든, 만화로든, 어떤 형식으로든 우리는 [삼국지]를 봤으며 [삼국지]에 대해서 알 고 있을 것입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고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서 조조와 맞서 싸우는 그 영웅담은 어느덧 제겐 하나의 거대한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전 [삼국지]의 열렬한 팬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를 정도로 [삼국지]를 딱 한번 밖에 안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느낌은 강력했습니다. 당시 저는 셰익스피어의 3대 비극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비록 셰익스피어의 3대 비극은 아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책으로, 영화로, 몇 번이나 볼 정도로 제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문학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제게 [삼국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버금가는 비극이었습니다. 영웅호걸들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하나둘씩 쓰러져갈 때 책장을 넘기는 제 손끝은 안타까움으로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그 거대한 꿈을 결국 이루지 못했을 때의 그 비장미 넘치는 슬픔은 아직도 제 가슴 속에 아프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삼국지]가 영화화하는 것도 모자라 그 주연을 유덕화와 홍금보가 맡았습니다. 홍금보는 성룡과 더불어 80년대 시절 코믹 액션으로 이름을 널리 떨친 배우이며, 유덕화는 80년대 후반 혜성같이 나타나 주윤발, 장국영 등과 함께 홍콩 느와르의 전성기를 이끈 배우입니다. 게다가 [영웅본색]의 적룡이 관우로 잠시 나오니 홍콩영화 팬의 입장으로써는 진수성찬과도 같은 배우들의 향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삼국지]라는 추억의 소재와 유덕화, 홍금보라는 추억의 스타는 [삼국지 : 용의 부활]을 추억의 향기에 흠뻑 빠져있던 그날의 영화로 전혀 손색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조자룡, 새로운 영웅의 탄생
하지만 [삼국지 : 용의 부활]이 마냥 제게 기대되는 영화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영화의 주인공이 유비, 관우, 장비, 혹은 제갈량이 아닌 조자룡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조자룡을 압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에 새겨진 조자룡은 단지 촉나라의 장군 중 한명일 뿐이었습니다. 분명 [삼국지]를 단 한번 밖에 읽지 못한 얼치기 팬인 저로써는 조자룡이라는 캐릭터를 발견할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조자룡을 소재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 반, 우려 반이었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삼국지]의 영웅을 발견한다는 것은 기대할만 했지만,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점은 우려 할만 했습니다.
그러나 [삼국지 : 용의 전설]은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홍콩영화 특유의 비장미를 앞세워 조자룡을 멋진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단지 태평성대를 이루어 가정을 가지고 싶다는 평범한 꿈에서부터 시작한 조자룡의 영웅담은 촉나라의 백전백승의 영웅이 되지만 결국 유비, 관우, 장비처럼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백발이 성성한 조자룡이 부하들을 모두 잃고 홀로 몇 십만 대군의 위나라 군사들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마치 홍콩 느와르의 그 비장미 넘치는 비극적인 라스트를 보는 것 마냥 가슴이 아팠습니다.
결국 천하통일은 유비, 관우, 장비의 촉나라도 아니고, 조조의 위나라도 아닌 진나라가 이루었다는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안타까웠습니다.
마치 줄리엣의 죽음을 잘못 알고 독약을 마셔버린 로미오의 선택처럼, 로미오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잠시 동안의 죽음을 선택했지만 자신의 앞에 영원히 죽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를 맞이하게 되는 줄리엣의 울부짖음처럼, 한낱 꿈에 불과한 천하통일을 위해 그렇게 쓰러져갔던 조자룡의 모습은 비극 이상의 비극이었습니다.
평생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커다란 원을 그린...
영웅호걸로 천하에 이름을 떨쳐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겠다던 나평안(홍금보)의 야심과는 달리 청년 조자룡(유덕화)은 그저 세상이 빨리 평화로워져서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어쩌면 아주 당연한 꿈을 안고 촉나라의 군대에 자원입대합니다.
그는 뛰어난 무예로 큰 공을 세워 영웅이 되었고, 고향에서 평생 함께하고 싶은 여인을 만났지만 그의 평범한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전쟁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용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은 그에겐 너무 허황된 것이었습니다.
적을 죽이고, 또 죽였지만 천하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적은 끊임없이 다시 달려들었습니다. 그 쌓여있는 시체더미 속에서 조자룡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어쩌면 나평안이라면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전쟁 영웅의 꿈을 그는 이루었으니까요. 하지만 조자룡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평안에게 말합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큰 원만 그리다가 죽는다고... 그의 인생은 그렇게 허무했습니다. 세상은 그를 영웅이라는 칭했지만 그 스스로는 작은 소원도 이루지 못한 불행한 인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인 조조의 치욕을 갚기 위해 조자룡에게 칼을 들이미는 조영(매기 큐)과 천하통일이라는 야망을 위해 소모품이 되어버린 조자룡의 마지막 전투는 그래서 '멋있다'라는 표현보다는 '슬프다'가 더욱 잘 어울립니다.
우리는 영웅으로 기억하지만 그 자신은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큰 원만 그리던 허무한 인생이라고 평했던 조자룡. 영화가 끝나고 유덕화의 그 허무한 눈빛만이 가슴에 휭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그 여운을 잠시 잊고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제게 어쩌면 조자룡은 부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저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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